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
Side dish 7. 음력 열닷새의 반절
이른 아침 용성우는 잠에서 깼다.
그러고는 마주한 낯선 천장에 심히 당황하여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주변을 한참 둘러보던 용성우는 거기가 강 대표의 집, 안방이라는 걸 겨우 알아챘다.
‘내가 왜 여기에……?’
새벽에 있었던 일이 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제 일을 끝마치고 속상한 마음에 술집에서 홀로 소주를 세 병이나 비운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한데 그다음이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설마 고주망태가 된 상태로 여기까지 와서 꼬장 부리다 잠든 거야?’
대체 본인이 무슨 주사를 부렸고 어떤 얘기들을 한 건지 도통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이상한 건, 숙취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셔대면 다음 날 머리가 깨질 듯 지끈거리고 속이 뒤집어지는 용성우였다.
그런데 오늘은 마치 어제 술 근처에도 가지 않은 것처럼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컨디션이 더 좋았다.
용성우는 그것이 강지한의 이불 덕분이라는 걸 몰랐다.
레벨 업 시스템으로 영험한 효력이 깃든 이불은 세 시간만 덮고 자도 숙취가 사라지고 피로 또한 전부 풀려버린다.
“성우, 일어났어?”
용성우가 아직 멍하니 있을 때, 방문 너머에서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 일어났습니다!”
“오늘 일 나갈 수 있겠니?”
“멀쩡합니다! 아직 일곱 시니까 씻고 아침까지 먹어도 넉넉합니다!”
“다행이네. 근데 성우야. 너 어제 일 기억나?”
“그게…… 사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구나.”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질문을 던진 용성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난 차라리 네가 실수를 좀 했으면 좋겠다.”
“네?”
“성우 너는 너무 고지식하고 예의 바른 데다 조심성이 많아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더라도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 면이 있거든. 연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고.”
“……그렇죠.”
“가끔은 그 선을 넘는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야. 모르는 일이잖아. 상대방은 사실 네가 선을 넘어서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랄지도.”
“그럴까요?”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난 그렇다고 봐.”
“하아. 어렵네요.”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은 용성우는 문득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강지한은 여전히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보통 남자끼리는 일어났다고 하면 편하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울러 이런 대화는 얼굴을 마주하고서 나누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강지한은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말을 걸고 있었다.
“근데 다행스럽게도 어제 네가 그 선을 넘었지.”
“네? 제가요? 대, 대표님한데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요?”
“아니. 리나를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마지막엔 그 말만 반복하다 잠이 들었어. 뭐 그 정도로는 선을 넘었다고 할 수가 없지.”
이상한 말이었다.
방금 전에 용성우가 선을 넘었다고 하더니 바로 그 정도로는 선을 넘었다 할 수 없다며 말이 바뀐다.
“성우야. 하나 물어볼게. 이 세상에 신이 있다고 생각해 봐. 그 신이라는 존재가 네 앞에 나타나서 물어보는 거야. 지금 리나가 처한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 그 대가로 네가 요리사로서 이룩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고. 그럼 넌 어떻게 대답할래?”
강지한의 물음이 끝나자마자 용성우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럴 겁니다!”
“진심이야?”
“네!”
“훌륭한 요리사가 되는 건 네 꿈이었잖아. 그런데 지금껏 이뤄놓은 모든 걸 버리면서까지 리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다고?”
“대표님, 사람에게는 살아가면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게 하나쯤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것이 제 꿈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제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 그건 리나입니다!”
“그럼 네 꿈은?”
“리나만 곁에 있어준다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꿈은 제가 노력해서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곁을 떠나간 리나의 마음은 어떻게 해야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떠나갈 일이 없도록 있을 때 계속 잘해주고 싶습니다!”
용성우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강지한이 흡족한 음성으로 말했다.
“멋지다, 성우야. 아, 그리고 새벽에 네가 선을 넘은 대상은 내가 아니야.”
“그럼 제가 누구에게 선을…….”
“리나한테.”
용성우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할 때였다.
닫혀 있던 안방 문이 비로소 열렸다.
열린 문 너머에는 강지한과 이리나가 서 있었다.
“리, 리나야!”
깜짝 놀란 용성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빠, 잘 잤어?”
“아니…… 너 여긴 어쩐 일로. 대표님께서 부르셨어요?”
“아니. 난 부른 적 없어.”
“근데 어떻게.”
이리나가 의아해하는 용성우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빠가 새벽에 연락했어. 강 대표님 집이라고.”
“내가?”
“응. 혀 엄청 꼬여 가지고 엉엉 울면서.”
용성우가 후다닥 스마트폰의 통화기록을 확인해 봤다. 정말로 새벽 네 시경 이리나에게 전화를 건 기록이 있었다.
“맙소사. 내가…… 전화해서 뭐라 그랬어?”
이리나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다고. 자기 미워하지 말라고 그랬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 떠나가지 말고 같이 어려운 난관들 전부 헤쳐나가자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그랬더니 오빠가 어떻게든 해결해 주겠다고 그랬었어.”
“아…… 내가 그랬구나.”
그제야 강지한이 말한 선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뭔지 이해되는 용성우였다.
이전까지는 이리나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를 감히 자신이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가타부타 얘기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마음속 한편에서는 자신이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것을 술의 힘으로 털어놓은 것이다.
생각에 잠긴 용성우를 보며 이리나가 말했다.
“나는 그게 술김에 그냥 한 소리인 줄 알았는데, 오늘 와서 보니 아니네?”
“술에 취해서 한 말인 건 맞지만 다 내 진심이야.”
“응. 알아. 조금 전에 확인시켜 줬잖아. 솔직히 나 감동했어. 그리고 덕분에 용기도 얻었고.”
이리나가 용성우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이번 주말에 부모님 뵈러 갈래. 같이 가줘, 오빠.”
그녀의 부탁에 용성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내일을 향해 과감히 움직이기로 했다.
* * *
지한 김치 전골은 점심보다 저녁에 더 바쁘다.
술손님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김숙자는 주방에서 바쁘게 음식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귀에 난데없이 이향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에그머니나!”
깜짝 놀란 김숙자가 고개를 돌리니 이향숙이 주방 문턱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너 여기 왜 왔어?”
“나 한 가지만 물어보자.”
“엄마 바빠 죽겠는데 갑자기 뭘 물어? 집에 가서 얘기해.”
“아 몰라. 지금 대답해. 그때까지 못 기다려.”
“아니 저년이 근데.”
“부동산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
“뭐, 뭐?”
“푸훕!”
“큭큭큭.”
“깔깔깔~ 향숙이 짱이다.”
김숙자는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졌고, 다른 주방 직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계집애가 뭘 잘못 처먹었나. 갑자기 엄마 일하는 데 와서 그게 무슨 말이야!”
“아, 빨리 대답이나 해! 부동산 아저씨가 그렇게 좋냐고!”
“그래! 좋다 왜!”
“얼마나 좋은데? 나보다 더 좋아?”
“어휴. 하여튼 물어보는 수준하고는. 야 이 정신 나간 년아!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보다 소중한 게 있겠어! 그걸 꼭 물어봐야 알아?”
“그럼…… 내가 더 좋아?”
“관둬, 이년아! 재혼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울 테니까 집에 가! 넌 꼭 그런 걸 물어서 엄마 속 뒤집어 놔야 속이 풀려?”
김숙자가 버럭 성을 냈다.
그런데도 이향숙은 뭐가 좋은지 피식거리며 웃더니 말했다.
“그럼 재혼해.”
“알았다고! 안 한다고! 결혼 안…… 응? 방금 뭐라 그랬어, 너?”
“하라고, 재혼.”
“……진심이야?”
“믿기 싫으면 말아요. 나 간다~.”
이향숙이 손을 휘휘 흔들고서 잽싸게 식당을 나섰다.
그에 김숙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런대?”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향숙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비로소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불편함이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 *
‘음력 열닷새의 반절.’
강지한은 새로 나타난 문제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설탕이가 그런 강지한의 무릎에 턱을 괴고 누워 있었다.
녀석의 몸을 슬슬 쓰다듬으며 강지한이 말을 흘렸다.
“이게 무슨 뜻이야.”
음력 열닷새의 반절이라니.
음력 열닷새라는 건 음력 15일이라는 얘기다.
보이는 그대로 풀이해보면 음력 7일 하고 반나절이라는 답밖에 나오지를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음식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끄아아앙~.
강지한이 장고(長考)하고 있는데 설탕이가 하품을 했다.
“흐흐흐. 넌 하품 소리가 진짜 왜 그러냐.”
언제 들어도 설탕이의 하품은 웃음이 터지게 만든다.
강지한이 녀석의 턱을 살살 긁어주니 벌떡 일어나서는 현관문 쪽으로 타다다 달려갔다가 다시 강지한에게 다가왔다.
밖에 나가자는 뜻이다.
“밤공기 마시고 싶어? 추울 텐데.”
헥헥!
설탕이가 괜찮다는 듯 꼬리를 팽팽 돌렸다.
“그래. 잠깐만 나갔다 오자.”
강지한도 생각을 전환시킬 겸 설탕이와 마당으로 나갔다.
한데 막상 마당에 나가자고 했던 설탕이는 별로 신나는 기색이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당을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그런데 그냥 강지한의 옆에 서서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하늘을 봐? 거기 뭐 있어?”
강지한도 설탕이를 따라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어두운 밤하늘엔 작은 점 같은 별들이 촘촘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별들을 밝혀주는 달도 보였다.
“초승달이네.”
별생각 없이 달빛의 내려주는 운치에 젖어있던 강지한은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문제에 대한 실마리가 떠올랐다.
“가만……. 달? 혹시. 설탕아, 들어가자.”
설탕이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 강지한이 설윤진의 일기장에 적힌 문제를 다시 확인했다.
‘음력 열닷새의 반절.’
음력 열닷새.
음력이라는 것은 달의 운동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니까 음력 열닷새라는 건 바로 보름달이 뜨는 날을 말한다.
그리 생각해 볼 경우 이 문제는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이 가능했다.
“보름달의 반절.”
보름달의 반절은 반달이 된다.
곧 이 문제는 반달을 닮은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세상에 반달 모양의 음식은 대단히 많다.
한데 보름달과 반달이라는 주제어에 가장 크게 얽혀 있는 음식은 송편이다.
송편의 유래는 여러 가지인데 그것들 대부분이 달과 관련이 있었다.
그중 하나만 풀어보자면 이렇다.
삼국시대 백제의 의자왕이 궁궐 땅속에서 거북이 등껍질을 발견했다. 한데 거기에 ‘백제는 만월이요, 신라는 반달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심상찮게 여긴 의자왕은 유명한 점술사를 불러 이게 무얼 뜻하는 것이냐 물었다.
그러자 점술사는 백제는 만월이라 이제 서서히 기우는 반면, 신라는 반달이라 차차 커져서 만월이 될 것이라는 뜻이라 해석했다.
즉, 백제의 명운이 다했다는 얘기였다.
그 예언대로 결국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게 됐다.
이후로 신라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더 나은 미래를 기원하는 반달 모양의 송편을 빚어서 먹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게 재미를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진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없으나 가장 유명한 설 중 하나이고 달에 얽힌 이야기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울러 한국에서는 보름달이 뜨는 추석에 송편을 먹는다.
“정답은 송편.”
강지한의 말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문제의 답을 맞췄습니다.]
[기억의 잉크 한 개가 지급되었습니다.]
[일기장에 새로운 문제가 12시간 이후 추가됩니다.]
강지한이 희열에 찬 시선으로 설탕이를 바라봤다.
“너 이 녀석. 형한테 힌트 주려고 밖에 나가자고 했던 거야?”
왕! 헥헥.
기분 좋게 짖은 설탕이가 꼬리를 흔들었다.
“아이고~ 내 복덩이! 없으면 어쩔 뻔했어? 응?”
강지한은 그런 설탕이를 품에 안고 털에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오늘도 갓설탕은 활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