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
Restaurant 233. 마음을 적시는 샤브샤브
퀘스트 내용을 가만히 보던 강지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정호 씨 요새 고민 있었나?’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고 보니 뭔가 표정이 다른 날보다 어두운 것 같긴 했다.
강지한은 우선 퀘스트를 수락했다.
자신의 직원에게 문제가 있다면 꼭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해결해 주고 싶었다.
겸사겸사 중식 요리 대가의 지식이라는 좋은 보상도 얻게 되면 더더욱 금상첨화다.
강지한, 예소린, 조정호 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강지한이 보글보글 끓는 육수에 야채와 버섯부터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넣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만두를 꺼내와 만두도 여섯 알 담갔다.
물론 만두는 지한 만두였다.
이제 예소린이 눈을 반짝이며 주시하던 소고기가 들어갈 차례.
얇게 슬라이스된 소고기 여러 점이 집게에 집혀 육수 안으로 잠수했다.
연분홍빛의 아름다운 소고기는 육수에 닿는 순간 바로 먹음직스레 익었다.
싱싱한 1++ 한우 소고기를 사용한 만큼 오래 익힐 필요는 없었다.
핏기만 가시도록 익혀서 먹어야 육수의 풍미를 머금고 있으면서도 소고기 특유의 육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완벽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강지한은 적절하게 빼낸 소고기를 각자의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와아!”
“잘 먹겠습니다.”
예소린이 환호했고 조정호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예소린은 소고기 한 점을 앞에 있는 와사비간장 양념에 찍어 입에 넣었다.
“냠. 으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맛이었다.
소고기 자체의 질도 좋았지만 강지한이 만든 특제 육수의 덕을 톡톡히 봤다.
예소린은 바로 소고기 또 한 점을 집어 이번엔 잘 익은 버섯과 배추 한 조각을 곁들여 소스에 찍어 먹었다.
특제 육수를 머금은 소고기와 야채의 조합은 무조건 옳았다.
“으흥흥~”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샤브샤브를 빠르게 정복해 나가는 예소린과 달리 조정호는 고기를 앞에 두고 멍한 얼굴이었다.
“정호 씨, 입맛이 없어요?”
예소린이 그런 조정호에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사실 입맛이 없었다.
그는 어제 이후 온통 서민정의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 뭘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강지한의 저녁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강지한은 조정호에게 은인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단 오기는 왔는데 과연 이걸 먹으면서 무슨 맛이나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조정호가 억지로 익은 소고기 한 점을 소스에 찍어 입에 넣었다.
한데, 소고기가 입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맛있다.’
마음이 엉망이라 뭘 먹어도 모래를 씹는 기분일 줄 알았건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입에 들어온 풍부한 여러 가지 맛들이 조정호의 마음마저 치유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원인은 강지한에게 있었다.
그는 방금 전 타이틀을 건강 요리사에서 행복 요리사로 바꾸었다.
건강 요리사 타이틀은 레벨이 올라가 지한 푸드에서 운영 중인 모든 사업장에 효과가 적용 된다.
한데 행복 요리사는 타이틀의 레벨이 올라가지 않아 강지한이 직접 만든 음식들에만 효과가 적용된다.
해서 언젠가부터 그는 늘 건강 요리사 호칭만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지한 푸드가 일괄적으로 쉬는 날인 데다가 조정호의 고민을 풀어줘야 하는 바, 일시적으로 타이틀을 교체했다.
강지한의 음식을 먹는 조정호의 마음 속 불안과 답답함이 조금씩 풀려 나가고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이 살짝 가셨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없던 여유도 약간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마음이 평안해질수록 음식의 맛은 더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때쯤, 소고기와 야채는 전부 세 사람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갈색빛이 돌며 진해진 육수에 만두 여섯 알만 떠다니고 있었다.
세 사람은 만두를 두 알씩 가져가 먹었다.
지한 만두는 그냥 쩌 먹거나 구워 먹어도 맛있는데, 이렇게 샤브샤브 육수에 익혀 먹으니 또 다른 매력이 팡팡 터졌다.
만두까지 먹고 난 다음에는 강지한이 직접 반죽해 놓은 칼국수면을 투하했다.
팔팔 끓는 진한 육수 안에서 잘 익은 면은 곧 세 사람의 그릇에 나뉘어 담겼다.
조금 전까지는 샤브샤브였던 것이 지금은 소고기와 야채의 향을 가득 품은 국수 한 그릇으로 바뀌었다.
“후루룩! 맛있어!”
국수를 한 젓가락 흡입한 예소린이 감탄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탱글탱글한 면이 입안에서 춤을 추었다.
조정호도 그 면의 탄력에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강지한이 만족하며 국수를 먹었다.
세 사람이 게 눈 감추듯 국수 한 그릇씩을 비웠다.
이제 남은 건 대망의 죽이었다.
미리 퍼서 살짝 식혀 놓은 밥과 달걀 두 알, 잘게 다진 당근을 남은 육수에 넣고 잘 저어가며 푹 익혔다.
죽이 걸쭉해질 무렵 꾹꾹 눌러 바닥에 누룽지가 생기도록 약불에서 조금 더 익힌 뒤 드디어 세 사람의 숟가락이 움직였다.
죽에 들어간 남은 육수는 졸을 만큼 졸아 있었기에 따로 어떠한 간이 필요 없었다.
완전히 응축된 진짜배기 맛과 향이 부드럽게 익은 밥알 사이사이에 박혀 입안에서 넣는 순간 불꽃놀이를 벌이는 것처럼 펑펑 터졌다.
“아, 만족스러웠다.”
냄비 안의 누룽지까지 깨끗하게 긁어먹은 예소린이 배를 두들기며 만족해했다.
그에 동의하듯 조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친 뒤 갖게 된 티타임.
깔끔하게 치워진 상 위엔 녹차 세 잔이 놓여 있었다.
예소린이 차를 홀짝이며 조정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잊고 있었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맞아. 지한 씨, 나 오늘 뽀삐의 하루 2호점 오픈 때문에 사람 만나봐야 했는데.”
뽀삐의 하루 2호점 오픈을 앞두고 있는 건 맞지만 만나야 할 사람은 없었다.
조정호가 강지한에게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눈치챈 그녀가 하얀 거짓말을 한 것.
“너무 저녁만 먹고 내빼는 것 같아서 미안해. 다음번엔 내가 맛있는 음식 만들어줄게. 정호 씨, 오늘 반가웠어요. 다음에 뵐게요.”
“아, 네! 들어가세요.”
예소린이 급히 집을 나간 후, 강지한은 조정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정호 씨, 무슨 고민 있죠?”
“네? ……네.”
조정호는 아니라고 하려다가 이내 수긍했다.
“말해 봐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조정호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강지한은 그런 조정호를 끈기 있게 기다렸고 드디어 그가 마음속 깊이 감추어 놓았던 얘기를 꺼냈다.
“어제 저녁 장사를 하다가…… 9년 전 헤어진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제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고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 * *
조정호의 얘기를 간추려 보면 이러했다.
9년 전, 조정호에겐 2년을 넘게 만난 여인이 있었다.
둘은 결혼까지 약속할 만큼 깊은 사이였다.
조정호는 그녀에게 꽃길만 걷게 해주겠다 약조하고 서울로 상경해 자신만만하게 요식업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말도 못할 무지막지한 실패였다.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자본을 날려 버리고 말 그대로 알거지가 되었다.
이를 본 여인은 조정호의 현실을 감당하기 힘들어 그를 떠나 춘천으로 홀로 내려왔다.
그것은 곧 둘 사이의 관계가 끝났음을 뜻했다.
조정호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으나 차마 그런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처한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
이후로 어떻게든 재기하기 위해 주변에서 돈을 빌려 몇 번이나 더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8년 동안 늘어나는 건 빚뿐이었고 개인파산 신청을 한 뒤 죽자고 마음먹었다.
그래도 죽을 자리는 고향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작년, 춘천으로 걸음한 조정호는 우연히 강지한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러다 어제, 진정 사랑했으나 자신을 떠나갔던 여인, 서민정을 9년 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조정호는 서민정을 보는 순간 참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가 반갑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9년 전 그때보다 많이 수척해진 모습에 가슴 한편이 짠하고 아려왔다.
한데 그보다 더 신경 쓰였던 건 그녀의 아들로 보이는 아이였다.
대충 얼굴을 보니 이제 일고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싶었다.
이미 9년 전에 끝난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을 보니 다른 남자의 여인이라는 현실이 뒤통수를 강하게 때려왔다.
“그래서 정호 씨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요?”
조정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난 강지한의 질문이었다.
“그냥……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얘기라도 한 번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민정이를 봤는데 그냥 그렇게 보내 버리고 만 것이 후회됩니다. 이미 아이도 있는 사람인데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그런 마음은 아닙니다. 그냥…… 그냥 한 번만 대화를 나누면 제 마음속에 미련처럼 끌어안고 있던 그녀를 완전히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정호의 진심이 강지한에게 깊이 전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강지한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날 저녁 자리는 조정호의 속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 * *
오후 8시.
저녁에 쌓인 설거지 거리를 전부 해결한 강지한은 오늘도 요리 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 뜬금없이 박춘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르신, 안녕하셨어요?”
-대표님, 잘 지내시고 계시죠?
“네, 그럼요. 제가 매장에도 자주 들르고 그래야 하는데 요새 바빠서 그러지를 못했네요.”
-제가 찾아뵈어야 사리에 맞지요.
“아닙니다. 하하. 한데 어쩐 일로 전화 주셨어요?”
-그것이 어제 손님 한 분이 대표님께 꼭 말을 전해 달라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그새 깜빡했다가 이제야 생각나 전화를 드렸더랬지요.
“네? 무슨 말을 전해 달라시던가요?”
박춘식은 서민정이 부탁했던 얘기를 그대로 전해 옮겼다.
그에 강지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기억나요. 저랑 이름이 같았던 꼬마였는데 그런 일이 있었죠. 하하, 반갑네요.”
-네네. 저도 거까지는 참 좋았는데 그다음에 이해 못할 일이 벌어졌어요.
“이해 못할 일이라니요?”
-그 여인 분께서 주방에 있던 조 주방장이랑 눈을 맞추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도망치듯 식당을 나섰지요.
“……네?”
-그러자 조 주방장도 후다닥 뛰쳐나와 여인을 뒤쫓으려는데, 직원이랑 부딪혀 자빠지는 바람에 놓쳐 버리고 터덜터덜 돌아오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지한은 바로 알았다.
그녀가 서민정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강지한이 기차에서 도움을 주었던 아이의 엄마가 바로 조정호가 잊지 못하고 있는 여인이라는 말이 된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묘하다지만 이렇게 연결되다니.’
강지한은 어쩌면 서민정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네, 알겠어요. 말씀 전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어르신.”
강지한이 박춘식과의 전화를 끊고 당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여기도 아니고.”
하늘은 이미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강지한은 춘천에 있는 교회란 교회는 전부 뒤지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가 교회에 들러 물어보는 것은 하나.
서민정, 서지한이라는 이름의 모자가 혹시 교회에 다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강지한이 서지한을 만났던 것이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이었다.
당시 기차에 탄 아이들이 도란도란 떠드는 얘기들을 본의 아니게 엿들었는데 교회에서 서울로 체험 학습을 가는 것 같았었다.
그걸 실마리로 교회를 뒤지고 다니기 시작한 것.
물론 무작정 이곳저곳 들쑤셔 보는 식은 아니었다.
두 모자가 들렀던 지한 만두가 있는 서면에서부터 점점 영역을 늘려 나갔다.
그러다 사동농의 교회에서 드디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서민정과 서지한을 확실히 아는 목사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목사님은 두 사람이 자신의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목사님이 처음부터 강지한에게 협조적으로 나온 건 아니었다. 오히려 경계하며 왜 그들을 찾느냐 물었다.
그에 강지한이 자신의 얘기를 솔직하게 전해주었고 목사님은 비로소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울러 강지한은 전혀 예상도 못했던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형제님을 길잡이로 인도하사 오래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을 다시 이어지게 도와준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다시 이어지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이미 아이가 있는 분인데.”
“그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아빠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답니다.”
“……설마.”
“서 집사님께 듣기로는 본인이 아이의 아빠 되는 사람 곁을 떠나고 난 이후에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군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다음 주말 아침 예배가 끝날 시간에 그분을 모시고 한 번 와주시겠습니까? 서 집사님은 아이와 함께 늘 주말 아침 예배에 나오고는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고 하루 이틀이 휙휙 지나가더니 드디어 수요일이 찾아왔다.
오늘은 손현중이 지인 넷을 동행해서 지한 레스토랑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여섯시가 다 되어 갈 무렵.
이미 홀은 1층, 2층이 거의 다 손님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홀 직원 중 한 명이 손현중의 이름으로 예약된 룸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올 때였다.
식당의 문이 열리며 손현중을 필두로 한 다섯 명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식당 입구를 바라본 강지한은 열린 문 너머로 빛 무리가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옆에 서 있던 도근한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가 손현중과 함께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고서는 잔뜩 상기된 음성으로 말했다.
“대박. 완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