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210화 (210/220)

210화

“그, 그, 그렇습니까.”

그는 완전히 울상이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이빨을 딱딱 떨던 그는 주위의 암담한 상황을 보며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오, 신이시여. 혹은 엘크리찬의 은총이여.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모양을 보건대, 지금 이 사태가 믿을 수 없이 끔찍하다는 것 같았다. 죽어 있는 기사들, 비명을 지르는 시민들, 그리고 마기의 고통 속에 휩싸인 아론까지 모두 살핀 그가 말했다.

“폐, 폐하께 이 상황을 자, 잘 전하겠습니다. 저, 전쟁이 곧 시작될 거라고요-. 실례지만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

내 이름을 물을 줄이야.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섯 글자를 밝혔다.

“말레드레드예요.”

“서, 성은?”

“없어요. 그냥 말레드레드죠.”

내 대답에 사제는 알겠다며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마왕은 그가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갑자기 마기로 그의 목을 휘감아 올린 것이다.

“인간 측의 전달병인가.”

“끄아악-!”

마기에 타들어 가는지 비명이 고통스럽다. 마왕은 시끄럽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게 전할 말은 없나.”

그의 눈이 커졌다. 입을 벌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나는 마기에 죽어 가는 사내를 보며 서둘러 외쳤다.

“목을 놓아야 말을 하죠!”

그러나 내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특사는 마기를 견디지 못하고 픽하며 목을 좌로 꺾고 말았다. 나는 굳어졌다. 파랗게 변한 얼굴. 입에서 흘러내린 피가 핏줄이 목 부근 핏줄이 터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왕은 그런 그를 귀찮다는 듯이 바닥에 던져 버렸다.

“내 힘을 잠깐이라도 견딜 능력 없는 허접한 실력이군.”

먼지를 털 듯 말한다. 나는 소리 지를 힘도 사라지는 걸 느꼈다.

“뭘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어느새 내 목소리는 슬픔에 젖어 있었다.

“당신은 이미 너무 강하고, 무서운데……. 왜 굳이 이러는 거예요?”

“이걸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 이건 왕으로서의 역할이니까.”

마왕은 다시금 내게 다가왔다. 내 앞에 선 그는 내 이마에 흘러내리는 피를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며 말했다.

“감정이 격해진 거 같군. 애초에 황제와 그 가신들은 그대에겐 편한 상대가 아니었을 텐데? 이 기회에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모두 사라진다고 생각해 봐. 그대에게 아주 나쁜 일은 아닐 거야.”

마왕은 덧붙였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그대에겐 오히려 후환을 남겨 두지 않는 게 좋은 일이지. 인간들은 성가시면서도 원한이 깊으니까.”

새로운 시작. 나는 그 말이 더욱 두렵게 다가왔다. 마족으로 거듭나는 게 좋을 리가 없다. 인간들이 나를 싫어하는 건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나조차도 이런 내가 싫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치욕감과 절망감에 고개를 떨구는데 저쪽 언덕에서 신성력으로 가득한 빛이 뿜어졌다.

마왕이 특사를 죽인 것을 본 걸까. 제국에서 신성력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 느껴졌다. 강력한 마기는 마치 울림처럼 이곳까지 전해졌고, 그 힘이 괴로운지 마물들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마왕은 흥미롭다는 듯이 그 언덕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가 만든 차원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왕이시어.”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군요.”

속속들이 마족들이 나타났다. 음침한 차원의 문에서 내려온 자들은 하나같이 살벌한 투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몸에서 뿜어지는 마기를 보고 질려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마족들은 힐끔 나를 보았을 뿐 곧 관심 없다는 듯이 떠들었다.

“인간들을 어떻게 할까요?”

“저쪽에 강력한 방어선을 만든 걸 보니, 사방에서 몰려들어 일시에 공격하는 방법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경계선을 뚫게 센차를 보낼까요? 그들의 단단한 외골격이면 그냥 기사들을 벌레처럼 쓸어 버리고 말 겁니다! 크하하!”

마족들은 하나같이 자신감에 불타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왕과 함께 인간계에 왔기 때문일까. 나는 하늘을 가득 채운 마족의 행렬에 넋을 잃고야 말았다. 세기 어려울 정도로 수가 많았다.

‘과연 상대가 될까……?’

이곳에 도착한 성기사와 사제만으로 감당이 가능할까? 마왕은 의견을 내놓는 마족들에게 딱히 반응하지 않은 채로 듣고만 있었다. 마족 하나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외쳤다.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이 있군요! 확실하게 목을 끊어 놓을까요?”

그가 가리킨 곳에는 일반 기사를 포함해 아론이 있었다. 벨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사지가 찢어져 공중에 축 늘어진 그녀를 보니 더할 나위 없이 입맛이 쓰다. 그녀가 밉고 싫더라도 저런 식으로 마물에게 죽길 바란 것은 아니다. 저렇게 비참하고 잔인하게…….

마족이 상어 이빨처럼 생긴 하얀 무기를 아론의 목에 갖다 대는 것을 보면서 내가 먼저 반응했다.

“안 돼!”

소리치며 달려들자 마족은 내게 무기를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마왕의 표정을 보고 아차 싶었는지 얼른 날개를 파닥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급하게 뛴 탓인지 바닥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흣…….”

무릎이 까지고 손바닥이 헐었다. 알싸한 통증보다 절망감이 먼저 나를 휩쓴다. 나는 무력했다. 별거 아닌 사제였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아론을 쳐다보자 그의 흐려진 눈빛이 보인다. 그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기에 저항하며, 죽음을 피해서.

“마, 말레…….”

그의 입술에서 여전히 흘러나오는 이름이 나라는 것을 깨닫자 눈가가 뜨거워지고 만다. 뒤에서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버려 둬.”

마왕은 나인지 아론인지 모를 듯이 말했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테니까.”

그 말에 나는 서러움과 슬픔이 동시에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결국 우리는 이대로 마계에 굴복하고 마는 걸까. 아론은 이렇게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나는 마족이 되어 인간을 죽이는 입장이 되는 걸까.

눈앞이 혼미해져 왔다.

“이런, 상태가 몹시 좋지 못하시군요.”

들어 본 목소리. 고개를 들자 토끼 마족이 보인다. 그는 어느새 내 곁에서 안쓰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왕이 그도 부른 모양인지 그는 제법 친절하게 말했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으세요. 기력을 회복하시는 동안,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손을 휘두르자 정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는 저항하려 했다. 고개를 저으며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약간의 마기에도 나는 쉽게 잠이 몰려왔다. 사실 지쳐 있었다. 벨의 공격에 마왕의 등장에, 그리고 아론의 모습에. 내 몸과 마음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받은 상태였다.

“아, 안 돼…….”

그럼에도 의식을 붙들고 싶다. 그럼에도, 아론을 구하고 싶다…….

“주무세요.”

“아…….”

제발, 그를 놓아달라고 애원하고 싶은데…….

‘아론…….’

그러나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쿵, 쿵.

‘…….’

내가 얼마나 자다 일어났을까.

쾅, 쾅.

‘……뭐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굉음이 내 귀를 때린다. 강력한 무언가가 빠르게 부딪쳐 산화되는 소리에 나는 멍해져서 눈을 뜨고 말았다. 그러자 더욱 또렷해지는 소리 속에 어른거리던 시야가 분명해진다.

인영들이 보였다. 수많은 사제들과 마족들. 그들은 번쩍이는 검과 마기로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신성력이 번쩍하면 마기가 폭발했고, 검이 휘둘러지면, 무기가 반응했다. 마족들의 검은 날개가 퍼덕거리며 하늘을 가리고 있을 때, 나는 눈을 깜박이며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를 다시금 생각했다.

‘인간과 마계의 싸움…….’

나는 그 한가운데 존재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피보다 빛과 어둠이 즐비했다. 빛과 어둠이 충돌해 남기는 것들은 하나같이 황폐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을 보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잤지?’

나는 시간을 가늠하려 했다. 아까 쓰러져 버린 후 시간이 많이 흐린 것 같지 않았다. 하늘엔 먹구름과 마기가 가득했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어서 나는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판단하려 했다.

“일어났나.”

그러다가 마왕과 눈이 마주치고 깜짝 놀랐다. 그는 홀로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마족이 없었다. 모두 인간들에게 달려갔는지, 마왕은 외롭게 홀로 서서 그 싸움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거부감이 잔뜩 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몸이 나아졌나.”

“…….”

대답하기 싫다. 아직도 가슴과 손, 무릎이 아팠지만 그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무심한 척 다시 보고 있는 풍경을 응시했다. 인간과 마족의 싸움. 기사들은 선두에서 분투하고 소환사들은 뒤에서 그들을 잡아내려 한다. 소환 영역을 만들어 그들을 조금이라도 곤란하게 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도 도울 수 있다면…….’

지팡이가 있는 것처럼 나는 손을 꽉 쥐었다.

“생각보다 빨리 깨어났군. 다 끝난 다음에 일어날 줄 알았는데.”

마왕의 중얼거림에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끝난 다음이라니요……?”

“오래지 않으면 인간들의 방어선이 무너질 거야.”

내 눈이 커졌다. 과연, 그러고 보니 아까 강력하게 전달되던 언덕 위 신성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빛은 아예 사라진 상태였다.

“마족들은 이 작은 도시를 벗어나 수도를 향해 가겠지. 그 과정에서 많은 인간들이 죽을 거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숫자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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