* * *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휴먼매니저로 들렀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급히 최부장님에게 전화했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네요?"
-전부 일산 현장에 와 있다.
"네? 왜요?"
-선풍기 스무 대가 도착했는데 조성일 반장 혼자서 조립시킬 수는 없잖아.
최부장의 전화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휴먼매니저 직원들이 모두 일산현장에서 선풍기를 조립하고 현장을 정리한다는데 괜히 내가 빠져서 섭섭했다.
"아…"
-냉풍기도 도착했고 쇼케이스도 전부 배치 끝난 상황이야. 흐흐 얼음물이 아주 잘도 언다. 얼어.
"일산현장에서 퇴근하시겠네요?"
-그렇지. 김대표도 오지 그래?
"저는 들어가서 쉴게요."
-구찬모 센터장이랑 본사로 갔다면서? 에어컨 설치는 어떻게 한대?
"다행히 잘 해결됐습니다. 조만간 공사 들어갈 거예요."
-잘됐네. 고맙다. 김대표. 자네 덕이야.
"부장님 덕이죠."
거짓말은 아니었다.
최부장을 보고 있노라면 초심을 잃지 않게 만들었다.
전화를 끊고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고독을 씹었다.
스마트폰으로 경성 그룹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좋은 내용이 딱히 없다.
갑질 폭로 기사가 많았다.
[슈퍼 갑질의 경성 그룹 장녀]
[재벌 3세 갑질의 폭행]
[세습 경영을 탈피하지 못하는 기업]
특히 경성그룹의 장녀가 유명했는데, 가사도우미에게 씨X놈, 개X끼의 욕은 빈번했고, 침을 뱉거나 신발, 가위, 음식, 등을 던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차남도 마찬가지였다.
클럽에서 성 접대를 받은 혐의가 있었고 경성그룹이 소유한 호텔 바닥에 이물질을 발견하고 관리자를 협박, 폭행, 폭언을 일삼은 일도 있었다.
막장이다.
자식들이 이러한데 최명희 여사야 다를까? 불과 20년 전 최명희 여사의 기골이 장대할 때, 현재 자식들이 저지른 짓들과 비슷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긴, 최명희 여사를 만나기 위한 매뉴얼이 존재했는데 자식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갑질이다.
조만간 감사위원의 자리에 오른다면 주주들의 힘을 등에 업어 이러한 작태를 아주 송두리째 뒤 엎어버리라 다짐했다.
물론 초심을 잃지 않고 말이다.
최명희 여사에게 전화했다.
"여사님?"
-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전화는 내가 직접 건다고…
"에어컨 설치는 언제부터 될까요?"
3% 지분으로 시총 4조 기업을 먹는다고?
대부분의 회사는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된다.
기업 설립 및 운영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고 회사의 자본금으로 충당하기 어려운 사업들이 많기 때문에, 주식발행으로 주주들에게 투자받는다.
그래서 회사의 주인은 주주들이라는 말이 있다.
휴먼매니저가 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하지 않는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다.
상법에 따라 이사회를 운영해야 하고 중대 결정에 관한 회의를 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시간적인 소모다.
모든 결정은 내가 한다.
주주들은 기업의 분기별 주주총회에서 1주에 1표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기업의 주요 안건들은 주주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되고, 사내, 사외이사 선임 및 재무제표 등의 승인을 받는 결정을 한다.
최명희 여사에게 약속받은 ‘감사위원’ 자리는 주주총회를 통해 결정된다.
허나, 주주들이 아무리 결집한다고 하더라도 최대 주주의 지분을 압박하기는 힘들다.
과거에는 지분율에 따라 의결권이 정해졌기 때문에 현재 장녀의 32%의 지분으로 본인의 입맛대로 이사회를 편성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최대주주의 횡포를 막고 공정 경제를 위한 3% 룰이 생겼다.
최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안하는 상법이 만들어진 계기는 최대주주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사회를 견제하기 위함이고, 기업에 대항하며 감시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뽑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법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론 기업의 세습경영이 많은 탓으로 생각했다.
경영 전문가들이 기업을 물려받으며 이어 나가는 게 아닌 유난히 족벌 경영이 많다.
경영을 해본 적도 없는 경성그룹의 장녀가 주식을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경성그룹의 경영권을 소유한 상황이다.
잘 돌아갈까?
의문이다.
과거 어떤 기업은 회장이 죽고 안 사람이 기업의 경영권을 승계 받았는데, 사업을 다 말아먹음과 동시에 분식 회계까지 일삼아 결국 시가총액 2조짜리가 파산해버렸다.
만약 3% 룰이 순기능으로만 흘러간다면 이런 비극적인 일은 나타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법이 순기능으로만 흘러간다면 좋으련만, 최대 주주를 견제하기 위한 상법이기 때문에 기업들의 반대가 심한 편이다.
최대주주의 주식 보유량과 관계없이 3%의 의결권만 주어진다면 어느 기업 회장들이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재산권 침해라는 말도 나오곤 했다.
결정적으로 최대주주의 의결권을 3% 제한 설정한다면 기업 대다수가 경영권 위협을 받을 수 있다.
만약 경성 기업의 최명희 여사가 다른 헤지펀드나 투자 기업에 도움의 손을 뻗었다면 감사위원 자리는 다른 회사의 이해관계인이 임원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경우다.
3%의 룰을 이용하여 내부 균열이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최악의 경우라면 기업의 라이벌 회사가 이사회 진입도 가능한 법이었다.
주식 지분을 3%만 소유하면 되니까. 지분 쪼개기로 회사를 장악하는 건 쉬운 일이니까.
장점도 단점도 많은 상법이라며 현재도 존폐 여부와 논란이 많긴 하지만 이 법을 잘만 이용하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현재 경성그룹은 장녀의 손아귀에서 놀아난다.
최명희 여사도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개정된 상법을 꺼내들어 본인의 위치를 더 확고히 하고자 함이었다.
감사위원 자리는 현재 최대 주주인 장녀를 압박할 수 있다.
회사의 업무를 감독할 수 있고, 회계도 감독할 수 있다.
최명희 여사의 목적은 최대주주인 장녀를 압박하며 본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함이다.
3%룰을 이용한 ‘감사위원’자리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최명희 여사의 뜻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할까?
"어휴 저 여자는 나잇살을 먹어도 어째 저리 피부가 탱탱할까."
엄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최명희 여사의 피부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들린 베트남 쌀국수 가게에서 한가롭게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는 터라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겨버렸다.
"피부가 실제로 좋긴 좋더라."
"실제로 봤어?"
"그럼, 사무실도 들어가 봤지. 호화의 끝판왕? 드라마에서도 본 적 없는 호화스러움?"
소쿠리에 담긴 땅콩을 집어 먹으며 엄마와 시간을 축냈다.
"호화스러우면 뭣 해. 자식 놈들이 순 개망나니 짓만 하고 다니잖아."
"그치."
"속이 얼마나 탈까. 저 나이 먹고도 자식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쯔쯔. 저게 다 업보라는 거야."
"업보?"
"도일이 너는 잘 모를 거다. 이십 년 전에 저 여자 얼굴이 뉴스에 도배됐었던 적이 있었지."
"정말?"
"어휴 말도 말아라. 저 독사같이 생기 눈만 봐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다 알 거다. 아주 못되게 생겨서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었지 아마."
물론 알고 있었다.
"저러니 자식들이 저 모양 저 꼬락서니지 안 그래 엄마?"
"그럼. 부모들이 잘 키웠어봐."
"엄마는 어떄?"
"도일이나 도현이 보면 뿌듯하지."
"흐흐."
최명희 여사는 나의 어머니를 못 배우고 무식해서 평생 식당 일이나 하며 살았다고 비하했다.
"엄마는 무슨 마음으로 우릴 키웠어?"
"응?"
갑작스러운 질문에 엄마가 다소 당황한 것 같았다.
"그렇잖아. 사는 게 힘들었을 텐데 이 악물고 일한거 보면 엄마도 참 대단해."
"너희들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 인생은 포기했다."
때마침 도현이가 우산을 접으며 들어왔다.
해맑게 웃으며 다가왔다.
"형, 어제 장사 대박"
"많이 팔았냐?"
"손님 엄청 많았지…"
도현이가 엄마의 무거운 표정에 눈치만 살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냐. 가서 일해. 형도 좀 있다가 사무실 들어가 봐야 돼."
뉴스에서 보도되는 경성그룹 남매간의 경영권 다툼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도현이가 착해 보이기 시작했다.
* * *
경성그룹 감사위원 자리로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에 회사 직원들의 마음은 연신 들떠 있었다.
"그러면 대표님이 경성그룹 실세가 되는 건가요?"
고사원이 말했다.
과거 워킹휴먼과 경성 택배는 아주 인연이 깊었다.
황부장의 횡령사건으로 경성 물류에서 원청 감사가 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때 이후로 고사원은 감사라는 단어만 들으면 질색을 했다.
"바보야. 대표님은 경성 그룹의 사외이사 감사위원이지 월급 받는 직원은 아니야."
정주임이 고사원을 질책하며 말했다.
"월급 나올 텐데?"
"네?"
"사외이사도 월급 나와. 흐흐."
"아…그러면 대표님은 휴먼매니저 대표이면서 감사위원인데…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해. 실제로 교수로 재직하면서 기업의 감사위원으로 재직하는 사람들도 있어."
"대단하시네요. 대표님."
"주주총회에서 결정 날 일이야. 아직 결정된 건 없어, 그 전에 너희들이 해줘야 할 게 있는데…"
"네?"
이제 내 머릿속 계획을 현실화 시켜야 했다.
* * *
최명희 여사의 뜻을 존중하는 바다.
나에게 감사위원이라는 감투를 씌어주고 본인의 뜻대로 회사를 다시 손아귀에 쥐고 싶은 마음도 알겠다.
자식 들이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그런데 최명희 여사의 뜻대로 움직이면서도 내 나름의 실속도 차려야 했다.
경성 그룹 일가의 민낯을 철저히 파헤쳐보고 싶었다.
최명희 여사가 나의 신상을 뒤에서 캐내서 엄마를 모욕했듯이 말이다.
휴먼매니저 직원들이 모두 회의실에 모였다.
최부장과 오과장도 자리했고 이지혜 팀장도 오랜만에 콜센터에서 사무실로 내려왔다.
주요 핵심 인물들이 모두 모인 자리라 반가웠다.
"오랜만에 다들 모이셨네요."
화이트보드 판에 앞에선 내가 그들을 보며 말했다.
하나같이 의아한 얼굴이다.
그리고 큰 글씨로 ‘조현정’이라는 이름을 썼다.
"조현정?"
최부장이 말했다.
"경성그룹의 장녀 조현정을 얘기하는 거지?"
"네 맞습니다. 부장님."
첫 번째 타깃은 장녀 ‘조현정’
경성그룹의 실소유주다.
"갑질로 유명한 년 아닌가요? 예전에 수행 기사한테 접시 던져서 머리에 피나고, 경비원에게 음식 쓰레기 선물해주면서 먹으라고 하고 따귀까지 때리고…"
정주임이 말했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경비원이었기 때문에 경비원에게 갑질하는 사람만 보이면 목에 핏대를 세우곤 했다.
실제로 경비원들이 조현정의 반려견을 돌보다 손가락을 물렸고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졌음에도 치료비는 고사하고 질책만 했다고 한다.
비단 경비원뿐만 아니라 그녀의 수행비서는 스트레스에 시달려 말을 더듬는 병에 걸렸고 청력을 상실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세금 사기꾼을 잡은 것처럼 이번에도 경성그룹 조현정을 잡는 건가요? 하… 안 되는데."
현준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왜?"
"경성그룹에 주식 넣어놨단 말이에요. 혹시 이번 일로 주식 떨어지면…"
"월급 깎는다?"
"죄송합니다."
"다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김대표, 우리가 조현정을 잡아서 회사가 이익을 볼 게 뭐지?"
최부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회사에 이득이 최우선이다.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불필요한 소모로 판단할 뿐이다.
"최대 주주의 조현정을 경영권에서 물러나게 한다면 최명희 여사가 회장직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최명희 여사는 제가 잘 구워삶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감사위원 자리에 올라간다면 실질적으로 휴먼매니저가 경성그룹을…"
"먹을 수 있다는 거네요?"
이지혜 팀장이 말했다.
"그렇죠."
그와 동시에 오과장이 손뼉을 쳤다.
"브라보. 그럼 우리 대기업 되는 건가?"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시가총액 4조 원이 넘는 경성그룹의 경영권을 단돈 720억 원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조현정을 잡아야 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간혹 회의를 할 때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많았기 때문에 회의를 소집한 이유였다.
가령, 전세금 사기꾼을 잡았을 당시 이지혜 팀장의 아이디어가 좋았듯이 이번에도 동료들의 힘을 빌려보고 싶었다.
때마침 이지혜 팀장이 손들었다.
"의견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팀장님."
"조현정이란 사람이 만약에 갖은 갑질로 유명하다면…"
"하다면?"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가서"
"들어가서?"
"취업을 하면 안 될까요?"
"취업이요?"
"네. 적을 더 가까이 두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죠."
"조현정의 집에 취업을 하는 겁니다."
그 순간 내 머리도 번뜩였다.
현재 경성그룹 장녀부터 차남, 최명희 여사까지 한남동과 성북동에 위치한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갖은 갑질로 타인에게 폭력과 폭언, 온갖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경성 그룹 최대주주라는 감투로 법망을 아주 잘도 피해왔다.
그녀가 받은 처벌은?
약식기소.
벌금형이 전부였다.
"정주임!"
"네. 대표님."
"조현정의 저택에 경비원이나 수행기사들 파견해주는 회사가 어디지?"
"잠시만요."
정주임이 조사해본 결과 그녀는 한남동 저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저택의 경비원, 기사, 파출은 ‘태성인력’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태성인력에서 모두 관리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태성인력…?"
"네. 대표 이름은 회사 이름과 동일하네요. 조태성이요."
뜸 들일 필요가 없었다.
"다들 투잡 한번 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