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
Restaurant 303. 강지한과 설탕이
“오빠 왔어요?”
유정미가 강지한을 반겼다.
왕왕!
그에 질세라 설탕이가 달려가 품에 안겼다.
강지한은 그런 설탕이를 사랑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며 어루만져 주었다.
“설탕아, 잘 있었어?”
부자가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에이사가 강지한에게 뛰어들어 격하게 포옹했다.
“강 셰프님! 반가워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남자끼리의 진한 스킨십은 강지한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에이사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설탕이가 있는데 강 셰프님이 보이지 않아서 언제 오려나 했는데, 저런 멋진 걸 끌고 왔군요.”
에이사의 시선이 지한 밥차의 오픈되어 있는 짐칸으로 향했다.
갖가지 먹음직스러운 요리들과 배식대가 마련되어 있는 짐칸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하하하. 이거였군요.”
앤드류가 박수를 치며 지한 밥차에 다가섰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앤드류를 따라 밥차에 바짝 붙어 음식들을 감상했다.
맥앤치즈부터 코울슬로, 마카로니, 미트소스치즈스파게티, 감자샐러드, 옥수수스프, 라자냐, 씨푸드잠발라야, 더티라이스, 수제 미트볼과 햄버거, 각종 바비큐, 구운 식빵과 발라먹을 버터, 잼 그리고 아이스크림과 아이스티까지.
모든 메뉴들이 미국 본토의 음식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대부분 현지에서 가정식으로 먹는 것들이었다.
지한 밥차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냄새에 저기압이던 찰리도 슬쩍 다가와서 배식대를 살폈다.
바로 그때, 앤드류가 모두에게 강지한을 소개했다.
“저와 에이사가 그토록 입이 닳도록 얘기한 강지한 셰프님이십니다. 열광적으로 반겨주세요, 여러분.”
짝짝짝짝짝!
휘이익-!
촬영 관계자들이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마흔이 넘는 사람들 사이에서 키가 성인 허리에나 겨우 올 법한 여자아이 한 명이 강지한에게 다가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강지한 셰프님의 음식을 너무나 먹고 싶었어요. 저 같은 어린이도 같이 먹을 수 있도록 맵지 않게 조리하셨죠?”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고막이 녹아내릴 것처럼 귀여웠다.
강지한이 바로 쪼그리고 앉아 여자아이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안녕? 네가 아일라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
아일라 티스데일(Isla Tisdale).
설탕이 온다의 아역을 맡은 꼬마 숙녀의 이름이었다.
아일라는 올해 여섯 살로 숨 쉬는 것 자체가 귀여운 아이였다.
원작에서 아역은 남자아이였는데 리메이크 버전에서는 여자아이로 바뀌어서 아일라가 낙점되었다.
아일라는 동갑내기 아이들 중에서 최고의 연기력을 자랑하는 배우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강지한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다른 아이들보다 더한 총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제 물음에 대답 안 해주셨어요. 저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인가요? 그러니까 너무 맵지만 않으면 돼요.”
“매운 음식은 하나도 없으니 네 입에도 아주 잘 맞을 거야.”
“배려심이 깊으시네요. 감사합니다.”
아일라가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에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강지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예소린과 결혼해 딸을 낳는다면 이렇게 예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때였다.
공터에 승합차 한 대가 달려와 주차를 하더니 운전석에서 예소린이 내렸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카페 문을 닫기 때문에 그녀도 촬영하는 것을 구경차 방문한 것.
“지한 씨, 나왔어.”
“왔어?”
“안녕하세요. 예소린이에요.”
예소린은 영어를 잘 못 한다.
그래서 다른 촬영관계자들에게 그냥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말미에 생긋 미소를 지으니 봄바람이 꽃향기를 싣고 날아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특히 사내들의 가슴이 가만있지 못하고 마구 뛰었다.
“저 사람도 배우인가?”
“판타스틱.”
“맙소사. 비너스의 환생이야?”
스탭들은 물론이고 배우와 앤드류 감독까지 그녀의 미모에 넋을 잃었다.
그때 스탭들 중 한 명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아나갔다.
그의 이름은 잭.
메인 카메라를 담당하고 있는 잭은 마흔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바람둥이다.
그가 수작을 걸어서 여태 넘어오지 않았던 여자가 없었다.
예소린이 강지한과 연인 사이라는 것을 몰랐던 잭은 호기롭게 그녀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넸다.
“악수하자고요?”
예소린은 잭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잭이 영어로 뭐라고 말을 하더니 예소린을 살짝 포옹하려 했다.
그는 예소린의 아름다움을 찬양했고, 당신 같은 여인과 포옹을 한다면 평생토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며 사탕 발린 말을 스스럼없이 뱉었다.
잭은 확실히 잘생겼고 키도 컸으며 체격까지 좋았다.
수컷의 진한 페로몬 향을 풍기는 그는 어딜 가나 인기가 많았고 사방에서 염문을 뿌려댔다.
잭의 이런 수작을 여인들은 크게 경계치 않고 받아주었다.
그래 봤자 가벼운 포옹이었으니.
그런데,
턱.
예소린이 팔을 벌리고 다가오던 잭의 목젖을 저도 모르게 손날로 탁 쳤다.
“컥!”
순간적으로 잭의 시야가 까매지더니 정신이 핑 하고 돌았다.
콰당!
그러고는 맥없이 뒤로 쓰러져 뻗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강지한이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끅!”
한편 쓰러진 잭은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 광경을 본 동료들 사이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잭이 한국 미인에게 당했어!”
“제대로 거절당했는데?”
“휘이익! 앞으로 미스 잭이라고 불러줄게!”
“달고 다니는 근육은 다 장식이었나 봐?”
쉼 없이 날아드는 조롱에 잭이 머리를 휘휘 젓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여전히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예소린이 다가가 말했다.
“괜찮으세요? 그러게 왜 갑자기 안으려고 그래서는. 여자한테 그렇게 함부로 스킨십하려 드는 거 굉장히 무례할 수 있는 행동이에요. 특히 저처럼 애인이 있는 사람한테는 더더욱.”
“W…… What?”
예소린의 말을 못 알아들은 잭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소린은 강지한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서 방긋 웃으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한 씨의 배우자가 될 예소린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강지한은 그녀의 말을 친절하게 해석해 주었다.
그러자 남자 스탭들은 일제히 부러운 시선으로 강지한을 바라보며 박수까지 쳐주었다.
한 차례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뒤에서는 독고진과 오만석이 지한 밥차의 배식 세팅을 마쳤다.
“배식 받아가셔도 됩니다!”
독고진의 외침에 눈치 빠른 앤드류와 에이사가 가장 먼저 달려가 식판을 들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줄을 섰다.
찰리는 느릿느릿 움직이더니 맨 뒤에 자리했다.
이미 한국에서 세 번이나 맛없는 양식에 당한 와중이라 별 기대가 되지 않았다.
배식을 받아간 앞선 사람들은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그다지 평화로워 보이지 않는 분위기였다.
식사라는 게 함께 앉은 사람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먹어야 맛 아닌가.
오가는 대화 한마디 없이 쥐죽은 듯 배만 채우는 걸 보니 영 맛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배식을 받은 찰리가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이어, 별 기대 없이 미트소스치즈스파게티부터 포크로 둘둘 말아 입에 넣었다.
그리고 갑자기 사고가 정지되었다.
“……?!”
찰리의 턱이 빠르게 움직였다.
‘뭐야 이건?’
입안에서 적당하게 익은 스파게티면이 기분 좋게 씹혔다.
미리 만들어서 온 스파게티일 텐데 어떻게 면이 전혀 불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꿀꺽!
입안에 있던 걸 삼킨 찰리가 다시 한 번 면을 한가득 물었다.
식감이 살아 있는 면에는 미트소스가 잘 달라붙어 올라왔다.
잘게 다져 넣은 소고기의 식감과 육향이 새콤달콤한 토마토와 완벽히 어우러지며 깊고 고급스러운 맛을 냈다.
그 사이사이 느껴지는 마늘의 풍미도 찰리는 잡아낼 수 있었다.
스파게티를 이불처럼 한가득 덮고 있다가 딸려 올라오는 치즈의 풍미 또한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찰리가 가장 놀란 부분은 바로 간이었다.
간이 미국인인 그의 입맛에 딱 맞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완벽했다.
한국인들은 미국인의 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의 양식집을 들어가 보면 간의 세기가 본토의 것과는 너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스파게티는 달랐다.
미국인의 입맛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런 맛과 간을 낼 수가 없었다.
‘푸드트럭에서 이토록 수준 높은 미트소스치즈스파게티를 맛볼 수 있을 줄이야.’
이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완벽한 양식이었다.
아니, 완벽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스파게티 맛에 반한 찰리의 포크와 숟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나머지 음식들까지 다 먹어보고 난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순간 찰리는 깨달았다.
다들 맛이 없어서 묵묵히 음식을 먹은 게 아니라는 걸.
너무나 황홀한 맛에 푹 빠져 대화를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처럼.
“완벽해.”
찰리가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그에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완벽하다고 했습니까?”
질문을 던진 이는 앤드류 감독이었다.
찰리는 아무런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배식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모든 음식들을 한 번씩 더 담아왔다.
이를 본 에이사가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찰리에게도 강 셰프님의 마법이 통했네요!”
마법.
찰리는 정말 자신에게 마법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 * *
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 찰리는 강지한을 극찬했다.
“당신은 내가 만나본 최고의 요리사야. 정말 대단해. 환상적인 식사였어. 욕심 같아서는 돌아갈 때 당신을 데리고 가고 싶을 정도라고. 어떻게 한국인이 본토의 맛을 완벽, 그 이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거지? 그저 놀랍다는 말 밖에는 나오질 않아.”
그 과묵하던 찰리의 입이 닫힐 줄을 몰랐다.
동료들은 그런 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앤드류와 에이사는 모든 걸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봐왔던 찰리의 모습 중 오늘이 가장 하이텐션인데?”
앤드류의 말이었다.
“그의 인생에 남을 명연기가 나오겠네요.”
에이사가 동의하며 말을 받았다.
찰리는 강지한의 곁에서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떠들었다.
그가 뱉은 어마어마한 양의 워딩은 결국 ‘당신은 내 인생 최고의 요리사’라는 것이었다.
그 까탈스러운 찰리마저 만족시켜 버리는 강지한의 솜씨에 촬영 스탭과 다른 배우들은 모두 강지한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 * *
일단 맛있는 저녁으로 텐션이 확 올라가 있는 찰리였다.
문제는 강아지였다.
설탕이라는 저 강아지가 과연 제대로 연기를 해낼 것인가가 관건.
만약 형편없는 연기를 선보인다면 애써 올라왔던 텐션이 전부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게 뻔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수천 조각이 나 허공에 흩뿌려졌다.
설탕이는 앤드류 감독이 원하는 감정과 액션을 백 퍼센트 이상으로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강아지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천재견이라 해도 힘들었다.
설탕이의 연기는 학습된 움직임 혹은, 감정의 흉내 따위와 비교할 수 없었다.
녀석은 지금 스스로 배역에 푹 빠져들어 아일라와 찰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강지한이 기르는 현실 속 설탕이는 없었다.
아일라의 꿈속에서 아이의 상처를 위로해 주는 설탕이만 있을 뿐이었다.
설탕이와 호흡을 맞출수록 찰리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어떻게 강아지가 스스로의 배역과 영화의 감정선을 이해하는 거지?’
강지한의 요리만 놀라운 줄 알았더니 그 이상으로 놀라운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때까지도 찰리는 모르고 있었다.
그날 본인이 선보인 연기가 전 세계 영화 역사에 길이 남게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