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Restaurant 108. BJ 설탕이
배틀 셰프 키친으로 돌아온 지원자들.
그중 절반의 인원은 페일 배틀을 치러야 했다.
페일 배틀의 주제는 디저트였다.
30분 동안 오늘 블랙 팀에서 만들었던 음식과 어울리는 디저트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
시험은 빠르게 진행됐다.
승리를 거머 쥔 화이트 팀은 한쪽으로 빠져 블랙 팀의 대결을 지켜봤다.
조금 전까지는 생사를 함께하는 팀이었다가 갑자기 서로를 이겨야 하는 적이 되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고 잔인했다.
어쨌든 열두 명의 지원자들은 최선을 다해 디저트를 만들었고, 심사를 거쳐 네 명이 탈락했다.
도근한은 당연히 살아남았다.
어차피 탈락하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판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탈락면제권이 있었으니까.
이제 5라운드의 진출자 20명이 가려졌다.
이번 4라운드에서는 베네핏은 있었지만 우승자 혜택은 따로 없었다.
해서 아무도 탈락면제권을 갖지 못했다.
다음 라운드에서는 모든 지원자들이 탈락의 부담을 안고서 전쟁을 치러야 한다.
유난히 길었던 촬영이 끝나고 나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노영철 피디는 다음 주에는 녹화가 쉬니 2주 뒤에 나오시면 된다고 공지했다.
이에 지원자들은 휴가를 얻은 기분으로 즐거워했다.
강지한도 기쁜 마음으로 귀가를 서둘렀다.
그런데 그의 곁으로 한돈선이 다가왔다.
“강지한 씨.”
“네, 심사위원님.”
강지한이 바쁘게 떼던 걸음을 멈추고 한돈선을 쳐다봤다.
“오늘 활약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다음 라운드도 기대하도록 할게요.”
말을 하는 한돈선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았다 떠지기를 반복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강지한 씨가 배틀 셰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면 사적으로 한 번 뵈었으면 하는 군요.”
“저와…… 사적으로요?”
“어려울까요?”
“아니요. 제가 어려울 게 뭐가 있겠어요. 오히려 영광이죠.”
그 말에 한돈선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고마워요. 그럼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보세요.”
“네. 심사위원님도 쉬세요.”
강지한이 살짝 묵례하고 촬영장을 나섰다.
멀어지는 강지한을 주시하는 한돈선의 눈이 깊어졌다.
* * *
꾸르륵.
‘배고파.’
오늘도 촬영장을 나서자마자 미칠 듯한 허기가 찾아왔다.
이번 촬영은 저번 촬영보다 더 힘들었다.
심력을 그만큼 많이 쏟았더니 당시에는 잊고 있던 허기가 한 번에 몰아쳤다.
‘뭘 먹고 갈까?’
고민하던 강지한의 머릿속에 문득 한지민이 떠올랐다.
‘저번 주에는 공짜 김밥 나눠주던데. 오늘도 있으려나?’
오전엔 전철역 앞에서 한지민을 볼 수 없었다.
그 김밥 반줄이 급한 허기를 달래주는 데는 딱이었다.
은근히 기대하며 기차역에 다다랐다.
“시식하고 가세요~ 맛있는 김밥이에요~! 지민 분식 오픈을 앞두고 시식 이벤트 진행 중이에요~!”
재수가 좋았다.
오전에는 없던 한지민이 지금은 김밥을 쌓아놓고 나눠주고 있었다.
그녀는 식당 홍보를 위해 조금 전에 거리로 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오! 나오셨다.”
“언니~ 오늘은 안 나오는 줄 알았어요.”
“이 시간에 오기를 잘했네.”
갑자기 몇몇 사람들이 그녀 근처로 다가와 김밥을 집어가는 게 아닌가?
저번 주에는 큰 관심도 가지지 않던 사람들이 오늘은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중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강지한도 얼른 대열에 합류했다.
“고생 많으세요.”
강지한이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한지민이 유독 반갑게 맞아주었다.
“와!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 데시벨이 올라가는 한지민이었다.
그러자 김밥을 받으려고 몰려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강지한에게 몰렸다.
그 훈훈한 외모에 여자들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고 남자들은 떨떠름한 얼굴이 됐다.
“저 이제 여기 안 오시는 줄 알았잖아요.”
한지민이 김밥 반줄을 건네며 말했다.
“아……. 제가 일요일만 여길 오는지라.”
“방송 촬영이 일요일마다 있나 봐요?”
“네. ……네?”
“저번 주에 뵀을 때도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도통 기억이 나야 말이죠. 그런데 사흘 전에 방송 보고 알았어요! 강지한 씨 맞죠? 배틀 셰프 출연 중이신.”
시선이 너무 집중되는 걸 즐기지 않는 강지한인지라 아니라 잡아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얼굴이 노출된 상황이었다.
“하하, 맞아요.”
결국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강지한의 대답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아~ 그분이셨구나!”
“저 배틀 셰프 봤어요! 414번! 반갑습니다! 악수 좀 해주세요!”
“사진 한 장 찍어도 돼요?”
“어머, 실물이 훨 낫다.”
“개존잘.”
생각지도 못한 열광적인 반응.
강지한은 새삼 배틀 셰프의 시청률이 얼마나 높은지를 실감했다.
하지만 강지한이 무슨 대단한 스타인 건 아니었다.
사람들도 방송에 출연한 그가 신기해서 말 한마디씩 건넨 것뿐.
얼마 안 있어 전부 김밥 반줄을 들고 우수수 흩어졌다.
비로소 여유가 생긴 강지한이 그 자리에서 김밥을 까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집에 가면서 먹어도 되지만 굳이 한지민의 앞에서 서서 먹는 이유는 공짜 김밥을 먹는 것인 만큼 저번처럼 조언이라도 해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김밥의 맛이 저번 주와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음?’
그제야 강지한은 김밥의 등급 창을 확인했다.
[한지민의 맛있는 김밥]
요리 등급: LV3
-좋은 쌀로 육수밥을 지었고 밥 간이 알맞다. 조금만 더 노력을 한다면 한 단계 높은 등급의 김밥을 만들 수 있다. 강지한의 조언으로 한지민과 그녀의 부모님이 함께 만든 작품.
김밥의 등급 자체는 저번과 같았다.
한데 그 밑에 적힌 설명이 달라졌다.
‘내가 조언해 줬던 걸 그대로 받아들였구나.’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강지한이었다.
그가 김밥 한 알을 더 집어 먹었다.
‘확실히 전보다 맛있어졌어.’
여기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김밥의 등급이 올라간다.
4레벨의 김밥 맛은 3레벨의 김밥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김밥을 먹는 강지한의 얼굴을 한지민이 기대감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어때요?”
강지한이 묵묵히 김밥만 먹고 다른 말을 하지 않자 결국 한지민이 먼저 물었다.
“전보다 더 맛있네요.”
그 말에 한지민이 만면 가득 미소 지으며 두 손을 마주쳤다.
“그쵸? 더 맛있죠? 다행이다. 말씀해 주신 대로 쌀 바꾸고 육수밥 지어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손님들 반응도 더 좋은 거예요.”
한지민은 분식집의 다른 음식들보다 김밥에 더 애착이 많았다.
실상 분식집은 그녀가 운영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운영하게 될 것이고 한지민은 부모님 밑에서 서빙을 주로 맡을 계획이었다.
때문에 요리를 하는 건 그녀의 부모님이었지만 김밥만큼은 한지민도 나서서 함께 말고는 했다.
“방금 사람들 막 모여든 거 보셨죠?”
“막은 아니고 세 명 정도…….”
“에이~ 그 정도면 막이죠. 아직 식당은 영업도 안 했는데 단골이 생겼어요. 호호.”
“기분 좋으시겠어요.”
“전부 선생님 덕이에요! 혹시 더 조언해 주실 부분은 없나요?”
한지민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강지한은 쉬지 않고 김밥을 먹으며 말했다.
“혹시 식당에서 튀김도 파나요?”
“네!”
“그럼 튀김 부스러기 있죠? 자잘한 것들. 그걸 버리지 말고 모아서 김밥 말 때 속에 넣어 봐요. 식감이 정말 재미있고 매력적일 거예요. 한 가지 더. 김밥 속 재료들도 전부 간을 따로 해서 볶아야 돼요. 햄이랑 어묵은 간장으로 간을 하되 햄은 약하게, 어묵은 조금 강하게. 시금치에도 소금간을 살짝 해주시고, 얇게 썬 당근을 달달 볶아서 다른 재료보다 조금 더 많이 넣어보세요. 아, 당근은 간을 하지 말고요.”
“혹시! 다른 재료들이 전부 간이 되어 있어서 당근은 간을 하지 않는 건가요? 그래야 밸런스가 맞아서?”
한지민은 강지한의 말 속에 담긴 행간을 대번에 읽어냈다.
그에 강지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확해요.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취향일지 모르겠지만 당근은 아무 간도 안 하고 기름에 볶아 김밥 속에 넣는 게 가장 좋더라고요. 오이 역시 채 썰어서 그냥 생으로 넣으면 되는데, 은근히 오이를 싫어하는 분들이 많아요. 저 같은 경우는 그래서 넣지를 않거든요. 선택의 문제겠지만 굳이 넣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으니 오이 비린내 싫어하는 손님들을 생각하신다면 안 넣는 걸 추천 드려요.”
“와~ 감사합니다.”
강지한의 얘기를 빠르게 메모한 한지민이 구십 도로 허리를 숙였다.
사실 강지한은 이렇게까지 여러 가지를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한데 한지민이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알아버리니 신이 나서 떠들어 대고 만 것이다.
만약 강지한이 지금 말한 것들을 잘 캐치해서 적용한다면 김밥은 충분히 레벨4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각 재료의 간을 제대로 잡아내느냐 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말로 설명하기가 영 어려운 부분이라 생략했다.
아울러 이만큼 알려줬으면 그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앞으로도 장사로 살아남을 수 있을 터.
강지한이 마지막 김밥을 입에 넣고 말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해요.”
“충분히요! 이미 저번에 도움 주신 것만으로도 상황이 확 달라졌는걸요? 호호.”
강지한과 대화를 하는 한지민에게서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녀로서는 강지한이 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가볼게요.”
“아! 다음 주에 식당 오픈해요! 주말에도 영업하니까 여유 되시면 꼭 들러주세요!”
“잘되시길 바랄게요.”
강지한이 한지민을 일별하고 바쁘게 전철역으로 들어섰다.
“진짜 멋지다.”
한참 동안 강지한을 바라보던 한지민이 다시 식당 홍보에 박차를 가했다.
* * *
강지한이 ITX 경춘선 기차에 몸을 실은 시각.
둠칫! 둠칫! 둠칫! 둠칫!
이향숙은 컴퓨터 앞에 앉아 선글라스를 쓴 채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설탕이가 강아지 발자국이 데코로 박힌 옷을 입고 똑같이 선글라스를 쓴 채 음악에 맞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이향숙은 일주일 전부터 자신의 홈페이지를 광고하기 위해 하루에 두세 시간씩은 꼭 이렇게 방송을 하는 중이었다.
“안녕~ 우리 향단이들!”
향단이란 이향숙의 팬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오늘은 새 친구와 함께 왔어! 우리 애기 이름이 뭐지?”
이향숙이 묻자 설탕이가 크게 짖었다.
왕!
“응~ 설탕이라고? 호호. 귀엽지?”
설탕이의 등장에 채팅창은 난리가 났다.
-꺄아아아악! 댕댕이 졸귀!
-심쿵사♡♡♡♡♡♡♡♡♡
-댕댕이 우쭈쭈! (♡▽♡ )?
-향숙이 예쁘다! 댕댕이는 더 예쁘다!
현재 이향숙의 방송 평균 시청자는 100~200명 정도.
신입 BJ 치고는 고작 일주일 내 시청자 증가폭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한데 오늘처럼 채팅창에 불이 난 적은 없었다.
그만큼 화면에 등장한 설탕이의 귀염성은 어마무시했다.
“오늘 내가 얘를 왜 데려왔게? 향스리닷컴 들어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기저기 붙어 있는 강아지 이모티콘 봤지? 그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모델이 누구냐고 문의가 빗발쳤거든. 아니, 옷 파는 사이튼데 하루도 빼먹지 않고 그런 문의가 스무 건은 올라온다니까? 그래서 그냥 화끈하게 데려왔어. 바로 우리 설탕이가 모델이야!”
말을 하며 이향숙이 설탕이의 선글라스를 휙 벗겼다.
그러자 드러난 올망졸망한 눈동자에 채팅창이 다시 한 번 뒤집어졌다.
-꺄아아아아악! 설탕아 사랑해!
-나도 설탕이!
-1인 1설탕이 시급합니다 ㅠㅠ
시청자들의 반응을 만족스럽게 살피던 이향숙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무 슬픈 사실 하나 말해줄까? 설탕이 주인은 내가 아니야. 혹시 배틀 셰프 보는 사람들 있어? 거기에 강지한이라고 춘천에서 분식집 운영하는 사장님이 계시는데, 그 분이 주인이거든. 오늘 배틀 셰프 촬영 가야 해서 내가 잠깐 돌보고 있는 거야. 근데 그 사장님이 이번에 김치 장사를 온라인으로 시작하셨어. 지한 김치라고 치면 사이트 나와. 이미 춘천에서는 엄청 유명해서 매장 가면 매일 매진이야. 그러니까…….”
이후에도 이향숙은 온라인몰 ‘지한 김치’에 대해 열심히 홍보를 했다.
애초에 그녀가 설탕이를 데리고 방송에 나왔던 것은 지한 김치를 홍보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때, 갑자기 꽃풍선 100개가 터졌다.
꽃풍선은 1개당 100원으로 환전할 때 BJ에게 돌아가는 건 이것저것 다 떼고 50원 정도 된다.
즉 100개는 5,000원 정도라고 볼 수 있었다.
꽃풍선 100개가 터졌으면 리액션을 해줘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오! 100개 땡큐! 100개 고마워! 설탕이 코 클로즈업 해줄게!”
이향숙이 카메라로 설탕이의 촉촉하고 앙증맞은 검은색 코를 가까이 잡았다.
-꺄악! 만지고 싶다능!
-젤리젤리!
-오늘 방송 넘 혜자 ㅇㅈ?
100개 리액션 치고는 별것 아니었는데도 시청자들은 난리가 났다.
그런데 그때, 설탕이가 카메라를 살짝 핥았다.
분홍빛 혀가 낼름 나왔다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지나간 뒤엔 해맑게 헥헥대는 설탕이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채팅창의 글이 이전보다 더한 화력으로 몰아치며 꽃풍선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날 가져 설탕아!
-헉! 방금 나 핥은 거지? 그치?
-끄아러ㅣㅏ디가아ㅣ러니ㅏ러나이ㅓㅣ!
-누가 119불러줘. 심장이…… 위험할 정도로 귀여워.
Bj설탕이의 성공적인 데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