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
Restaurant 314. 한을 갚기 위해
긴장되는 시간이 흘러갔다.
기자단과 초청된 한국의 요리 명인들은 과연 누가 경합에서 이겼을지 신중히 의견을 나누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한남선과 한돈선뿐이었다.
두 사람은 경합이 끝난 직후부터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어느 한 명,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남선이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돈선에게 다가왔다.
그 광경에 기자들의 잡담이 뚝 끊겼다.
대신 잠잠했던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소나기처럼 들려왔다.
찰칵! 찰칵! 찰칵!
한돈선의 지척까지 다가선 한남선이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구나, 아우야.”
그러나 한돈선은 그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우리가 악수를 나눌 만큼 정겨운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에 한남선이 낮게 혀를 찼다.
“쯧쯧. 아직도 꿍해 있는 게냐?”
“꿍하다……. 그간 제가 칼을 갈며 견뎌온 세월을 그리 표현하시다니. 사람을 이상하게 몰아가는 못된 버릇은 여전하시군요.”
“네가 경합에서 패해 신선정을 나갔다. 둥지 잃은 짐승이 거친 세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칼을 가는 일쯤이야 당연한 것 아니더냐?”
“그 말은 꼭 정정당당한 경합에서 제가 졌으며,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제 발로 신선정을 떠났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허허. 아직까지도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서 탓하는 말이나 내뱉다니.”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강지한과 한민국의 시선도 그런 둘에게 꽂혀 있었다.
한민국은 한돈선에게 아무런 사감이 없었다.
큰아버지이긴 했지만 그가 워낙에 어린 시절 신선정에서 나간 이후 연락을 끊고 지냈기에 정이 붙지 않았다.
그저 한 명의 요리사로서 봤을 때 충분히 존경할 만하다 여겨지는 사람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자신의 아버지와 한돈선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른다.
한남선은 늘 한돈선의 속이 좁다 말했다.
친동생을 흉이나 볼 만큼 아버지는 한돈선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것은 둘 사이의 일일 뿐.
한민국은 큰아버지를 그저 요리계의 대선배로만 보고 있었다.
한데 당사자의 입에서 3대 신선숙수의 경합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뉘앙스의 말이 나오고 있었다.
아울러 한민국은 자신의 아버지가 어떠한 성정을 가진 사람인지 잘 안다.
그의 눈에 설마 하는 의혹이 깃들었다,
한편 강지한은 한남선이 경합에서 이기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부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그를 보는 시선이 곱지 못했다.
한돈선의 억울함을 갚기 위해서라도 이 경합에서 반드시 자신이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가득했다.
“형님은 본인이 치른 죗값을 반드시 받게 될 거예요.”
“나에게 죄가 있다면 하늘이 여태 가만있었겠느냐?”
“사람이 저지른 죗값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 심판하여 벌하는 겁니다.”
“내가 받아야 할 벌이 있다면 기꺼이 받으마. 하지만 아무런 죄가 없다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날 모욕 준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기싸움이 과열양상을 보일 때였다.
마침 VVIP룸에서 결과용지를 받은 진행요원이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에 한남선이 코웃음을 치며 뒤로 물러섰다.
한돈선은 그런 형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어찌 될지 두고 보지요.”
“그래도 간만에 해후를 한 핏줄이라고 손 한 번 잡아주려 했더니만, 쯧쯧.”
한남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진행요원이 가져온 두루마리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한남선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시선으로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 이 경합의 결과가 담겨 있었다.
심사위원들에게 한민국의 상은 ‘갑’으로 전달되었고, 강지한의 상은 ‘을’로 전달되었다.
먼저 음식을 끝낸 쪽이 한민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방의 상황을 보지 못한 심사위원들은 무엇이 누구의 음식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두루마리를 펼치면 그 안에 갑, 또는 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을 터.
갑이 적혀 있으면 한민국의 승리이고, 을이 적혀 있으면 강지한의 승리였다.
“그럼 지금부터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말미에 한남선의 손이 움직이며 말려 있는 두루마리를 천천히 펼쳤다.
그리고 드러나는 글자에 한남선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쯤 풀리다 만 두루마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찰칵! 찰칵! 찰칵!
기자들은 앞다투어 그런 한남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한동안 망부석이 된 듯 움직일 줄 모르는 한남선에게 진행요원이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진행하셔야 합니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한남선이 두루마리를 완전히 풀어내고서 한민국을 쏘아보았다.
마치 그 시선이 자신의 아들을 잡아먹을 듯 사납기 그지없었다.
순간 한민국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미 그것으로 경합의 결과를 알 수 있었기 때문.
“…….”
한민국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경합이 끝난 후 돌아올 한남선의 화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그런 것에 겁을 먹을 만큼 한민국은 담이 작지 않았다.
다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뿐.
격정적이 되려는 마음을 꾹 눌러 다스리는 그의 귀로 한남선의 음성이 들려왔다.
“결과…… 발표합니다. 신선정 제4대 신선숙수 경합의 결과. 우승을 차지함으로서 후대의 신선정을 책임질 사람은.”
한남선은 차마 그다음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반면, 한민국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과를 받아들였다.
이 세계는 자존심이 먹여살려 주는 곳이 아니다. 물론 자신감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과해서 오만해지는 순간 도태되어 버린다.
잠행단은 오랜 세월 신선정의 맛을 책임진 이들로서 그 책무가 후대로 전해져 이어지는 만큼 확실한 평가를 해준 이들일 터.
그들이 판단을 내렸다면 그게 옳은 것.
“후우. 후대의 신선정을 책임질 사람은 을의 상을 준비한…… 강지한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한민국이 강지한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강지한도 그런 한민국을 보며 얼떨결에 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와 동시에 명인들 사이에서 일제히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잘했다. 정말 잘해주었어!”
어느새 강지한의 곁으로 온 한돈선이 그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강지한은 경합의 결과가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기고 말겠다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임한 경합이었다.
한데 바라던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나니 현실감이 없었다.
구름 위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한돈선 대가의 품에 안긴 채로 한남선을 살폈다.
만약 이런 결과가 나왔을 때 그가 억지를 부리면 어쩌나 싶은 걱정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남선의 얼굴은 야차처럼 성이 나 있었다.
한민국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강지한 측과 한민국 측, 양쪽의 온도차가 극명한 가운데 열 명의 잠행단이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얼굴은 여러 종류의 하회탈로 가려져 정체를 알기 힘들었다.
잠행단이 당도하자마자 한남선이 눈꼬리를 치켜뜨고 따지듯 물었다.
“어째서 이런 심사 결과가 나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나 한 번 들어보십시다.”
한남선은 조금이라도 트집 잡을 거리가 있다 싶으면 끝내 붙잡고 늘어져 판을 뒤집어엎을 기세였다.
열 명의 잠행단은 주방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중 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의 가면 속에서 중후하면서도 지긋한 것이 적지 않은 나이를 짐작케 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한민국과 강지한, 두 후보의 음식은 어느 것이 더 우위에 있다고 확실히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대단했습니다. 막상막하, 용호상박이었습니다.”
이미 그 부분에서부터 한남선의 기분은 언짢기 그지없었다.
어찌 한민국과 강지한의 실력이 비슷하다 평할 수 있단 말인가.
잠행단의 혀가 제대로 된 것이 맞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남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두 후보들은 우리가 오래전 맛보았던 신선정의 본을 아주 잘 찾아내 주었지요. 고향에 온 듯 그리운 맛이었습니다. 한데 두 사람의 음식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한남선이 뜸 들이지 말고 대답하라는 듯 바로 물었다.
“바로 김치입니다.”
“……김치?”
한남선과 한민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면 한돈선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치라니? 그럴 리가.”
한남선은 강지한의 김치를 불과 일주일 전에도 먹어보았다.
시중에서 팔고 있는 그의 김치는 갈수록 그 수준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신선정에서 내놓는 김치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위협적이긴 하나 붙어본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딱 그만큼이었다.
한데 그 김치가 신선정의 김치를 눌렀다니?
아니, 그럴 수는 있다.
강지한이 본 실력을 숨기고 있다가 이 무대에서 선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김치 하나가 이 경합의 결과를 갈라놓을 정도라는 건 인정하기 힘들었다.
“제대로 맛을 본 것이 맞으십니까?”
한남선의 목소리엔 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물음은 우리들을 심히 불쾌하게 만듭니다.”
남자의 음성에 노기가 어렸다.
하지만 한남선은 물러서지 않고 따졌다.
“제대로 맛을 본 것이 맞느냐 물었습니다!”
“그리했습니다. 강지한 후보가 만든 김치는 신선정에서 고이 내려왔으나 3대에서 명맥이 끊겨 버린 그 김치의 맛과 똑같다는 걸 열 명의 심사위원 모두가 인정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한남선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당장 강지한의 조리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위에 놓여 있던 항아리 속에서 김치 한 조각을 찢어 입에 넣고 씹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천둥이 내리꽂혔다.
콰르르릉!
‘이, 이건…… 아버님의 김치 맛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신선정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김치의 레시피는 자신의 대에서 끊어졌다.
한정신이 한남선에게 비법을 전수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남선은 그 김치의 맛을 어떻게든 재현해 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봤으나 헛수고였다.
한정신의 비법이 없이는 어떻게 손을 써봐도 그 맛이 나지 않았다.
한데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김치의 맛을 그는 강지한의 김치에서 찾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
한남선이 설명을 요하는 눈빛으로 강지한을 바라봤다.
그에 하회탈을 쓴 남자 역시 강지한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물었다.
“우리들도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그대는 3대에서 맥이 끊긴 신선정의 김치 맛을 재현한 것인지. 그것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에 강지한이 무언가를 회상하듯 우수에 잠긴 얼굴로 대답했다.
“어머니의 손맛에서 배웠습니다.”
“어머니의 손맛이라?”
“그렇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그 누구보다 요리를 사랑하셨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아셨다는 것을.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식의 비법들이 신선정의 본과 크게 닮아 있다는 것을. 얼마 전, 잊고 있던 어머니의 기억 중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린 시절, 잠들기 전이면 제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듯 어머니가 존경했던 어느 대가님의 이야기를 해주고는 했습니다.”
강지한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나갔다.
“하루는 그 대가님께서 직접 담그신 김치를 어머니께 먹여주었습니다. 어머니는 김치의 맛에 대해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 청산유수처럼 읊어댔고 그에 놀란 대가님은 이 김치에 담긴 맛의 비법을 알겠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이번에도 막힘없이 대답하셨고, 대가님은 바로 그 비법이 맞다며 크게 웃으셨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 비법이 무엇인지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곧 신선정의 비법을 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강지한의 얘기를 듣고 난 한남선이 턱을 부들부들 떨더니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그, 그 여인이라는 사람이 설마.”
강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윤진. 고아원에서 지내다 신선정에 왔으나 당신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떠났었죠. 한데 다시 신선정의 일에 개입하려다 변을 당해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여인이며, 제 어머니 되는 사람입니다.”
“……!”
“그리고 저는. 어머니의 한을 갚아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강지한의 눈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