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식당-329화 (329/330)

# 329

Side dish 8. 끝과 시작

강지한은 기억의 잉크를 일기장에 투자했다.

[기억의 잉크 한 개를 투자했습니다. 일기장의 일부 내용이 나타납니다.]

1990년 6월 27일.

갈수록 지한이의 발길질이 심해진다.

.

.

.

대가님께서 걱정하시는 일.

그것은 자신이 눈을 감은 후, 과연 자식들에게 제사상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건 나도 걱정이다.

신성정이란 연을 끊고 나오면서 그쪽 동네 이야기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대가님께서는 자식들에 대한 고민과 화가 가슴 속에 가득 차 있어서 1년 전 앓아누우셨다.

다들 대가님께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요리연구에만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그리된 것이라 말하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큰 오빠와 작은 오빠만 속을 썩이지 않았더라면 건강하게 무병장수하셨을 분이다.

언제였더라?

문득 내가 대가님께 여쭤본 적이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그러자 대가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더니 일곱 가지의 수수께끼를 내주었다.

그 수수께끼의 답이 바로 대가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 하셨다.

[마지막 내용이 잠겨 있습니다.]

[기억의 잉크를 투자할 때마다 내용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이거였구나.”

설윤진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하나하나 드러나던 문제들.

그것은 한정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곱 가지 음식에 대한 힌트였다.

지금까지 강지한이 풀어낸 문제는 여섯.

이제 한 가지만 남아 있는 상황.

강지한이 히든 스테이지의 목표를 확인했다.

[Hidden Stage. 설윤진의 일기장]

[목표: 일기장의 비밀을 알아내세요.]

“한정신 대가님이 살아생전 좋아했던 일곱 가지 음식을 모두 알아내기만 하면 일기장의 비밀을 풀게 되는 건가?”

말을 흘린 강지한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너무 간단한데. 뭔가가 더 있어.”

그 뭔가를 알아내려면 마지막 한 가지의 음식이 뭔지 알아내야 했다.

마지막 음식에 관한 힌트는 12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끝에 다 왔다.

강지한은 일기장을 장롱에 넣어놓고서는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뒤를 돌았다.

그런데 예소린이 팔짱을 끼고서 서 있는 게 아닌가.

“헉.”

놀란 강지한이 헛숨을 들이켰다.

“매일 밤 뭔가 부산하다 싶더니 부모님 유품 보느라 그런 거였어?”

“어? 어어.”

“그걸 뭘 그렇게 몰래 봐. 안쓰럽게. 앞으로는 그냥 대놓고 봐.”

“으, 응. 근데 왜 깼어?”

“글쎄요. 왜 깼을까요?”

예소린이 강지한을 째려봤다.

그에 강지한이 가만 생각해보니 예소린이 깰 만도 했다.

설탕이와 집 밖을 들락날락한 것도 모자라 거실에서 안고 뒹굴면서 큰소리로 떠들어 댔으니.

“미안.”

강지한이 멋쩍게 웃었다.

“나 다시 재워주면 봐줄게.”

“얼른 들어가자.”

두 사람은 다시 안방으로 들어와 나란히 누웠다.

강지한은 예소린에게 팔베개를 해주고서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눈을 감고 잠이 들락말락한 상태로 예소린이 말했다.

“지한 씨, 우리 아빠. 숙자 아주머니랑 잘 살겠지?”

“장인어른처럼 의리 있고 진국인 사람 드물잖아. 잘사실 거야.”

“이 나이에 새엄마가 생길 줄은 몰랐어.”

“기분이 어때?”

“싱숭생숭해. 근데 싫진 않아.”

예소린은 자신이 강지한과 결혼하게 되면 혼자 남게 될 예경천이 내심 신경 쓰였었다.

그런데 새로운 반려자가 생기게 되었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숙자 아주머니 말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참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었어. 향숙이랑 지내는 모습 보면 부러울 때도 있었어. 나도 저런 엄마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었거든.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네.”

예소린의 혀가 갈수록 슬슬 풀리고 있었다.

수마가 그녀를 계속 꿈속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숙자 아주머니는 소린 씨한테 분명 좋은 엄마가 되어줄 거야.”

“……그럴까.”

“응.”

“…….”

예소린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대신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일정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좋은 꿈 꿔, 소린 씨.”

강지한이 잠든 아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 * *

하루가 지난 5월 15일 토요일 밤.

지한 정식 일을 마치고 퇴근해 돌아온 강지한은 드디어 마지막 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신선숙수의 증표.’

“김치.”

강지한의 입에서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마지막 문제의 답을 맞췄습니다.]

[기억의 잉크 한 개가 지급되었습니다.]

강지한은 기억의 잉크를 바로 사용했다.

드디어 일기의 마지막 내용이 나타났다.

1990년 6월 27일.

갈수록 지한이의 발길질이 심해진다.

.

.

.

그 수수께끼의 답이 바로 대가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 하셨다.

수수께끼는 잊어먹지 않으려고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잘 적어두었다.

처음에는 이 수수께끼들이 뭘 얘기하는지 모르겠더니 지금에 와서는 쉽게 답이 나온다.

아주아주 먼 훗날, 대가님이 좋은 곳으로 가시게 되면 내가 꼭 제사상 차려드릴게요.

그러니까 아직은 눈 감지 마시고 꼭 쾌차해서 일어나세요.

1990년 6월 27일의 일기를 다 읽는 순간, 히든 스테이지의 목표가 바뀌었다.

[Hidden Stage. 설윤진의 일기장]

[목표: 한정신의 기일에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제사 지내 주세요.]

[성공 보상: 령(靈)의 선물.]

“이거였어.”

강지한은 바로 인터넷에 접속해 한정신의 기일을 알아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90년 5월 17일이었다.

오늘이 5월 15일이니 이틀 후에 그의 기일이 돌아오는 것이다.

‘아슬아슬했네.’

만약 강지한이 일기장의 문제를 푸는 데 시간을 더 허비했다면 히든 스테이지의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서 1년을 꼬박 더 기다려야 할 뻔했다.

‘다음 주 월요일 밤에 제사를 지내드려야겠다.’

이틀이면 일곱 가지 음식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하고 만들어 보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 김치는 이미 완벽하게 만들어내고 있으니 여섯 가지 음식만 제대로 요리하면 될 일이다.

내일은 모처럼 쉬는 일요일이지만 평일보다 더 바쁠 것 같았다.

* * *

5월 16일, 일요일.

이리나와 용성우는 춘천을 벗어나 서울로 상경했다.

정확히는 이리나가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던 그녀의 본가로 걸음을 한 것.

사전에 얼굴 보러 가겠다는 전화 한 통 없이 무작정 집으로 들이닥쳤다.

용성우는 그래도 전화를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이리나를 달랬지만, 그녀는 무대뽀처럼 밀어붙였다.

전화를 했다가 받지 않으면 괜히 용기만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벨을 누르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드러난 엄마의 얼굴에 이리나는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작 몇 년이었다.

그 몇 년 사이 어머니의 얼굴엔 전에 없던 주름이 가득 잡혀 있었다.

* * *

한 시간이 넘도록 숨 막히는 긴장감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실엔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이리나와 용성우, 그리고 이리나의 부모님이 마주 앉은 채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몇 년 만에 재회한 딸을 그녀의 부모님은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오랜 침묵이 이어지다 드디어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얼굴 보니 생각보다 고생은 덜한 모양이구나.”

“운이 좋았나 봐요. 좋은 직장에 좋은 사장님 밑에서 일하다 보니 그렇게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어요.”

직장이라는 말에 아버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직장? 제대로 된 직장을 구했어?”

“네. 평생직장으로 생각하면서 다니는 중이에요.”

“흠. 옆에 같이 오신 분은 누구냐.”

“제가 결혼할 사람이에요.”

“결혼?”

“당장 할 건 아니지만 결혼을 생각하며 만나고 있어요.”

“벌써부터 결혼 얘기 입에 담을 만큼 많은 나이는 아니지 않냐.”

“적은 나이도 아니잖아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어렵게 생각한 거예요.”

이리나와 그녀의 아버지. 두 사람의 기가 팽팽하게 맞부딪혔다.

그걸 보면서 용성우는 이상하게 긴장이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투는 딱딱하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건네는 말들엔 한결같이 딸에 대한 걱정이 담겼다.

두 부녀의 대화가 잠깐 끊겼을 때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리나야, 너 그 몇 년 동안 어떻게 전화 한 번을 안 하니.”

“그러는 엄마는 왜 안 했어요?”

“하고 싶었어.”

“안 했잖아요.”

“할 수가 없었어.”

“왜 못해요.”

“미안해서.”

“……네?”

생각지 못했던 답변에 이리나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미안해서 못했다고.”

“뭐가 미안해요?”

“그냥…… 네가 집 나간 뒤로 엄마나 아빠나 둘 다 덜 자란 부모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라. 정훈이 일로 누구보다 네가 더 힘들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야. 우리도 힘들었으니까. 그래서 죄 없는 너한테 모든 원망이 돌아가 버린 거고.”

사실 원망할 대상 같은 건 없었다.

가족들은 저마다의 아픔을 가슴에 안아야 했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법이다.

이리나의 부모님은 그렇게 믿었고 본인들의 아픔이 세상 가장 클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리나가 더 힘들었다는 딸의 빈자리를 보면서 깨우쳤다.

반성도 많이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나 이리나에게 먼저 전화할 염치가 없어 그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오랜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그 먹먹한 얘기들을 모두 토해낸 어머니가 이리나의 손을 살짝 잡았다.

“먼저 용기 내줘서 고마워, 리나야.”

“…….”

이리나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런데 보통 때였으면 이미 담배 한 대 피우러 나갔을 아버지가 그러지 않고 있었다.

“혹시 담배 끊으셨어요?”

이리나가 묻자 아버지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래.”

“왜요?”

대답은 눈물을 훔치던 어머니에게도 들려왔다.

“너한테서 언제 연락 올지 모르니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고 끊으셨어. 이십 년, 삼십 년 후에 연락 왔는데 막상 본인이 관 짜고 들어가 있으면 안 된다고.”

“거, 그런 말을 미주알고주알 뭐하러 해?”

이리나의 아버지가 툴툴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리나의 마음속 응어리가 눈 녹듯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몇 년 동안 쌓여 왔던 갈등과 원망, 야속함, 미운 감정들이 어떻게 말 몇 마디 섞자마자 모두 없어질 수 있는 건지 본인도 신기할 정도였다.

그게 바로 가족이었다.

“아무튼 너무 늦지 않게 잘 왔다. 고맙다.”

아버지가 괜히 딴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비로소 이리나의 입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 위로 눈물이 흘렀다.

딸내미의 눈물에 아버지는 가슴이 저릿했지만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그래, 우리 리나랑 결혼할 분이시라고.”

“아, 네! 용성우라고 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용성우가 벌떡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의가 참…… 과도하게 바르시구만. 그래……. 직업은 어찌 되시나?”

“네! 요리사입니다!”

“요…… 리사?”

요리사라는 단어에 아버지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어머니의 표정도 딱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리나의 부모님은 요식업을 하다가 쫄딱 망한 적이 있어서 그쪽 분야 사람과 딸이 맺어지는 건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거, 사람은 건실해 보이는데 직업이 마음에 걸리네.”

“리나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분야에서 꼭 성공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에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올해 몇이나 되셨나?”

“스물아홉입니다!”

“우리 리나랑 한 살 터울이군. 스물아홉. 내가 요식업으로 판을 벌렸다가 쫄딱 망한 게 서른 초반이었네. 그게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얘기지. 아, 말 편하게 해도 되겠나?”

“괜찮습니다!”

“흠. 자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난 이 결혼에 긍정적일 수가 없어요. 요리사라는 게 안정된 직업도 아니고 미래가 어찌 될지 몰라 불안하지 않은가. 그…… 요새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그 양반. 여보, 이름이 뭐였지?”

“강지한이요.”

“맞아, 강지한. 그 양반 정도나 되면 또 몰라. 아주 손을 대는 사업마다 대박이더구만. 게다가 직원들 복지도 좋고, 월급도 많이 준다던데.”

“뿐이에요? 회사에서 먼저 직원을 자르는 경우도 없대요.”

“나이도 그렇게 많이 먹지 않은 양반이 참 대단해.”

두 분의 입에서 강지한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이리나와 용성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의외의 곳에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답이 존재했다.

이리나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아까 내가 평생직장으로 생각하면서 다니고 있다는 곳이 그 강지한 대표님이 처음으로 런칭한 식당이에요.”

“뭐? 그게 정말이야?”

“네. 주방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거기 주방장이 성우 오빠고요.”

“뭐어?!”

부모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지한이 운영하는 식당 건물 하나의 주방장을 맡고 있다니.

샌님 같기만 하던 용성우가 갑자기 다르게 보였다.

“자네 정말 강지한 대표랑 같이 일하고 있나?”

“네! 제가 강지한 대표님께서 받아주신 두 번째 직원이자 첫 번째 요리사입니다! 첫 번째 직원은 리나였습니다!”

“허허. 이것 참.”

아버지는 놀라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고, 어머니는 슬쩍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리나는 모든 일이 잘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5월 17일 월요일.

강지한은 자정이 넘어가자마자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삼합미음, 잣국수, 선농탕, 효종갱, 송편, 모주, 김치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완성된 음식들은 거실에 펼쳐진 큰 상에 놓였다.

그 상은 한정신을 위해 차려진 제사상이었다.

상에 음식들이 전부 차려질 때쯤, 하경춘이 강지한의 집에 도착했다.

“오셨어요.”

강지한이 반겨주자 하경춘은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와이프는?”

“친정 갔어요.”

“싸웠어?”

“아니요. 장인어른께서 불렀어요. 보고 싶다고.”

아울러 이향숙에게 재혼 허락도 떨어졌으니 재혼에 대해서 이것저것 딸과 얘기 나눌 것이 많을 터였다.

“아아, 그랬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는 하경춘의 눈에 제사상이 들어왔다.

“어머나, 이게 뭐래요?”

“한정신 대가님의 제사상입니다.”

강지한이 그리 말하자마자 하경춘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그녀의 옆에 붙어 있던 혼령이 제사상 앞으로 가서 떡하니 앉는 게 아닌가.

‘강 대표가 제대로 했나 보다!’

하경춘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럼 지금부터 제사 올릴 테니 하 도사님께서는 한정신 대가님께서 흡족해하시는지 알려주세요.”

“나한테 붙은 혼령이 누구인지 눈치챘구나, 강 대표.”

강지한은 고개를 끄덕인 뒤, 진지한 자세로 제사를 올렸다.

이런 식의 제사를 제대로 지내본 적이 없는 강지한이었기에 미리 인터넷에서 찾아본 지식을 토대로 차근차근 제사의 예를 치러나갔다.

그렇게 모든 격식을 다 갖추고 난 뒤 강지한은 하경춘을 바라보았다.

“어떤가요?”

하경춘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령이 아주 기꺼워하고 있어. 자네가 절 올리고 술 드릴 때마다 음식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맛보고서는 좋아하셨어.”

바로 그때였다.

허공에서 폭죽이 터지더니 빵빠레가 울렸다.

펑! 퍼펑!

빰빠밤빰빠! 빰빠밤빰빠!

[축하합니다. Hidden Stage. 설윤진의 일기장의 목표를 완수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나는 순간 갑자기 하경춘이 강지한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 도사님?”

“지한아, 내가 이렇게 너를 보는구나.”

이상했다.

얼굴을 하경춘이나 풍겨지는 분위기나 말투는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강지한이 마른침을 꿀꺽 넘기며 물었다.

“혹시…… 한정신 대가님이십니까?”

하경춘에게 빙의한 한정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얼굴에서 윤진이의 모습이 보이는구나. 참으로 훌륭하게 자라주었다. 지한이 덕분에 난 비로소 이승에서의 한을 풀고 저승으로 갈 수 있을 것 같구나.”

그 말에 강지한의 정신이 멍해졌다.

“설마…… 눈 감으시고 한 번도 제사상을 받아보시지 못하셨는지요?”

“받아봤지. 형식적으로나마. 자식 놈들이 내 기일에 날 부른다고 해서 가보면 하나같이 흥미 없는 음식들만 가득 쌓아놓고 세상에 보여주기 식으로 쌩쇼를 하더구나. 살아생전 제 아버지가 무엇을 좋아했는지도 몰랐던 것이야. 쯧쯧.”

한정신은 답답한 듯 혀를 차더니 이내 표정을 풀고 미소지었다.

“그러나 윤진이는 달랐지. 그 지혜로운 아이는 다 알고 있었어.”

“맞아요. 어머니는 알고 계셨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도 대가님의 제사상을 차려주지 않으셨나요?”

“그럴 여유가 없었지. 자세한 것은 직접 들어보려무나.”

“……네?”

“이것은 네가 내 소원을 들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니라. 허허허.”

[보상 ‘령(靈)의 선물’이 지급됩니다.]

짧은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강지한의 주변 광경이 무너져 내리며 밝은 빛으로 가득 찼다.

“여긴……?”

강지한이 사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친근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한아.”

등줄기에 소름이 짜르르 일었다.

강지한이 천천히 몸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설윤진이 살아생전 곱던 모습 그대로 서서 미소 짓고 있었다.

“엄…… 마?”

“잘 지냈니, 우리 아들.”

“엄마!”

강지한이 어린아이처럼 달려가 엄마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니, 끌어안으려 했다.

그런데 오히려 품에 안긴 건 자신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강지한의 모습도 중3 시절의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엄마가 못했던 걸, 우리 아들이 대신해 줬네. 이렇게 훌륭히 자라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 엄마가.”

“엄마. 보고 싶었어,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강지한은 설유진의 품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그런 아들의 등을 엄마는 부드럽게 쓸어내려 주었다.

“나도 우리 아들 이렇게 품에 안아보고 싶어서 혼났어. 그런데 대가님께서 힘써 주신 덕에 이렇게 안아보게 됐네?”

한정신은 살아생전 이승에서 많은 덕을 쌓은 공로로 저승에서 제법 높은 관직을 받게 되었다.

그 관직의 힘으로 저승에 있는 설윤진과 이승에 있는 강지한이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설윤진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강지한은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육신이 아니라 영혼 대 영혼으로 교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윤진의 마음과 생각을 강지한이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얼마나 자신을 그리워했는지. 안아보고 싶어 했는지. 그리고 이렇게 함께할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 또한.

강지한은 절대 엄마를 저승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듯 꽉 끌어안았다.

그런 그의 영혼에 설윤진의 기억 하나가 스며들었다.

설윤진은 언젠가 한정신 대가의 제사를 꼭 치러주겠다 마음먹었다.

하지만 강지한을 낳고 나서 육아에 너무 정신이 팔렸다.

강지한은 그녀의 세상이자 우주가 되었다.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모든 관심을 강지한에게만 쏟느라 한정신의 제사에 대한 생각은 점차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한남선과 한돈선이 아버지의 제사상 정도는 차려주고 있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흘러 강지한이 중3이 되던 해, 신선정에 다녀온 이후 설윤진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미 한남선은 신선정의 본을 흐려놓으며 운영해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 사람이 한정신 대가의 제사상을 제대로 차려줄 수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설윤진은 이번 년도 한정신 대가님의 기일에 자신이 꼭 제자상을 차려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해 사고를 당해 명을 달리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가슴 속에 한으로 남았던 일을 자신의 아들이 결국 대신해 주었다.

그녀의 고마운 마음이 강지한의 영혼을 포근히 안아주었다.

강지한은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그러나 달콤한 시간일수록 왜 이다지도 짧게 느껴진단 말인가.

이제 이별을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지한아,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해나갈 수 있지?”

가지 말라고, 이대로 이 공간에서 둘이 함께 있자고 떼를 쓰고 싶은 강지한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예소린과 설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이제 강지한은 혼자가 아니었다. 어린아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현실에 두고 온 그의 가족을 챙겨야 하고, 벌여놓은 사업들을 책임져야 했다.

“응. 그럴 수 있어.”

어차피 받아들여야 하는 이별이라면 엄마에게 걱정보다는 든든함을 전해주고 싶었다.

강지한을 바라보는 설윤진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엄마도 이제 마음 놓고 지낼 수 있겠다. 고마워, 지한아. 엄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나도. 나도…… 사랑해, 엄마.”

설윤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빛의 공간이 사라지고 강지한은 다시 거실에 서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머리야.”

그의 앞에서 하경춘이 머리를 흔들며 비틀거렸다.

넘어지려는 그녀를 강지한이 얼른 잡아 세웠다.

“하 도사님. 괜찮으세요?”

“으응? 응 강 대표. 나 괜찮아.”

대답을 한 하경춘이 강지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데 얼굴이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슬픔은 없었다.

그는 지금껏 하경춘이 보아왔던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하고 행복하며 안정되어 보였다.

하경춘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강 대표, 이제 괜찮아?”

강지한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네. 이제 정말로 괜찮아요.”

* * *

5월 30일.

춘천 남부사거리에 위치한 예식장에서는 어느 중년 남녀의 재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재혼의 주인공은 예경천과 김숙자였다.

두 사람은 수많은 하객들의 축복 속에 부부로서 다시 태어났다.

예소린과 이향숙은 두 사람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지한 또한 이 아름다운 자리에 가족으로서, 그리고 진행자로서 함께하고 있었다.

결혼식은 주례 없이 진행되었고 간단한 절차 몇 가지만을 치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제 신랑 신부의 행진만이 남은 상황.

강지한이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신랑, 신부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행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랑, 신부, 행진.”

멘트가 끝나는 순간 아름다운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코끝이 찡해진 예경천이 애써 울음을 참으며 김숙자와 손을 잡고 걸어나갔다.

그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사람들이 던져주는 꽃비가 내렸다.

이로써 강지한에게는 장인뿐 아니라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는 장모까지 생겼다.

한 가지를 떠나보내니 한 가지가 다가왔다.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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