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식당-303화 (303/330)

# 303

Restaurant 302. 까칠한 찰리

2020년 3월.

드디어 설탕이 온다가 리메이크 촬영에 들어가게 됐다.

이를 위해 앤드류 바그너 감독을 비롯해, 늘 그와 함께 일을 하는 크루가 한국 땅을 밟았다.

그들은 촬영 장비와 마흔 가까이 되는 인원들을 모두 실어 나를 수 있는 이동 수단을 미리 준비해 뒀다.

25인승 미니버스를 두 대 렌트한 것.

렌트 기간은 하루면 족했다.

춘천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대부분 세트장 안에서 촬영을 진행하게 될 테니.

앤드류와 에이사는 춘천으로 이동하는 미니버스 안에서 잔뜩 들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조증 걸린 환자 같았다.

벌써부터 강지한의 음식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았던 것.

아울러 설탕이와 재회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 두 가지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천국이 따로 없었다.

두 사람은 이미 촬영장의 모든 스텝과 배우들에게도 강지한의 음식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설탕이는 얼마나 영특한지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한국에 따라온 모든 이들도 기대를 한가득 품고 있었다.

딱 한 사람, 노년 배우 찰리 제이드(Charlie Jade)만 제외하고.

찰리는 올해 일흔을 넘긴 배우다.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세 번이나 받았을 만큼 대단한 연기력을 자랑하는 거물급 배우였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슬럼프나 내림세 없이 그토록 꾸준한 인기를 이어온 배우가 과연 몇이나 될까.

철저한 자기관리와 연기에 임할 땐 타협 없이 완벽함을 추구하는 자세가 그를 70이 넘었음에도 여전한 탑스타의 반열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찰리는 그만큼 날카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명품 연기만큼이나 까다롭기로 유명한 것이 그였다.

현장에서 본인의 작은 편의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쾌적한 환경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촬영을 거부했다.

오로지 연기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그는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컨디션이란 육신과 정신의 상태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육신의 컨디션은 스스로 관리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신의 컨디션은 촬영장의 스텝과 그의 매니저들이 해결해야 했다.

찰리는 자잘한 것에 신경 쓰기 싫었다.

촬영을 하다 그가 원하는 이온 음료, 의자, 식사, 휴식을 취할 공간, 각 감정선에 따라 스탠바이 때 듣기 좋도록 리스트 업 해놓은 음악들, 상대 배우가 갖추어야 할 적정 수준 이상의 연기력 등등.

그 모든 것들을 알아서 마련하지 않으면 촬영이고 뭐고 없었다.

그렇게 해도 찰리에게 뭐라고 하는 이는 존재치 않았다.

이런 행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만큼 연기를 잘했으니까.

게다가 수십 년간 그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었으니 바로 ‘흥행보증수표’였다.

찰리가 출연한 영화치고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 영화가 없었다.

노년의 배우인 만큼 출연한 영화의 수도 수십 편이 넘는다. 때문에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이 배우의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정확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해서 찰리가 캐스팅에 응했다고 하면 감독과 제작사는 일단 감사한 마음부터 가지고 그를 모시기에 바빴다.

앤드류 감독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찰리는 데뷔 년도부터 나이, 경력까지 모든 것이 앤드류보다 앞서 있었다.

그러니 앤드류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감독 중 한 명이라고 한들 찰리를 편히 대하기는 힘들었다.

그거야 이미 각오했던 바였다.

그런 수고로움을 끌어안고서라도 앤드류는 찰리를 원했다.

설탕이 온다의 할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연기해 줄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찰리밖에 없었다.

물론 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번 한국행에 함께하면서도 찰리는 여러 가지 불만을 토로했다.

그중 가장 큰 부분은 왜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이 많은 인원이 한국으로 가야 하느냐는 것과 그 나라의 음식은 내 입에 맞지 않는다는 것, 두 가지였다.

전자는 충분히 따지고 들 수 있는 문제였다.

사실 설탕이만 미국으로 넘어오면 마흔이나 되는 사람들의 고생을 덜 수 있다.

영화제작비도 훨씬 경감된다.

때문에 찰리의 입장에서는 강아지 한 마리의 컨디션 때문에 인력과 시간, 돈을 소비해야 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울러 한국에 가면 그 나라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데, 찰리는 자국의 음식을 가장 좋아했다.

그러니 예민한 그의 성격에 성이 안 날 수가 없는 일.

해서 앤드류는 한에어의 기내식으로 일단 그를 달래보려 했다.

한에어의 기내식이라면 한식도 맛있게 먹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찰리는 자국의 항공사를 이용하지 않으면 타지 않겠노라 고집을 부렸다.

한국 항공사의 기내식은 믿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자국 항공사를 이용해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

첫 번째 작전은 실패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찰리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조건 촬영을 거부할 판국이다.

찰리는 미니버스의 맨 뒷좌석 구석에 앉아 이어폰을 꽂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건 아니었다.

탁탁거리며 리듬을 타는 손가락이 보였다.

하지만 기계적인 행동일 뿐, 신이 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화가 나 있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의 한국 촬영분이 없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런 찰리를 보며 에이사가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시나리오 상에서는 손자가 꿈속에서 설탕이를 만날 때, 꼭 할아버지도 함께 등장한다는 설정이다.

손자의 꿈속 세상이니 가장 애정하는 사람인 할아버지가 매번 등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찰리가 함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찰리 역시도 알고 있었다.

해서 거절하려 했지만 시나리오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결국 배우로서의 욕심이 그의 까탈스러움을 잠시 밀어냈다.

실수였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럴 걸 뻔히 알았던 앤드류는 한국으로 떠나기 일주일 전, 찰리에게 이런 제안을 했었다.

어차피 배경 전체가 CG 처리될 테니 따로 찍어서 CG로 합치는 게 어떻겠느냐고.

즉 아역배우와 설탕이는 찰리가 눈앞에 있다 생각하며 한국의 세트장에서 촬영을 하고, 찰리는 아역배우와 설탕이를 보고 있는 것처럼 미국의 세트장에서 촬영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두 영상을 하나로 합하면 끝.

기술도 상당히 좋아진 세상이니 어색함 없이 작업이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이것은 찰리가 거절했다.

그건 살아 있는 연기가 아니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전 스텝들과 배우는 찰리의 저런 상태가 계속 지속되면 어쩌나 고민했다.

그 와중에도 앤드류는 강지한의 음식을 먹어보는 순간 그의 모든 까탈스러움이 사라질 것이라 확신했다.

* * *

문제가 생겼다.

“안 먹어.”

찰리는 강지한의 식당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첫 촬영이 이루어기지도 전의 일이다.

춘천에서 숙소를 잡고 모두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이동하기로 했다.

앤드류가 첫 식사 장소로 정해 놓은 곳은 지한 분식이었다.

에이사와 단둘이 왔을 때 했던 지한 푸드 계열 식당의 방문 코스를 그대로 밟을 예정이었다.

한데 찰리가 이를 거부했다.

그는 양식당이 아니면 식사를 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결국 한국에서의 첫 번째 식사는 춘천에 있는 양식당 중 가장 유명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

찰리는 그곳의 음식에 만족하지 못했다.

자국의 음식보다 훨씬 질이 떨어진다며 혹평을 일삼았다.

그래도 앤드류는 그가 밥을 거르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을 해야 했다.

아무튼 찰리로 인해 기대 만발이었던 강지한의 음식맛을 보지 못한 스텝들은 기분이 급 다운되었다.

앤드류와 에이사가 입만 열면 칭찬하던 그 맛의 실체는 환상 속에서만 남겨야 했다.

찰리가 한식을 거부하는 이상 아마 한국에 있는 동안 그 맛을 접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 * *

늦은 밤.

강지한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발신인은 앤드류 감독이었다.

안 그래도 그가 오늘 한국에 들어온다는 소식은 미리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설탕이와 관련해서 잡힌 공식적인 일정은 내일부터였으니 굳이 먼저 연락을 취하지는 않았다.

하루 정도는 여독을 풀게 편히 놔두려 했는데 앤드류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그리고 그는 강지한에게 곤란한 상황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했다.

“배우님 한 분이 한식을 거부하신다고요?”

-그래요. 그렇다고 양식당을 데려가면 입에 맞지 않는다며 성질을 내는군요. 워낙 까다로운 노인이라 이런 분위기면 촬영장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애초에 촬영을 거부할지도 모르죠.

“왜 자국의 음식만을 고집하는 거죠?”

-그게 제일 자기 입에 맞으니까요. 뭐 당연한 얘깁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자국의 음식을 가장 좋아할 테니까. 찰리 같은 경우는 입에 맞는 음식을 먹어야 기분이 좋아지고 육체적 컨디션도 좋아진다고 하는군요. 입에 맞지 않는 걸 먹으면 탈이 난다는군요. 그래서 말인데 춘천에서 가장 괜찮은 양식당을 알고 계시면 소개 좀 부탁드리려고 전화 드린 겁니다. 아, 괜찮다는 기준은 미국 현지식과 비슷한 맛과 퀄리티를 재현해낼 수 있음을 뜻하는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강지한이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있습니다, 그런 곳.”

-어디입니까?

장소를 묻는 앤드류에게 강지한은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내일 촬영이 언제부터 들어가죠?”

-네? 아…… 촬영은 저녁 무렵부터 시작할 예정입니다.

촬영팀이 한국에 있는 동안은 움직이는 모든 순간 돈이 나간다.

해서 조금이라도 촬영일정을 타이트하게 짜는 것이 좋았다.

그럼에도 앤드류는 촬영을 아침이 아닌 저녁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설탕이가 촬영장에 익숙해지고 새로 보는 스텝, 배우들과 친해질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연기라는 건 거짓된 감정을 꾸며내는 만큼 배우들 간에 유대감이 중요한 행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럴 진데 강아지는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영화 촬영 이전에 설탕이와 친분을 다질 시간부터 잡아 놓은 것.

“음. 그럼 감독님께서 원하시는 조건을 갖춘 식당이 저녁 시간대에 맞춰 촬영장으로 도착하도록 해드리죠.”

-나도 농담이라면 지지 않는 사람인데, 방금 강 셰프의 농담은 의도가 뭔지 잘 모르겠군요. 한국식 유머입니까?

“농담이 아닙니다. 내일이 되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겁니다. 제가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 맘 편히 주무세요.”

* * *

다음 날.

배우들은 아침부터 찾아온 설탕이에게 푹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상에 설탕이처럼 영특한 강아지는 단언컨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녀석은 마치 귀엽고, 잘생겼으며 이해심 많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 소통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게끔 했다.

스텝, 배우 할 것 없이 설탕이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설탕이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녀석이었다.

한편, 설탕이의 매니저 자격으로 촬영장에 방문한 유정미는 이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본래 설탕이 매니저는 이향숙이었는데, 이제는 유정미가 그 자리를 꿰찼다.

매니저인 만큼 월급도 받기로 했다.

설탕이의 모든 스케줄과 건강, 컨디션 관리는 이제 유정미가 도맡아 하게 됐다.

어차피 그녀는 설탕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생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던지라 매니저가 되었다고 해도 생활이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아무튼 설탕이로 인해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딱 한 사람만 영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바로 찰리였다.

그는 설탕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한국에서 둘째 날 접한 아침과 점심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제공자가 설탕이였으니 마냥 웃으며 대하기가 힘들었다.

이제 한 시간 후엔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계속 이런 상태라면 아무래도 촬영 자체가 힘들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앤드류 감독은 밥때가 다가오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어제 강지한이 저녁을 책임지겠다고 해서 반신반의하며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과연 찰리를 만족시킬 만한 대책을 구해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때였다.

“여러분~ 밖으로 나가실까요? 고 아웃! 고 아웃!”

강지한의 연락을 받은 유정미가 스텝들을 촬영장 밖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촬영을 하고 있는 특수효과촬영장은 서면에 위치한 신축 건물로 넓은 부지 위에 지어진 곳이라 상당한 규모의 공터가 있었다.

유정미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의 눈에 공터에 주차된 커다란 컨테이너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

트럭 앞에는 언제 세팅했는지 간이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웅성대고 있을 때, 트럭의 운전석과 조수석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등장했다.

강지한과 독고진, 그리고 오만석이었다.

이윽고 트럭의 컨테이너 칸이 오픈되며 그 안에 가득 차려진 서양 음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이를 보는 앤드류와 에이사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강지한이 찰리를 위해 준비한 것은 바로 찾아가는 요리, 지한 밥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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