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3
“……무슨 연유지?”
그 시각, 아론은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황제는 보고를 듣다 말고, 병색이 짙은 거뭇한 낯빛으로 그에게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기사와 성기사를 하나로 묶는 것도 모자라, 일반 기사에게 신성력이 있는 물품을 지급하려는 것이냐. 비용이 많이 들 텐데.”
“초기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일단 보유하면 아주 강력한 신성 군대가 탄생할 겁니다. 다른 나라에 마물이나 마족 소탕 지원을 나갈 수도 있고요. 부족한 비용은 군대를 빌려주고 해당 국가에 요청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다른 나라에서 우리 제국에 의존하는 부분도 커질 거고요. 그들의 군사력이나 영토를 일부 지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진정 그 때문이냐? 쿨럭-. 주, 주변국에 영향력을 높이려고?”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면 마계가 침입하지 못하는 영토를 늘리려는 의도는 아니고?”
황제는 역시 예리했다. 죽어 가고 있더라도 아직 명철한 그녀를 보며 아론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런 의도도 없잖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대륙에서 마계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리고 싶으니까요.”
“……많이 변했구나.”
황제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아론은 보는 눈은 회상에 젖어 있었다.
“처음엔 너는 너무 연약해 보였는데. 당장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아주 막강해졌지. 나보다 더 제국을 장악하고 휘두르는 걸 보면.”
아론은 공손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예의 바른 모습을 보면서 황제는 미묘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그가 훌륭히 자라 기분이 좋은 반면, 자리를 위협하는 맹수처럼도 느껴졌다. 그가 이 자리에서 자신의 목을 조른다고 하더라도 이젠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 황성조차도 이미 그에게 모두 고개를 수그리고 있으니까.
황제는 기침을 하며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그래, 네 좋을 대로 해라. 어차피 모든 걸 다 계획해 놨을 테니.”
“감사합니다.”
“아론.”
그가 나가기 전 황제가 물었다.
“네가 갑자기 강해진 건 그녀 때문이냐?”
아론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대답은 아주 천천히 흘러나왔다.
“제가 강해진 건 폐하 덕분입니다. 그녀는.”
아론은 눈을 빛냈다. 그녀를 떠올리며.
“절 살게 했을 뿐이죠. 어느 순간에도.”
황제는 그가 나가고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자신이 무서운 존재를 만들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저, 저기 전하!”
아론이 황제의 방에서 빠져나와 복도로 나왔을 때였다. 황제를 치료하는 신관 하나가 그를 불렀다.
“폐하께서 상태가 갈수록 안 좋아지십니다. 마기에 관통당한 심장이 문제라서…….”
“그렇습니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론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신관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제 생각이지만 예전에 마왕을 상대할 때처럼 강한 신성력이 있다면 치료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론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가 당황했다.
“아, 아, 물론 전하의 신성력을 특정하여 말하는 건 아닙니다. 전하께선 성기사이지 치료 사제가 아니시니까요. 하하. 제, 제 말은 그 정도로 신성력이 강해야 통하지 않을까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신관께서 더욱 힘을 내셔야겠군요. 강한 신성력으로 폐하께서 하루라도 빨리 나을 수 있도록요.”
“무, 물론 그래야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대신관이 무안했는지 재빨리 몸을 돌려 사라졌다. 아론은 두 생각이 교차하는 걸 느꼈다. 그의 말처럼 자신의 신성력이 무척이나 강해 마왕의 마기를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과 그러더라도 자신의 신성력이 치료 성향은 아니라 그녀를 고칠 수 없다는 생각이.
‘문제는.’
그걸 시도조차 하기 싫은 마음일 것이다. 아론은 침묵한 채로 성 밖을 바라보았다. 투명하고 깨끗한 유리창 너머 푸른 빛이 펼쳐진 정원이 보인다. 그곳에 한 여인이 있었다. 아론은 그 여인에게 다가가는 남자를 발견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설마 이곳에서 만날 줄 몰랐어요!”
“나도 반가워요, 레너드.”
말레드레드는 성기사 갑옷을 잘 차려입은 레너드를 보며 몹시도 반가워했다. 얼마 만인지. 안부를 묻는 그녀에게 레너드는 건강히 잘 지냈다고 대답했다.
“전투가 없어지고 때아닌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어요. 본대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갔죠. 하지만 중앙에서 다시 부르더라고요. 새롭게 마계를 대항하는 군을 짠다고요!”
“다시 짜요?”
“네. 거기에 소환사들은 아예 교육을 새롭게 받는다고 들었어요. 강제 소환이 되지 않도록, 주문 자체를 바꾼다고 하는데……. 뭔가 새롭더라고요. 전 어려워서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요!”
“그래요……?”
자신이 마왕에게 불려갔던 일 때문일까? 말레드레드는 레너드가 전해 주는 소식에 놀라고 말았다. 바빠서 훈련을 할 틈이 없었는데 그사이 소환 의식 자체가 많이 변화한 모양이다. 레너드는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더 완벽하게 교육할 건가 봐요! 좋은 일이죠!”
“소환사들 모두가 다시 교육받는 거예요?”
“네, 어쩌면 말레드레드에게도 연락이 갈 수 있어요. 아니, 황성에 있으니 안 갈까요?”
레너드는 황성이란 말이 어색한지 볼을 긁적였다. 말레드레드는 그 모습에 웃으며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게도 왔으면 좋겠어요. 다른 이들처럼요.”
“그렇군요! 다른 사람들은 참고로 다 잘 지내요! 여전히 절 괴롭히는 본대의 분들도 계시고요. 최근에 급격하게 친해진 중앙 사제분도 계시죠. 여자분인데……. 아, 아무튼. 카란도 잘 있어요! 카란이 성기사와 소환사를 상대하는 상점을 연 거 알아요? 투덜거리는 게 일상인데도 장사가 아주 잘되어요! 언젠가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할 거예요. 물론 다 잘 지내는 건 아니에요. 갑자기 전방으로 보내져 소식이 없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가문이 흔들려 다시 복귀 못 할 사람도 있고…….”
“누굴 말하는 거예요?”
말레드레드가 눈을 크게 뜨자 레너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펠 알죠? 그는 야만족과 싸우는 최전방으로 보내져 소식이 끊겼어요.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그리고 그 유명한 공녀 성기사, 레베카도 가문의 무슨 문제로 생겼는지 복귀하지 않았어요. 듣기론 공작 가의 자금 유통이 불법으로 밝혀져서 문제가 생겼다는데……. 혹시 들은 바가 있나요?”
“아뇨.”
말레드레드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잊고 있던 이름들이었다. 한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이름들. 그 이름들이 지금 고난을 겪는다니 조금 이상할 따름이었다. 레너드는 그렇구나, 하면서 말을 이었다.
“황성에서 개입했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둘 다 밉보인 것 같다고, 아무튼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잘 지내요.
“그렇군요…….”
“말레드레드 소식을 다들 궁금해했어요. 한번 같이 보고 싶은데 매우 바쁘다고 들어서…….”
“괴생명체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저도 만나고 싶었어요. 이렇게라도 레너드를 보게 되니 기쁠 뿐이죠.”
“저도요!”
레너드가 환하게 웃었다. 그의 맑고 순수한 얼굴이 여전히 동생처럼 친근하다. 말레드레드가 그를 보고 있을 때, 그의 시선이 머리로 향했다.
“어? 근데 나뭇잎이 묻었는데요?”
레너드의 악의 없는 손길이 막 은빛 머리칼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레너드는 제 손과 머리카락 사이에 끼어드는 커다란 손에 움찔했다. 황금빛 머리칼에 화사한 미남자. 제국 전체가 아는 화제의 황태자였다.
“저, 전하!”
“오랜만에 보는군.”
당당하게 하대하며 아론은 말레드레드의 머리카락에 걸린 나뭇잎을 손가락으로 잡아냈다. 말레드레드가 동그란 눈을 하고 쳐다보는 시선을 부드럽게 받아내며 아론은 자연스럽게 말레드레드 옆에 섰다.
“많이 기다렸나요?”
“아, 아니. 마침 본대의 레너드를 우연히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었어.”
“그렇군요.”
아론은 빙긋 웃으며 레너드를 돌아보았다. 레너드는 그 눈길에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제 것을 함부로 탐하지 말라는 경고가 느껴졌다. 레너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존경하고 우러르는 완벽한 황태자께서 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나무 벌레처럼 하찮은데. 레너드는 황태자를 곁눈질로 살피면서 서둘러 말레드레드에게 말했다.
“아,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어요! 조만간……. 아, 아니 언젠가…… 아, 아니 죽기 전에 또 봐요!”
레너드는 허둥지둥 작별의 인사를 날렸다. 급하게 멀어지는 그를 보며 말레드레드는 아론에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좋은 사람이야.”
“젊은 남자는 절대 좋을 수가 없어요.”
“아론!”
말레드레드의 싸한 반응에 아론은 그만 웃고 말았다.
“죄송해요. 그래도 왠지 질투가 나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한없이 어둡고 깊다. 아름다운 금빛에 숨겼다고 하더라도, 그 독점욕과 집착은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말레드레드가 나 아닌 누군가를 보고 있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