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
Restaurant 318. 소리장도(笑裏藏刀)
“이제 가봐야겠구나. 겨우 두 시간밖에 안 되는 브레이크 타임을 나 때문에 허비하게 해서는 안 되지.”
대충 이야기가 정리되자 한돈선이 몸을 일으켰다.
“마중해 드릴게요.”
강지한이 한돈선을 따라 일어섰을 때였다.
지이이이잉-.
그의 스마트폰에 진동이 왔다.
강지한이 확인해 보니 하경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좀 전에 영 좋지 않은 상태로 가버린 그녀가 신경 쓰였던 강지한은 바로 메시지를 읽었다.
급하게 두들긴 것인지 오타가 상당히 많았다.
-강 대ㅍ표. 내 말 잘 드러요. 그 사라미에요. 그 사람. 나한ㄴ테서 저주의 부적 만들어달래서 사간 사람. 그 사람이야!
메시지를 빠르게 읽고 난 강지한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한 대가님이 저주의 부적을 만들어 갔다고?’
그렇다면 한돈선이 자신의 부모를 저주한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강지한은 하경춘이 무언가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한돈선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는 누구보다 강지한을 응원하며 도와줬던 사람이다.
그리고 한남선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말도 안 돼.’
강지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한아, 왜 그러니?”
갑자기 심각해진 강지한을 보며 한돈선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차마 하경춘에게 온 메시지의 내용을 사실대로 전할 수 없었다.
하경춘이 착각한 것이라면 한돈선에게 대단한 실례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차라리 착각이었으면 하는 강지한이었다.
착각이 아닐 경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벌써부터 혼란스러웠다.
강지한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한돈선의 오른팔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사시사철 소매가 팔목까지 오는 긴 개량한복을 입고 다녔다.
단 한 번도 팔이 드러나는 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아울러 강지한은 그의 팔을 확인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괜한 의심만 쌓일 게 분명했다.
“대가님, 저 갑자기 목이 답답해서…… 물 좀 마실게요.”
“천천히 마셔라.”
강지한은 컵에 물을 가득 따라서 급하게 들이켰다.
그러다 사례가 들린 척 허리를 숙이고 입에 있던 물을 뿜어내며 격한 기침을 토했다.
“푸웁! 쿡! 쿨럭! 쿨럭!”
입에서 분무기처럼 쏘아진 물줄기가 한돈선의 오른쪽 한복 소매를 축축하게 적셨다.
한돈선은 그런 줄도 모르고 놀라서 강지한의 등을 두들겼다.
“아이고, 이 녀석아!”
“쿨럭! 죄송합니다, 대가님. 옷이 다 젖으셔서 어쩝니까.”
강지한이 얼른 한돈선의 오른쪽 한복 소매를 접어서 위로 올려주었다.
“그렇게 유난 떨지 않아도 괜찮은데.”
한돈선은 딱히 팔을 뺄 생각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점점 드러나는 그의 맨살을 보며 강지한은 제발 반점이 없기를 바랐다.
그런데,
“…….”
가끔씩 현실에서는 꿈보다 더 현실성이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지금 강지한이 그것을 체험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한껏 드러난 한돈선의 팔에는 하경춘이 말했던 동그랗고 푸르스름한 반점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강지한의 사고가 정지했다.
이성적인 판단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러움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한아, 괜찮니?”
“네? 아…… 네.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어제 큰일을 치르자마자 주방에 선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일도 좋지만 사람에겐 휴식이 꼭 필요한 법이야. 무리하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난 혼자 갈 테니 마중 나오지 말고 거기 앉아서 좀 쉬거라. 곧 연락 주도록 하마.”
한돈선은 그 말을 남겨두고서 방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강지한은 한참 동안을 꼼짝하지 못하고 방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 * *
할짝. 할짝.
오늘따라 설탕이가 유난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강지한의 곁에 딱 붙어 떨어지지를 않더니, 잠자리에 누운 다음엔 연신 얼굴을 핥아댔다.
이를 본 예소린이 한마디 했다.
“지한 씨 기운 없는 거 설탕이가 아나 봐.”
한데 설탕이의 하는 양이 기운을 내라기보다는 축 쳐져도 괜찮다는 것같이 느껴졌다.
꼭 풀 죽은 아이를 돌보는 어른 같은 모양새였다,
“오늘은 아빠랑 자식의 위치가 바뀌었네.”
예소린이 강지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린 씨.”
“응?”
“믿기지 않는 일이 현실로 일어났을 때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좋은 일? 나쁜 일? 분위기로 봐서는 후자 같은데.”
“나쁜 일.”
“현실도피 할 거 아니라면 받아들여야지.”
예소린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녀는 사실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강지한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위로 같은 걸 늘어놓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담백한 그녀의 한마디가 강지한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그래…….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이건 현실이야. 피할 수도 없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돼.’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강지한의 정신이 다시 또렷해졌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진상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어르신.”
-너무 이른 시간에 전화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벌써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는 중이었어요. 한데 어쩐 일이세요?”
-제 성격상 뜬구름 잡는 얘기로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걸 잘 못 합니다. 아시지요? 그러니 그냥 편하게 얘기 드리겠습니다.
느닷없이 전화를 한 진상명의 음성은 대단히 무거웠다.
그가 이 전화 한 통을 하기 위해 많은 고심을 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네. 말씀하세요.”
-이틀 전, 신선정의 주방에서 강 선생님의 승리를 축하해 주기 위해 걸음 했을 때였지요. 강 선생님께서 모시는 한돈선 대가님을 실제로 처음 뵈었더랬습니다. 한데 제가 그 사람의 면전에 서자마자 뭘 느꼈는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소리장도.
웃음 속에 칼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웃음 짓고 있으나 속으로는 언제든 상대를 해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강 선생님의 스승이라고 볼 수도 있는 분일 텐데 제가 엄청난 실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 또한 강 선생님을 은인으로 생각할 만큼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바,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느낀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강 선생님, 제 말이 와 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줌의 의심은 품고 계시는 것이 마음을 덜 다치는 길일 것입니다.
진상명의 말을 듣고 난 강지한은 착잡한 심정을 숨길 길이 없었다.
그의 인맥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 중 한 명이 진상명이었다.
진상명은 오랜 세월 정계에서 활동을 해온 만큼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틀림없을 터.
그런 그가 한돈선을 조심하라 일렀다.
진상명은 그를 단 한 번 마주하는 것으로 어떠한 사람인지 파악해 버린 것이다.
하경춘도 그렇고 진상명도 한돈선에게 적색등을 켰다.
이제 강지한은 판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어르신. 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강지한은 자신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생각을 정리해 봤다.
만약 한돈선이 정말 자신의 부모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이라면, 그 행동엔 어떠한 목적이 있었단 말인가?
강지한의 얘기를 전부 듣고 난 진상명은 현재로서 명확해진 한 가지 사실을 짚어냈다.
-결국 한돈선은 수십 년 전 잃어버렸던 신선정을 다시 갖게 되었군요.
“……네?”
-이번의 사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과적으로 가장 큰 이익을 취하게 된 건 한돈선밖에 없습니다.
듣고 보니 그랬다.
강지한은 부모님의 한을 갚기 위해 경합에 임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겼다.
해서, 한남선의 손에서 신선정이 떠나가도록 만들었다.
한데 겨우 그것으로 부모님의 한을 풀어주었다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강지한이 진정 바라는 건 부모님을 죽음으로 몬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고 그에게 응당한 죄의 대가를 받게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는 맹목적으로 한남선이 꾸민 짓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범인이 따로 있다면 강지한은 결국 헛수고를 하게 된 셈이다.
그러고 보니 한돈선은 경합 자체에만 더 관심이 있었다.
설윤진이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청부살인을 당한 것이라면 그 범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밝혀내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저 한남선으로 몰아갔을 뿐.
그렇게 벌어진 경합의 끝에서 한돈선은 결국 신선정을 손에 넣게 될 상황이었다.
‘대가님은 내가 신선숙수의 자리에 관심이 없다는 걸 짐작하고 계셨을 거다.’
어쩌면 그는 이전부터 이런 큰 그림을 그려왔던 것이 아닐까?
‘만약 그랬다면…….’
강지한은 정말 하기 싫었던 가정을 그려나갔다.
잃어버린 신선숙수의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 부모님을 잃은 아픔 속에서 허덕이는 자신을 이용했다고 치자.
하면, 부모님을 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부분에서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심증만 가지고서 왜 그랬는지 말하라며 따질 수도 없는 노릇.
결국 강지한의 속만 답답해졌다.
-강 선생님께서 부탁하신다면 제 쪽에서 손을 써볼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일단은…… 제가 좀 더 알아볼게요, 어르신.”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진상명과의 통화가 끝난 후, 강지한의 가슴이 미치도록 먹먹해졌다.
* * *
보름이 지났다.
요즘 세간에서 가장 떠들썩한 기사는 바로 한남선의 청부살인에 관한 건이었다.
언론은 그가 신선숙수의 다음 자리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라이벌인 강지한을 청부살인 하려 했다는 쪽으로 열심히 보도했다.
이에 대한 재판은 빠르게 열렸다.
피의자의 입장으로 재판에 선 한남선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며 조금도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잡아뗐다.
그러나 곽진묵 의원이 녹음해 둔 통화 내역을 공개하자, 자신이 원한 것은 살인청부가 아니라 폭행사주 정도였다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어찌 되었든 한남선은 요리사로서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음이 확인되었다.
한국 제일가는 한정식당, 신선정의 신선숙수라는 사람이 저런 인간이었다는 것을 전 국민이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신선정의 이름엔 큰 흠집이 났고 주가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그럴수록 한돈선은 강지한에게 어서 자신이 신선숙수의 자리를 넘겨받아 무너져 가는 신선정을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 물었다.
본래는 질질 끌지 않고 신선숙수의 자리를 넘겨주려 했던 강지한이었다.
하지만 그는 차일피일 이를 미루고 있었다.
신선숙수로서 책임져야 할 의무나 행동들도 일체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지한에게 신선숙수의 모든 것을 가르치며 물려주어야 할 당사자가 법정 싸움이나 하고 앉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강지한에게 살인청부를 한 인물이 된 상황.
제대로 된 자리의 대물림이 이어질 리 만무했다.
그렇게 무엇 하나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 없이 하루하루 시간만 흘러가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16년 전의 사건을 고백한다며 어느 중년의 사내가 언론사와 접촉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사내의 이름은 홍정학.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강지한의 과거사에 대해 듣게 된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