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
Restaurant 289. 사람의 진심
앤드류와 에이사는 거의 밤새도록 강지한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아니, 사실 강지한과 얘기한 시간보다 설탕이와 놀아준 시간이 더 많았다.
물론 놀아줬다는 건 오로지 앤드류와 에이사의 입장이었다.
실상은 설탕이가 잔뜩 취한 그들과 놀아준 것이었다.
강지한은 이를 다 알고 있었다.
혹여라도 설탕이가 그들을 피곤해하면 말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취한 와중에도 절대 설탕이에게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아는 설탕이도 그들을 귀찮아하거나 피곤해하는 모습 없이 잘 어울려 주었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각.
앤드류와 에이사는 거실에서 나란히 뻗어 있었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그들의 코와 손가락, 발바닥을 누군가가 할짝거리며 핥아댔다.
할짝. 할짝. 할짝.
따뜻하고 부드러면서도 촉촉한 혀가 이곳저곳을 핥아댈 때마다 그들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특히 에이사는 입술을 도둑맞고 있었다.
결국 그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러자 망막에 잡힌 건 해맑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강아지였다.
“굿모닝?”
에이사가 배시시 웃으며 강아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부들부들한 강아지털이 좋아서 데굴거리다가 앤드류의 팔을 깔아뭉갰다.
“웁!”
그 바람에 앤드류도 강제 기상을 당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감독님.”
에이사가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다.
“합의금부터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에이사.”
“제 다음 배역 출연료에서 까고 주세요.”
앤드류가 큭큭거리고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강아지 세 마리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이고, 그래. 나도 반갑다. 우리 간밤에 많이 친해졌지?”
뒤늦게 일어난 두 사람이 강아지들과 놀아주고 있자니 설탕이와 소금이가 거실로 들어섰다.
“오~ 설탕이! 잘 잤니?”
왕!
“소금이도 잘 잤어?”
멍!
설탕이와 소금이가 두 사람의 질문에 차례로 대답했다.
“근데 강 셰프가 안 보이는군. 몇 시지?”
거실을 둘러보던 앤드류의 시선이 벽걸이 시계로 향했다.
“열두 시가 넘었잖아.”
“강 셰프님은 아침에 나갔어요. 자다가 살짝 깼는데 욕실에서 씻고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억지로 눈을 떠서 인사를 했더니 자기는 식당에 나가본다고 더 자라고 하더군요. 그게 아홉 시쯤이었을 거예요.”
“뭐?”
강지한은 어제 그들과 새벽 여섯 시까지 어울리다 잠이 들었다.
그렇다면 고작 두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는 것.
“겨우 그것 자고서 일을 할 수가 있나? 술도 어마어마하게 마셨었는데.”
“대단한 체력이네요. 역시 강 셰프님.”
그들은 몰랐다.
강지한에게는 하루에 세 시간만 덮고 자도 피로와 숙취가 싹 풀리는 마법의 이불이 있었다는 걸.
때문에 그들은 강지한의 강철 체력과 프로 정신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어제는 참 많은 이야기가 오갔던 밤이었어요.”
앤드류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생각한 설탕이 온다의 리메이크 방향을 알려주었다.
리메이크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촬영할 예정이라고 했다.
일단 큰 맥락과 중심이 되는 스토리는 그대로 가져간다.
주인공을 비롯한 악역들의 주 무대는 미국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그를 괴롭히는 악역. 세 사람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일어나지만 설탕이와 손자가 함께하게 되는 장면은 꿈속 판타지처럼 풀어나갈 예정이라는 것이 앤드류의 설명이었다.
어차피 아이의 꿈속 배경은 늘 동화 같은 공간일 테니 CG 작업으로 배경을 입히는 쪽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현실에서의 힘든 일로 인해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이 꿈속에서 만나는 설탕이로 인해 치유 받는다는 게 이야기의 골자였다.
물론 아이와 설탕이가 친해지게 되는 과정,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에피소드들은 원작을 최대한 따라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한국을 찾은 아이가 꿈속에서 봤던 설탕이와 똑같이 생긴 강아지를 만나게 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 설탕이는 현존하는 것인지 아이가 환상을 본 것인지 알 수 없도록 열린 결말의 형식으로 끝내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설탕이는 한국에서 촬영을 해도 무리가 없었다.
대신 아역 배우가 미국에서 사람들과 촬영을 마친 후엔 한국에 머무르며 설탕이와 촬영을 해야 했다.
앤드류 감독이 굳이 이렇게까지 작품을 각색한 이유는 오로지 설탕이의 정신건강을 위해서였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이동을 하면 강아지들은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입게 된다.
앤드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탕이가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간절히 원했기에 이런 식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의 설명을 전부 듣고 난 강지한은 앤드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강지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할리우드 영화의 거장 감독은 멋진 사람이었다.
“우욱. 속이 안 좋아. 너무 마셨어. 머리도 아프고.”
지금은 숙취에 정신 못 차리는 중년일 뿐이었지만.
“딱 좋다 싶었을 때 그만 마셔야 했는데. 자네는 괜찮나?”
“감독님, 죄송한데 술 냄새 나니까 반대쪽 보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저도 딱히 좋은 속이 아니라서.”
“한 번 게워내고 나면 시원해질 것 같긴 한데…… 술 때문에 어제 먹은 음식들을 버리기는 싫군.”
“동감입니다.”
어제 그들이 대접받았던 강지한의 음식들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식당에서 파는 음식과는 궤를 달리했다.
특히 앤드류는 자기가 아는 미슐랭 원 스타급 식당들의 음식에 버금가는 맛이라며 극찬을 해댔다.
때문에 어제 먹은 음식들을 게워내기가 아까웠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인 법.
“우욱!”
“읍!”
두 사람의 속이 동시에 뒤집어졌고 똑같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런 둘의 뒤를 별생각 없이 마냥 해맑은 강아지 육 남매가 신나서 따라붙어 달렸다.
알알!
알알알!
두 명의 사람과 여섯 마리의 강아지가 거실을 가로질렀다.
화장실 문고리를 먼저 잡아 돌린 건 아직 젊은 에이사였다.
화장실로 들어간 그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 앤드류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자, 자네! 다음 영화 같이 안 할 건가!”
“감독님이 이런 일로 했던 말 번복하지 않을 멋진 분이라는 제 확신을 믿어볼 수밖에요!”
“그, 그건 맞는 말이지만!”
쾅!
문이 닫혔다.
앤드류의 얼굴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그러다 불현듯 어제 강지한이 술자리에서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두 분 내일 동시에 신호 오시면 별채에도 화장실이 있으니까 싸우지 마세요.”
앤드류가 후다닥 집 밖으로 뛰쳐나가 별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우에에에엑!”
겨우겨우 세이프.
지금이 올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급박한 순간이었다.
* * *
지한 식당의 주방에서 강지한을 보게 된 손님들을 하나같이 반가워했다.
식당의 음식 맛은 변한 게 없었다.
그런데 강지한이 주방에 있으니 평소보다 더 맛있어진 것 같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손님들이 음식 맛이 좋아졌다며 칭찬을 하고 있었다.
홀 서빙 하는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전해 들은 강지한은 기분이 참 묘했다.
사람의 혀라는 게 주어진 상황에 따라 자신을 많이 속이는 것이구나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그 때문에 이숙 아주머니도 가짜 양념장과 육수에 속아버린 것이었지.’
문득 허이숙이 떠올랐다.
강지한은 그녀를 자른 것이 잘한 행동인지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단은 그녀의 사정을 한 번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찾아온 브레이크 타임.
딸랑-
누군가 문을 열고 홀에 들어섰다.
허이숙이었다.
* * *
강지한은 허이숙을 일부러 지한 식당 분점으로 불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허이숙은 알 수 없었다.
직원들은 오늘 허이숙이 브레이크 타임에 올 거라는 사실만 통보받았다.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모르는 상황.
하지만 강지한이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안다.
그는 늘 많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허이숙은 직원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붙여놓은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져 앉으려 했다.
그것을 강지한이 만류하고서는 직원들 사이에 끼어 앉으라 일렀다.
그렇게 모두 둘러앉고 나니 늘 겪어오던 브레이크 타임 같았다.
사실 다들 갑자기 사라진 허이숙의 부재가 뭔가 어색한 와중이었다.
그녀만큼 일 잘하고 친절한 사람은 또 없었으니까.
때문에 강지한이 그녀를 자른 것에 못내 씁쓸해하는 이들도 있던 상황.
“이숙 아주머니.”
“……네, 대표님.”
허이숙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대답했다.
“제가 어제 이숙 아주머니를 해고했어요. 아주머니께서는 명백히 그럴만한 잘못을 저지르셨으니까요. 그렇죠?”
“……맞아요. 깊이 반성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얼마 전부터 사람 보는 눈이 제법 정확해졌거든요. 이숙 아주머니께서 열심히 일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모습은 절대 가식처럼 여겨지진 않았어요.”
칭찬이었으나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허이숙이였다.
지금은 그런 칭찬조차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가슴 속에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는 자신의 처지가 참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그래서 들어보고 싶었어요.”
“뭐를…… 요?”
“이숙 아주머니의 이야기를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숙 아주머니가 일 잘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건 알아요. 그런데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말해주시겠어요? 이숙 아주머니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
“음……. 제 말은 무엇이냐면, 진심을 보여 달라는 거예요.”
“……흐윽.”
강지한의 마지막 한마디에 허이숙은 울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며 눈물이 터져 나왔다.
행복이란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허이숙은 끅끅대며 흐느끼면서도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전부 얘기했다.
감정에 복받쳐서 두서없이 죽죽 늘어놓는 말이었지만, 그녀가 얼마나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왔는지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짓는 직원들도 여럿이었다.
한참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허이숙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내놓았다.
“그렇게 불행한 인생이었음에도…… 여기에서 일했던 1년 동안은 정말 행복했었어요. 그런데도 미련한 욕심을 놓지 못해 여러분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뉘우치는 허이숙의 마음이 모두에게 절절히 와 닿았다.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죄송하다고 하는 허이숙.
그녀를 강지한이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강지한을 직원들이 힐끔힐끔 훔쳐봤다.
하나같이 허이숙을 용서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강지한은 그런 직원들의 시선과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숙 아주머니.”
“네, 대표님.”
“지한 식당의 육수와 양념장 레시피 알고 싶어 하셨죠?”
“……대표님. 그건 제가 정말 염치없이…….”
“알려 드릴게요.”
“……네?”
허이숙은 물론이고 전 직원의 시선이 강지한에게 집중되었다.
강지영은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모로 꺾었다.
“안 그래도 지한 푸드에서 런칭한 모든 식당들의 실적이 계속 오르면서 이제는 지점장이 혼자 관리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하던 차였어요. 그래서 각 식당에 보낼 육수와 양념장을 따로 만들고 관리하는 공장을 만들 계획이었거든요. 그 공장의 감독을 이숙 아주머니께서 맡아 주시면 어떨까요?”
짐작도 못 했던 말에 너무 놀란 허이숙은 눈물까지 뚝 그쳤다.
“제, 제가요? 대표님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네. 진심이에요. 물론 모든 레시피들이 절대로 밖에 유출되지 않도록 해주셔야 하고요. 할 수 있으시죠?”
비로소 강지한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아왔다.
그 미소를 보자마자 그쳤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대표님……. 제가…… 그렇게 염치없는 짓을 벌였는데…… 제가…… 제가 진짜…….”
허이숙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서 엉엉 울었다.
강지영이 얼른 다가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휴지를 건네주었다.
“그럼 이숙 아주머니께서 육수, 양념 공장의 감독이 되는 걸로 결정할게요. 다들 이견 없으시죠?”
직원들이 개운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이숙의 얘기를 듣고 난 이후 그들은 제발 강지한이 그녀를 복귀시켜 주기를 바랐다.
사실 강지한이 바란 게 이런 분위기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강지한이 혼자 듣고서 용서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준다면 직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는 노릇이다.
때문에 그녀가 잘못을 저지른 일터의 직원을 앞에서 진심을 담아 자기 얘기를 하도록 판을 짠 것이었다.
그녀는 항상 반쪽짜리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했으나, 이제는 완벽한 허이숙으로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항상 밝고 친절하고 열심히 일했던 모습 이면에 힘들도 불행하며 어두웠던 상황을 안고 있었던 ‘인간 허이숙’을 아무도 미워할 수 없었다.
“대표님……. 저…… 평생 대표님 배신 안 할게요. 죽을 때까지 은혜 갚으면서 살게요. 이제 대표님이 저 밉다고 나가라고 해도 못 나가요.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면서 버틸 거예요. 제 몸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지한 푸드 위해서 일할게요. 정말 잘할게요, 대표님.”
허이숙이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강지한이 그런 허이숙의 손을 꼭 잡아주며 화답했다.
“저도 잘할게요, 허 감독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