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이게 뭐라고 눈가가 뜨거워질까. 나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느꼈다.
“그래?”
마왕은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내 변화를 흥미로워 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이렇게 변하다니, 무슨 생각을 했지?”
내 볼에 닿는 커다란 손. 나는 그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제가 사제라는 생각이요. 어그러졌고, 타락했지만 그래도 동족을 구하고 싶은 사제란 걸 떠올렸어요.”
나는 오히려 미소 지었다.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차가우면서도 우아한 미소를.
“절 취하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강제해도 좋아요. 어차피 당신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까치발로 그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뿐이에요. 당신이 제게 할 수 있는 건.”
한없이 냉정해진다. 나는 인간이었다. 말레드레드라는 제멋대로라는 인간. 이런 나를 지지해 주는 존재가 여전히 있다는 것에 가슴 따뜻함을 느끼며, 나는 나를 바로 보았다.
“육신은 몰라도 제 마음과 정신은 영원히 가질 수 없을 테니까.”
“흠…….”
마왕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미끄러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기분이 상했음이 역력했다.
“이런 단호함과 확신은 매우 기분 나쁘군. 그대는 그대의 마음과 정신에 너무 커다란 가치를 부여한 게 아닌가? 내가 원하는 건 그대의 육신이었을 뿐, 그대의 정신이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바란 건 육체적 쾌락이었을 뿐.”
“그렇다면 저를 이곳에서 강제로 취해도 문제없겠네요. 제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당신이 원한 전부였으니까.”
이 말이 그의 기분을 더욱 망쳤음을 알고 있다. 예상대로 마왕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맘에 들지 않아.”
마침내 그가 중얼거렸다.
“까다롭게 구는 인간 여자처럼 짜증 나는 건 없지.”
마왕은 팔을 들었다.
“내게 당연히 순종할 거라고 예상한 존재가 건방지게 나오면 나 역시 반응하게 되어 있어.”
마왕이 팔을 아래로 확 내렸다. 그러자 그 팔에서부터 어둠이, 짙은 마기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나온 어둠은 세계를 만들었다. 우리 세상을 비집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금세 변한 하늘과 땅. 보랏빛과 암녹색이 축축하게 이어지는 비참함의 색깔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계를 상징하는 색깔이었고, 마물을 자라나게 하는 어둠의 양식이었다.
마왕이 마기의 세상을 열자, 마물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물들은 더욱 살벌하게 변해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살려 달라는 기사와 민간인, 어린아이들을 보자 나는 완전히 깨닫고 만다. 내가 절대 저러한 마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절망의 마족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끄, 끄아아아……!”
그 끔찍한 광경 중에서도 유독 절망적인 비명을 지르는 자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벨을 보았다. 벨은 거대한 마물에게 사지를 잡혀 사방으로 찢기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와 목에 핏대가 올라온 것을 보며 나는 마왕에게 외쳤다.
“왜 이러는 거예요? 당신에게 가겠다는 약속은 지킬 거라고요!”
“그래, 약속을 지켜야지. 하지만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야. 내 세계를 위해 나도 나답게 반응할 뿐이지.”
“반응? 어디까지나 당신과 나의 계약이었을 뿐이잖아요! 우리 세상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어요!”
“정말 상관이 없다고 보나? 결국 그대의 알량한 선량함은 이런 인간들에게서 비롯한 거야. 이들을 구하고자, 이들을 지키고자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거지. 뭐 어찌 됐든, 좋아. 그대가 사제란 걸 버리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내가 마왕이란 사실을 이런 순간에 자각하듯이.”
그의 몸에서 마기가 확장되자 덜컥 겁이 났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신성력을 피워 그에게 던졌다.
퍽. 그러나 신성력이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터져 버렸다. 마왕은 우습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손가락을 내 쪽으로 튕겼다. 그러자 작은 마기가 빠져나와 내 가슴을 강타한다.
“읏……!”
내가 뒤로 물러나며 가슴을 움켜쥐었을 때였다. 저쪽, 붙잡힌 아론에게서 순간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다친 것을 그 와중에 본 것인지 신성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자 마왕은 잠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민감한 인간이군. 나름대로 살살했는데 말이야. 나 역시 그대의 몸이 다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비웃듯이 반응한 그는 자신의 마기로 재탄생하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나는 원래 악해. 사악하고 불쾌한 마계의 군주지. 그대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해서, 내가 착하거나 온순할 거라 기대하면 안 돼. 나는 원래, 기분에 따라서 인간들을 수도 없이 죽여 왔으니까.”
마왕은 가슴 통증에 괴로워하는 나를 측은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대도 종속되려는 이가 어떤 존재인지 이 기회에 확실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가, 갈 테니…….”
나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아까의 마기 공격으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머릿속 어딘가에서 끝없이 뇌수와 피가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나는 흐릿해지려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며 말을 끝내야 했다.
“그, 그만해 줘요……, 이건 당신과 나의 문제예요…….”
“그렇지 않아. 이제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마왕의 위쪽에는 못 보던 거대한 타원형의 암적색의 구름이 있었다. 그 구름은 한 방향으로 돌면서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설마.”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차, 차원의 문……?”
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는 지금 아주 불안해졌어. 고위 마족의 목이 잘린 후라, 다들 마계의 앞날을 걱정하며 나를 두려워하고 있지. 이런 때엔 전략적으로 관심을 돌리는 게 필요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나는 그의 뒷말을 두려워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마왕은 말을 이었다.
“약간의 소모전. 인간들과의 싸움이 그들에게 활력을 줄 거야. 그대의 적들도 이 기회에 처리할 수 있을 테고.”
“자, 잠깐…… 무, 무슨 말을……하는 거예요?”
손이 떨린다. 그리고 몸이 떨리고 목소리까지 떨렸다. 공포에 반응하는 내 몸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이곳이 곧 전장이 될 거라는. 마계와 인간계가 부딪치는 끔찍한 전쟁터가 될 거라는 것을 말이다.
마왕은 겁에 질린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어때, 꽤 흥미진진하지 않나?”
“아, 아…….”
“원한다면 그대는 선두에서 그걸 볼 수 있을 거다.”
“시, 싫어……!”
나는 도리질을 쳤다.
“이, 이건 말도 안 돼요! 공평하지 않다고요! 저들은 준비되지 않았어요! 그, 그저……. 나라는 인간을 잡기 위해 기사를 보냈을 뿐이에요! 당신 같은 강력한 마족을 상대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요!”
그러나 내 외침은 허무하게 막혔다.
“진정해. 인간들은 그대의 생각보다 더 영리하니까.”
마왕은 저편을 바라보았다.
“신성력 가득한 무리가 근처에 와 있다는 게 느껴진다.”
“……!”
“아주 강력하고 강한 자들이 즐비해 있지. 나를 대비한 것처럼.”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왕은 고개를 돌리며 점심을 먹는 것처럼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꽤 팽팽한 싸움이 될 거야. 지루하지 않을 테지.”
나는 여전히 대답할 수 없었다.
내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의 말대로 인간 세상의 특사가 도착했다. 마왕은 그를 공격하지 않고 쳐다만 보았다. 마왕의 의지 때문인지 마물들도 특사가 가는 길을 비켜 주었다. 곧 나와 마왕이 있는 곳에 도착한 그는 2명의 기사만을 끌고 온 상태였다. 제국의 인장이 박혀 있는 특사의 고급스러운 옷을 보면서 나는 상당한 신분의 자가 상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인가…….’
강력한 신성력의 소유자들이 동행했다면 그녀가 온 것일 가능성이 컸다. 아마도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이곳에서 멀찍이 기사들과 함께 임시 초소를 만들었을 그녀는, 특사에게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라고 했을 것이다.
특사는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가 내 뒤에 선 마왕을 보며 곧 뻣뻣하게 표정을 굳혔다. 나는 그의 대담함과 용기를 칭찬하고 싶었다. 비록 손과 다리를 떨고 있었지만 어디 마왕 앞에 서기가 쉬울까. 더구나 주위에는 마물들이 가득했고, 마기가 팽배한 상태였다.
그는 마왕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위, 위, 위대한 신성 제국의 황제께서 마, 마, 말씀을 저, 전하셨습니다……!”
그는 애써 입가를 올렸다. 공포에 찌든 미소는 애처로울 뿐이었다. 딱 보기에도 사제가 아닌 행정관료. 이런 곳에 사제를 보내면 공격받을 걸 아는지, 아니면 그냥 운이 나빴는지 특사로 온 자는 나를 보며 궁색한 어조로 물었다.
“폐, 폐, 폐하께서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왜 우리 세상에 마왕과 마기가 가득해진 것인지……, 사, 사, 살아 있는 인간이 있다면 답을 알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간신히 끝낸 그에게 나는 자세를 바로 하려 했다. 가슴과 머리가 무척 아팠지만 최대한 자세히 전달하고 싶었다.
“마왕이…… 마족들을 소환해…… 우리와 싸우겠다고 합니다……. 위에 만들어지는 것은 거대한 소환의 문이고요……. 완성되면 마족과 마물이 더 쏟아질 거예요. 사, 살아남은 자들은 신전에 있지만 위험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