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203화 (203/220)

203화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참고로 제가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아론나이드 경께서는! 이 일과 별개로 제 마음과 존경심을 알아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우리가 멀찍이 걸어갈 때까지 울려 왔다. 나는 이런 곳에서도 아론이 좋다고 외치는 기사를 발견하니 왠지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아론은 아무 생각 없는 듯 보이지만, 지켜보는 내 시선에선 아론의 인기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반증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성문을 통과해 안도감을 받은 것도 잠시, 기사가 성에 연락한 것인지 성주가 기사단을 끌고 나타났다. 그는 신전을 바로 앞에 둔 길목을 가로막으며 선두에 서 있는 나와 소녀를 불편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애써 입꼬리를 올린 채로 물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많고 많은 신전 중에서, 하필 우리 도시의 신전을 방문한 이유가 뭡니까.”

“가까워서요. 신전을 통해 연락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사람들과 관련해서요.”

“사람들이요? 제 눈에는 곧 죽을 병자들과 마물들밖에 안 보이는데요?”

영주는 무엇이 몹시도 마려운 것처럼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금세라도 저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릴 것 같은 그를 보다가, 나는 주위를 쳐다보았다. 시민들이 우리를 신기해하며 둘러싸고 있다가 영주가 나타나자 두려운 얼굴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평소에도 영주가 어떤 성향인지를 보여 주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찬찬히 말했다.

“병자들과 마물이라니요. 그럼 이 신성한 빛을 감당치 못할 겁니다.”

선두에 섰던 때를 올리며 우아하게. 나는 빛을 뿜어냈다. 작고 둥근 빛들. 방금 지나쳐 왔던 생기 가득한 꽃을 떠올려 보라. 그게 사람들 마음을 어찌 만들었는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신성력을 위로 뿌리자 하얀 눈꽃들처럼 신성력이 어여쁘게 떨어져 내렸다. 생존자와 괴생명체들은 그 빛무리에 감탄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들이 기꺼이 빛을 만지는 걸 보라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인간이에요. 성스러운 신성력을 반기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고통받았어요. 외딴곳에서에 격리되어서요. 저는 사제로서 이들이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주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들이 마물이나 마족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검을 들어서 죽여야 하는 존재라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거참, 무척 곤란한 말씀을 하십니다. 저들이 비록 신성력에 반응하지 않을지라도.”

영주는 이 대목에서 인상을 무척 찌푸렸다. 설사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마땅찮은 반응 같았다.

“시민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저런 흉측한 몰골을 한 이들을 우리 시민들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보세요. 저들의 끔찍한 피부를! 각지고 튀어나오고 불거진 외모를! 저런 건 인간이 아니에요! 혐오스러운 생명일 뿐이죠!”

“외모로만 무언가를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에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가장 매력적인 얼굴을 지녔듯이요.”

나는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마왕처럼.”

내 예시에 영주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곧 반격해 왔다.

“사제의 입에서 가장 불경한 존재가 튀어나오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영주님께서 외모로 존재를 판단하는 실수를 하고 계셔서요. 저도 모르게 나왔네요.”

“이잇! 어디서 그런 막 나가는 예시를 들었는지 몰라도, 당신은 사제가 아니에요! 당신 같은 사람이 사제일 리 없어요! 어디서 끔찍한 생명들을 데리고 와서는 신전으로 가야 한다는 당신이 결코, 사제일 리가 없습니다!”

영주는 마침내 자신의 화려한 검을 꺼내 들었다.

“나는 정당하게 말하는 거요! 시민이라 볼 수 없는 자, 추악한 사제는 당장 내 영지에서 나가세요!”

“영지요? 아시다시피 신전과 그 부근의 땅은 대신전의 영토에 속합니다.”

나는 기죽지 않았다. 기죽을 거였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거라 다짐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오히려 영주님께서 길을 비키셔야 해요. 저는 지금 신전에 속한 영지를 밟고 있으니까요.”

“끝까지 본인이 사제라고 우기는 겁니까? 좋아요! 당신만을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제가 아닌 저들까지 내가 봐줄 필요는 없겠죠.”

영주는 검을 쳐올렸다.

“저것들을 당장 잡아 죽여라!”

그때였다. 잠자코 뒤쪽에 있던 아론이 빠르게 내 앞을 막아섰다. 아론은 말없이 대검을 바르게 쥐었다. 아론의 외양에서 풍기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는지 영주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하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말이 아론의 기운에 놀라 앞발을 구르는 동안, 아론은 자신의 검에 흰빛을 스며들게 했다.

신성력. 그것은 신의 성스러운 기사임을 증명하는 표시였다.

“다, 당신은…….”

영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론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였다.

“이런 곳에서 저들과 있을 분이 아니신 거 같은데…….”

영주의 표정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표정 관리가 안 되는지,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로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왜, 왜, 이런 일을…….”

“옳다고 생각한 것을 이행하는 것뿐입니다.”

아론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저며들 듯이 울렸으며 침착하고 단호했다.

“사제와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한다면 기꺼이 맞설 겁니다.”

“아아…….”

영주는 탄식했다. 그는 기사단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수적으로는 우세다. 그러나 유명한 성기사가 나타난 것이 놀라운지 기사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영주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는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무언가 빠르게 머리를 굴린 그는, 곧 인상을 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영주는 어느새 검을 내린 채 간사하게 웃고 있었다.

“유명한 기사께서 이런 곳에 계신 걸 보면 제가 모르는 중요한 일이 있는 거 같군요. 시민들이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으나 제가 함께 있다면 걱정이 덜어질 겁니다. 제가 호위하며 신전으로 데리고 가고 싶군요.”

영주는 어느새 기사단에 검을 내리라며 명하고 있었다. 그들이 경계를 풀자, 아론도 검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검은 쥔 채로, 방심은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영주는 아론과 부딪치고 싶지 않았는지 갑자기 친근하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신전까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모양새가 묘해졌다. 우리 주위로 기사단이 호위하듯이 걷는다. 시민들은 그 모습을 괴이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도 들려왔다. ‘저게 무슨 일이래. 우리 영주가 호의를 베풀다니.’라고 떠드는 그들 사이에서는 우리를 불쾌하게 보는 시선도 존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호기심 어린 눈동자였고 두려움만큼 신기하다는 눈빛도 있었다. 나는 그들이 더 우리를 잘 알아봐 주길 원했다.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배가 부르고 몸을 피할 곳이 있음에 행복해한다는 것을 진정 알아 주기를.

“저기 신전이 보이는군요.”

영주는 뒤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나는 그의 눈빛이 무언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꿍꿍이지?

그 순간, 건물 양쪽에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궁수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재빨리 손으로 빛을 펼쳤다. 눈이 부신 빛에 궁수들이 망설이는 것을 보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아론!”

다급한 내 목소리에 아론은 누구보다도 빨리 반응했다. 그는 검을 휘둘렀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던 화살들이 그 흐름에 막혀서 두 동강이 났다. 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재빨리 대검에 기를 형성한 그는 신성력을 공처럼 만들어 궁수를 각각 맞춰서 쓰러뜨려 버렸다.

“아, 아니 이게…….”

영주가 놀라서 기사단에게 공격하라고 할 찰나, 아론의 몸에서는 굉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신성력을 몸에 휘감은 아론은 빛으로 된 전사 같았다. 그가 대검을 위협적으로 휘두르자 거기서 나온 바람이 기사단과 영주의 말을 공격했다.

“으캭!”

영주는 괴성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고, 기사단은 뒤로 나동그라져 신음을 냈다.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다들 어안이 벙벙한지 한동안 말 없는 침묵이 우리가 있는 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살수를 숨겨 놓으시다니요.”

“이, 일반적인 보호 조치입니다. 혹시라도 이상한 일이 생길까 만약으로 준비해 둔 것일 뿐…….”

영주는 궁색하게 웃으며 변명했지만 내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소녀는 몹시도 놀랐는지 작은 몸을 떨며 말을 꽉 붙들고 있었다. 생존자, 괴생명체들. 모두 할 것 없이 몸을 숙인 채로 겁에 질린 것을 보면서 나는 경고했다.

“말씀을 안 드렸네요. 저희를 공격한다면,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다친다면, 제 목숨을 다해 방어하리라는 것을요.”

아론은 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살기를 무섭게 뿜어내었다. 방금 전과는 또 다른 힘의 폭풍이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오자 기사들은 모두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입을 벌렸다. 영주는 시퍼렇게 얼굴이 변해서 침을 흘렸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시, 실수였다니까요? 그냥 조금 위협만 하려고……. 사, 사제님이시니 당연히 자비를 베풀겠죠? 설마 절 위험하게 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죠?”

자기에겐 또 자비를 베풀라니. 정말 제멋대로에 이기적이고 야비한 인간이다. 나는 기분이 더욱 나빠지는 걸 느꼈다. 그때, 신전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아니, 이게 어쩐 일입니까.”

그는 매우 노쇠한 사제였다. 살짝 무릎을 저는 사제는 아론과 나, 그리고 영주와 기사들을 번갈아 살펴보고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영주님. 왜 사제들이 신전을 찾아오는 걸 막고 계십니까. 사제들과 싸우려고 하신 겁니까?”

“하, 하지만 대사제님! 저들은 괴물들과 함께 왔어요!”

“괴물이요?”

대사제라 불린 그가 눈을 크게 떴다. 하얀 머리가 성성한 그는 눈동자가 회색으로 보일 만큼 시야가 좋지 않은 듯 보였다. 그는 이마를 한껏 주름지더니, 이윽고 알아봤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괴물이라고 하긴 어폐가 있군요. 그저 아픈 분들과 특이한 외양을 지닌 사람들로 보입니다. 어찌 됐든 모두 겁에 질려 있어요. 자애로운 엘크리찬의 신전에서 저런 표정이라니. 안쓰럽기 짝이 없군요. 어서 신전으로 안내해야겠습니다.”

“진심이십니까, 대사제님? 정녕 저 끔찍한 외양을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나쁜 것만 보려 하면 그것만 보이고 그것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보세요. 저 아이의 맑은 눈빛을. 그리고 손목에 걸린 꽃목걸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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