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Restaurant 285. 의심의 덫
앤드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어묵의 가격이 고작 3달러도 안 된다고?”
지한 분식에서 파는 어묵은 수제 어묵 꼬치 4개가 국물에 담겨 나오는데 3천 원이었다.
현재 미국 환율로 따지면 약 2달러 70센트 정도의 수준.
겨우 그 정도의 금액으로 만들어낸 어묵 국물은 놀랄 만큼 맛이 좋았다.
한입 먹는 순간 기내식의 음식들이 전부 기억에서 사라질 정도였으니.
기내식의 음식 레벨은 6.3이었고 지한 분식의 음식 레벨은 6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기내식의 음식들이 더 맛있었다.
한데 사용된 재료와 매겨진 가격을 생각하면 결코 기내식의 음식보다 떨어진다고 할 수 없었다.
앤드류가 김밥도 한 알 입에 넣었다.
김밥은 10년 전 한국에 왔을 때 먹어본 기억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정통 한국식 김밥은 아니지만 비슷한 음식들을 많이 접해왔다.
그래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10년 전의 추억을 되살려 줄 음식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앤드류는 김밥을 씹는 순간 자신이 틀렸음을 알았다.
바다의 향을 품은 김이 풀어지며 속재료들이 치아에 닿아 눌리는 순간 각 재료의 풍미가 확 퍼지면서 맛의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김밥 속 재료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확실히 드러내면서도 겉돌지 않고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이것은 마치 서로 다른 조각들을 쌓아 올려 멋지게 완성시킨 프라모델 작품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두 가지 음식에서 기대 이상의 맛을 본 앤드류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가 붉은색 소스로 강렬한 이미지를 발산하는 떡볶이 하나를 찍어 먹었다.
매웠다.
그리고 달콤했다.
양념이 잘 밴 떡은 쫄깃쫄깃해서 씹는 재미를 안겨주었다.
‘보통 소스가 아니야.’
떡볶이의 가격은 4천 원.
이렇게 저렴한 음식에서 맛볼 수 있는 수준의 소스가 아니었다.
소스에서는 아주 깊은 맛이 나면서 어마어마한 풍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좋은 재료들을 가지고 복잡한 공정 과정을 거쳐 완벽한 비율로 배합해 제대로 된 온도에 숙성시켜야 탄생할 수 있는 맛이었다.
앤드류가 이번엔 떡을 어묵과 함께 맛봤다.
‘어묵도 퀄리티가 상당한데.’
시중에서 파는 그런 어묵이 아니었다.
지한 분식의 주방에 있는 사람들이 강지한이 준 레시피대로 직접 만들어 파는 수제 어묵이었다.
떡볶이와 어묵의 소비량이 갈수록 늘어남에 따라 소비되는 어묵을 매일같이 준비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어묵만 따로 팔라는 사람들까지 생겨나는 상황.
그에 강지한은 슬슬 어묵전문점도 운영해 볼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앤드류는 떡볶이의 맛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조금 맵긴 했으나, 매운맛은 입안에 잠시 퍼졌다가 확 하고 사라졌다.
앤드류의 먹는 모습에 에이사도 자극을 받았다.
그가 어묵과 김밥, 떡볶이를 차례대로 먹어 보고서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짝짝짝.
“어썸(Awesome)!”
기막히게 좋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강지한을 있게 해준 지한 분식의 위명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두 사람은 각자 시킨 메인 메뉴를 맛볼 차례였다.
앤드류의 앞에 놓인 제육덮밥에서는 아까부터 불향이 올라오고 있어 입안에 침이 계속 고였다.
분식집 제육덮밥에서 불향을 접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지한 분식은 달랐다.
용성우는 이제 어엿한 한 명의 주방장으로 성장했다. 그는 열심히 강지한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어떤 음식이든 용성우의 손이 닿으면 최상의 퀄리티를 자랑하게 됐다.
“기대되는군.”
앤드류가 흰 쌀밥에 제육소스를 조금 비빈 뒤, 고기 한 점을 얹어 입에 넣었다.
그러자 강렬한 불향이 비강을 자극했다.
이어 매콤달콤하면서도 고기의 풍미를 가득 품고 있는 소스가 혀를 만족시켜 줬으며, 밥과 함께 섞여 부드럽게 씹히는 제육이 치아를 즐겁게 만들었다.
‘고기의 잡내는 전혀 없고 육질이 아주 좋아. 상품의 고기를 묵혀두지 않고 그날그날 소비하고 있는 거야.’
앤드류는 제육볶음 한 숟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편, 그의 맞은편에서 비빔밥을 먹고 있는 에이사 역시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한국 어느 분식집에서도 이토록 완성도 있는 비빔밥을 먹어보지 못한 그였다.
각각의 방법으로 조리되어 들어간 나물들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싱싱했고 양념장에 볶은 고기고명은 그것만 따로 팔아도 될 만큼 맛있었다.
잘 지어진 쌀밥과 깊은 맛을 내는 양념장이 여러 재료들을 완벽하게 하나가 되도록 버무렸다.
맛 끝에 길게 남는 참기름 향이 대단히 좋았다.
그야말로 맛의 향연에 푹 빠진 두 사람은 모든 그릇을 텅텅 비운 다음에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정말 맛있었죠?”
“끝내줘. 잠깐만. 그런데 여기가 지한 푸드의 식당들 중 가장 레벨이 낮은 곳이라고?”
“다른 식당들을 가보면 기절할 거라고 장담하죠.”
“그것참.”
앤드류의 본래 목적은 설탕이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그런데 강지한의 음식을 맛보고 나니 설탕이보다는 강지한이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 *
지한 식당 분점의 브레이크 타임.
강지한은 강지영과 함께 식당을 나왔다.
둘이서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시간 좀 내달라고 한 것.
두 사람은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저런 소소한 얘기들을 주고받던 와중 강지한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누나, 이숙 아주머니 요즘 어때?”
“응? 뭐가?”
“아니 그냥. 뭔가 좀 이상한 거 없나 싶어서.”
“딱히 이상한 건 없는데. 흠, 그냥 늘 너무 열정적이어서 그게 좀 과하다면 과할 수 있겠지만.”
“열정이 과해?”
“응. 뭐든 열심히 하고 모진 일은 언제나 나서서 하려 들잖아. 자기보다 직원들이나 내 걱정이 더 많고. 그래서 가끔 난감할 때도 있긴 해.”
“뭣 땜에.”
“너도 알다시피 육수 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
“그렇지.”
“양념장 만드는 것도 양이 어마어마해서 힘들지만 육수에 비하면 뭐…… 아무튼 육수 내려면 내가 하루 날을 잡아야 하니까. 근데 그게 안쓰러웠는지 자신이 대신 하겠다고 하는 거야.”
“그래?”
“응. 양념장도 자기가 쉬는 날이나 짬 날 때 다 만들어 놓을 테니 방법만 알려 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좀 난감했지. 이숙 언니 마음은 알겠는데 이게 우리 식당의 비법이라 레시피나 들어가는 재료 아는 사람이 몇 없잖아.”
“응.”
“그래서 함부로 알려줄 수가 없다고 했지. 근데 이숙 언니는 포기를 안 해.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가 봐. 물론 난 절대 레시피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 부분은 걱정 마.”
강지영의 말을 듣고 나니 허이숙에 대한 의심이 더욱 커지는 강지한이었다.
‘정말 그게 지영 누나를 돕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호의였을까? 아니면 우리 식당 비법을 알아내려고 가면을 쓴 것일까.’
궁금했다.
강지한은 다른 것을 물었다.
“이숙 아주머니랑 대화는 많이 해?”
“많이 해. 근데 뭐랄까……. 조금 알맹이가 없는 느낌?”
“왜?”
“대부분 우리 식당에 발전이 될 만한 얘기, 직원들 얘기뿐이야. 자기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아. 그래서 같이 일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이숙 아주머니 집이 어딘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렇게까지 자기 이야기를 안 한다는 건 뭔가 감추고 싶은 게 있다는 거 같은데.”
“그렇겠지. 그래서 나나 직원들도 깊이 파고들려 하지는 않아. 사람마다 전부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아무래도 허이숙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강지한은 그녀의 비밀이 무언지 조금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밤 10시.
지한 식당 분점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변에 강지한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는 시동을 끄고 식당에서 허이숙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직원들의 퇴근 시간은 좀 더 이른 편인데 허이숙은 늘 강지영을 도와주다가 10시가 되어서야 퇴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잠시 후.
허이숙이 식당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콜택시를 불러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강지한이 택시를 몰래 따라붙었다.
택시가 허이숙을 내려준 곳은 퇴계동의 작은 식당 앞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다가 후다닥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강지한이 멀리 차를 세우고 차창 너머로 보이는 식당의 간판을 확인했다.
‘미미 식당.’
분위기를 보니 한식 위주로 장사를 하는 식당인 것 같았다.
한데 미약한 빛만 유리창 너머로 흘러나오는 것이 홀의 불은 꺼두고 주방 불만 켜둔 듯했다.
‘영업이 끝났다는 건데 식사를 하러 들어간 건 아닐 테고.’
허이숙이 왜 영업도 끝난 식당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어간 것인지 궁금했다.
강지한은 그녀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더 기다릴까 하던 강지한은 생각을 바꿨다.
그가 강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나 지금 어디야?”
-나 식당. 정리 막 끝나서 이제 집에 가려고.
“저기 미안한데 잠깐 나 좀 보고 가면 안 될까? 내가 식당으로 갈게.”
일이 끝난 사람의 퇴근길을 막는 건 강지한의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고맙게도 강지영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강지한이 차를 몰아 급하게 지한 식당 분점으로 향했다.
* * *
지한 식당 분점의 주방.
강지영은 강지한이 건넨 종이를 보고 당황했다.
“응? 이걸 이숙 언니한테 알려주라고?”
“응.”
종이에는 육수와 양념장을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지한 식당에서 기존에 사용하는 것들과는 좀 달랐다.
“왜 이숙 언니한테 그래야 하는데?”
강지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 강지한은 자신이 본 것을 얘기해 주었다.
“집에 가다가 우연히 이숙 아주머니가 퇴계동의 미미 식당이라는 곳에 들르는 걸 봤어.”
“배고파서 밥 먹으러 갔나 보지.”
“간판 불이 꺼져 있었어. 홀도 그렇고. 주방에만 불이 켜져 있는 식당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더라고.”
“음……. 아는 사람이 하는 식당 아니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뭔가 기분이 찝찝해서. 자기 얘기 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태도와 사람들에게 보내는 과한 친절. 그리고 특제 양념과 육수의 비법을 굳이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도 영 마음에 걸리네.”
강지영은 허이숙이라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콩깍지가 많이 씌워져 있기는 했다.
그녀가 자신의 콩깍지를 저편에 치워두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허이숙의 모습을 곱씹어봤다.
그다음에는 강지한의 입장에서 한 번 더 허이숙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강지한의 심경이 이해가 되었다.
“확실히 네가 보기에는 찝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만약 내가 괜한 의심을 한 거라면 이숙 아주머니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할게. 날 좀 도와줘.”
강지영은 강지한의 도움으로 지금 꿈을 이루며 잘 먹고 잘사는 중이었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조건적으로 도와줄 마음이 있었다.
물론 허이숙을 속인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러나 그녀가 강지한을 생각하는 마음은 허이숙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럼 이 가짜 레시피를 알려주면 되는 거야?”
“응. 그렇게 해서 만들면 육수와 양념장만 따로 먹었을 땐 진짜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해. 근데 그걸로 요리를 만들면 제대로 된 맛이 나오지 않거든.”
“그래? 신기하네. 근데 이 가짜 레시피를 알려주는 이유는 이게 진짜라고 믿게 하기 위해서인 거잖아?”
“맞아.”
강지한은 그녀가 그 레시피를 진짜라고 믿게 되었을 때 다음으로 어떠한 행동을 할지 지켜보고 싶었다.
“그게 가능할까? 집에 가서 만들어보고 아닐 경우 속았다는 걸 알 텐데.”
“그러니까 속았다는 걸 모르게 만들어야지.”
“어떻게?”
강지한은 자신의 생각을 강지영에게 전부 들려주었다.
그의 얘기를 전부 듣고 난 강지영은 혀를 내둘렀다.
“너 진짜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