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4
그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참 문제죠?”
“문제라기보다 네가 피곤하니까. 난 항상 네 곁에 있잖아.”
말레드레드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어. 이제 걱정할 게 없다고.”
아론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부드럽게 감겨 오는 가는 손가락. 하얀 손마디가 자신의 억센 손에 얽어진다. 그게 좋았다. 말레드레드가 자신을 보며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것이. 서로 눈을 맞출 때면 늘 이 세계는 둘만의 것이 된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견고한 둘만의 세상이.
“나는 네 사람이니까.”
“말레드레드.”
그는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며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그러자 벌건 욕망이 다시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녀의 늘씬한 허리를 은근하게 만지며 말했다.
“아까 못한 걸 마저 하고 싶어요.”
“뭐…? 아까 일정이 있다고 했잖아.”
“시간이 조금 있어요. 마차에 오르기까지.”
“그, 그런……우읏, 아론 여긴 정원이야.”
제 허리춤에서 엉덩이로 미끄러지는 손길에 말레드레드는 흠칫거렸다. 그 떨리는 여체, 옷 안에서 반응하는 말캉한 육체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론이 말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지시해 놓았어요.”
“하, 하지만…….”
“밖에서 해 보고 싶었어요.”
아론은 빙긋 웃었다. 이미 그는 그녀를 움켜쥔 상태였다.
“햇빛 아래 말레드레드의 흥분된 얼굴을 보고 싶었거든요.”
“아.”
들어 올리는 치맛자락, 벗겨지는 사제복이 야속하다. 어쩌면 이리도 쉽게 제 옷을 벗기고 제 몸을 달구는지. 말레드레드는 뜨거운 햇볕이 그대로 제 나신 위에 떨어지는 걸 느끼며 숲 아래 눕고 말았다. 아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사하고 찬란한 눈빛으로.
“허락해 줄 거죠?”
“……으응.”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입술이 가슴에 떨어졌다. 봉긋한 가슴을 빠는 그의 모습은 짐승 같기 그지없었다.
“왠지 이곳이 통통하게 부어 있네요. 저 때문일까요?”
“……우읏, 으.”
너 말고 누가 있겠냐고 하고 싶다. 말레드레드는 여전히 피곤이 가시지 않는 몸을 느꼈지만 계속된 정사의 탓이라 치부하며 아론의 애무에 몸을 떨었다. 좋았고, 황홀했다. 부정할 수 없이 달콤한 쾌락 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근데 발라 잎사귀는 이제 안 먹는 거죠?”
갑자기 물어 오는 아론 때문에 말레드레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네, 네가 구하기가 어렵다고 했잖아. 다른 것도 어쩐지 반입이 안 된다고…….”
말레드레드는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게 누구 때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론이 막아서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의적으로 말이다.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왜 묻는 거야?”
“아뇨. 혹시나 해서요.”
아론은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에는 예정된 철저함이 있었다.
“임신이 되면 좋을 거 같아서요. 이제.”
“어?”
“그냥 느낌이랄까요. 제가 이 황성 모든 것을 가질 거 같은?”
말레드레드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론은 말을 함부로 하는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말레드레드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아론은 그 커진 눈을 부드럽게 응시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걱정 마요. 모든 게 잘 풀릴 테니까요.”
그는 자부하며 여인을 점령해 나갔다. 말레드레드는 곧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목에 매달려 그의 이름을 외치는 것밖에.
그리고 한 달 후. 말레드레드는 각별하게 몸조심을 하는 상태였다. 임신이 되었다는 진단이 떨어지자마자 아론은 그녀를 가장 안락하고 안전한 궁으로 옮겨 모든 일을 쉬게 했다. 귀족들의 축하도 걸러서 받게 하면서.
그 허락된 드문 이 중 하나가 비키 일레그레였다. 레너드와 사귄다는 그녀는 임신한 말레드레드를 보며 방방 뛰면서 몹시도 좋아했다. 온갖 출산 선물을 내밀면서, 양 볼 가득 황홀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정말 축하해요! 임신이라니! 황태자 전하와의 아기라니! 너무너무 잘 됐어요.”
말레드레드는 선물을 내리며 제 손을 꽉 잡아 오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웃었다. 임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빨리 소식이 찾아오리라곤 생각 못 했다. 하긴, 그와의 정사 횟수를 생각하면 사실 놀랄 것도 아니었다.
말레드레드의 볼이 어쩐지 붉어졌을 때, 뒤쪽의 신관이 비키에게서 떨어지란 수신호를 보냈다. 비키는 얼른 그걸 읽고서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 멋쩍었는지 그녀는 헤헤 웃었다.
“아이는 누굴 닮을까요? 누굴 닮아도 참 예쁠 거예요! 아주 황홀하게 멋지겠죠! 이번 일로 말레드레드는 명실상부한 황가의 사람이 되겠어요! 황태자비로 말이죠!”
그 일이 신난다는 듯이 비키는 몸을 들썩거렸다. 말레드레드도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런 절차가 이어지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임신 소식 후의 황제의 병환이 급격히 악화했고, 손쓸 새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하.”
파루는 서거한 황제의 방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아는 척을 했다. 대신관들은 모두 홀에 모여서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는 터였다. 아론은 자신을 굳이 찾아온 신관을 보았다. 그는 예를 표하며 황제의 죽음을 애도했다.
“더 오래 버티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론은 고개만을 숙였다. 검은 예복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했으며 철저했다. 파루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며 물었다.
“근데 소문을 들었습니다. 폐하를 치료하는 신관이 최근 갑작스럽게 바뀌었다고요. 기존 신관이 다른 곳으로 가면서 새 신관이 왔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아론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왜 그걸 묻냐는 의도가 담긴 어조가 느껴졌다. 파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확인차 여쭤보았습니다. 갑자기 신관이 바뀌어서 의아했거든요. 무슨 문제가 있나 해서요. 들어 보니 새 신관이 폐하를 낫게 할 방법을 고민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급진적인 치료를 시도해서요. 그게 좋지만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시는군요.”
“저야 대신관이니까요.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이야기가 상당히 많습니다. 전하께서 폐하의 병세로 초조해 있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니까 신관의 급진적인 치료도 동의하신 거겠지만요.”
파루는 연륜 있게 미소 지었다.
“어찌 됐든 죽음이야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오셨으니 엘크리찬 곁에서 이제 편히 쉬시지 않겠습니까? 편안하게 그분을 보내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파루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아, 깜박했군요. 그러고 보니 축하를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지요. 새 생명을 가지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제 부족할 게 없겠군요.”
축하해야 할 일. 아론은 그가 황제가 죽은 것도 축하해야 할 일이라고 표현한 게 노련하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이제 아론과 말레드레드, 그리고 아이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협할 존재는 모두 다 사라졌으니까. 자신이 의도한 대로.
“그럼 나중에 즉위식에서 뵙겠습니다.”
파루는 인사를 한 뒤 멀어졌다. 아론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최근 공사하고 있는 높은 첨탑으로 향해 있었다. 그곳은 예전의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고서 목을 맨 장소였다. 아론은 그걸 부수라고 했고, 그곳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라고 했다. 기분 좋은 일만 가득할 수 있도록.
“왔어?”
아론은 장례식 홀로 향하기 전 말레드레드를 데리러 왔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검은색이 감히 그녀의 빛을 삭히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아론은 그녀의 볼과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말레드레드는 조금 수줍어하면서도 좋아했다. 아론이 물었다.
“몸은 어때요?”
“좋아. 속이 조금 메슥거리지만. 네가 준 약이 좋은지 없어졌어.”
그 약은 외국에서 아주 비싸게 구해 온 거다. 말레드레드를 위해서라면 재정을 아낄 이유가 없으니, 아론은 만족스럽게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레드레드가 물었다.
“근데, 정말 나도 가도 될까?”
보통 황제의 장례식에는 황가의 사람만 참석한다. 아직 결혼 전이었기에 말레드레드는 원칙상그곳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론은 개의치 않아 했다.
“그럼요. 이미 공식적인 사이인걸요. 누구도 시비 걸지 않을 거예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이 기회에 발굴해 멀리해야 할 것이다. 아론은 그리 생각하면서 말레드레드의 손을 잡았다. 가녀린 손마디가 금세 제 손에 잡혀 온다. 아론은 이 당연함이 너무 좋았다. 말레드레드는 다른 손으로 제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쩐지 몸이 이상해. 처음이라서 그런 걸까.”
“앞으로 자주 있을지 몰라요. 황후가 되면, 많은 후계 생산은 의무니까.”
“뭐?”
“늘 제 아이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임신을 해서.”
말레드레드가 움찔했다. 곧 웃고 있는 아론을 보며 그게 농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짓궂다. 못됐다. 도대체 애를 몇 명이나 가지려고 그런 말을 했을까. 말레드레드는 농담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며 눈을 가늘게 떴고, 아론은 금세 알겠다며 그녀를 안아 왔다. 그런데도 눈은 어둡게 반짝이고 있었다. 말레드레드가 저를 떠날 수 없게 만들 또 하나의 방법을 알아냈다는 듯이.
아론은 독점욕이 넘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전한 세상을 만들게요. 말레드레드랑 아이를 위해서. 그러니까.”
아론은 또 한 번 말했다. 빛과 어둠을 모두 지닌 그녀를 속박하기 위해서.
“결코 절 떠나면 안 돼요. 전 말레드레드여야 하니까.”
말레드레드는 당연하지 않냐며 그를 마주 안았다. 그에게 자신이 필요한 만큼 자신도 그가 필요하다는 걸 상기했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시종이 나갈 것을 대비해 불을 끈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어둠으로 눈을 돌리려는 그녀를 붙잡은 건 역시 그였다. 아론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고요하게 말했다.
“만에 하나 떠나가더라도 저는 쫓을 거예요.”
“…….”
“언제나 항상.”
“…….”
“반드시.”
말레드레드는 그가 그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따라서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뿐이었다. 이러한 것도 좋지 않냐 생각하면서.
“가요.”
손을 잡았다. 어린 시절처럼. 어둠을 품은 채 빛의 앞날을 희망하던 그때처럼. 기분 좋은, 아니, 괜찮은 장례식이 될 것 같았다.
[라이트 앤 다크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