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아론은 말 고삐를 잡으며 말의 목덜미를 쓸었다. 말은 온순하게도 그 손길을 즐기며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나는 말을 보면서 가만히 웃음 지었다. 말의 등을 쓰다듬는데 아론의 눈길이 느껴졌다.
“왜?”
“아뇨, 말레드레드는.”
아론은 미소 지었다.
“저보다 더 좋은 지휘관이 될 거 같아서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나도 모르게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다. 아론은 그저 하는 소리가 아니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깊잖아요. 사물을 보고 쉽게 판단하지 않고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떤 방법이 더 효율적일지 늘 신중하게 생각하고 실천하잖아요.”
“겨우 그런 정도로 지휘관이 되지는 못해.”
그것도 그리 훌륭한 수준도 아니고. 내 대꾸에 아론은 작게 웃었다.
“겸허함도 지휘관의 미덕이었죠.”
“아론.”
“놀리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제대로 상대를 보고 있어요. 말레드레드가 전투에서 항상 선두에 섰던 것만 봐도 말이죠.”
“그건 내 외양 때문이야.”
나는 오해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아론은 여전히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외양이 훌륭한 사제는 많아요. 하지만 그들이 다 앞에 서는 건 아니에요. 선두에 설 만한 자이기 때문에 서는 거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조차 나를 믿지 못해 묻고 말았다. 아론은 내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확신에 찬 눈으로 나를 먼저 바라봤을 뿐. 이윽고 그가 말했다.
“세상에 말레드레드와 저 둘이 있다면, 선두에 서는 건 말레드레드일 거예요.”
“말도 안 돼.”
“선두에서 절 이끌겠죠.”
아론은 노래하듯이 감미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리 내가 아니라 해도 분명하다는 그를 보니 이제는 웃음이 나온다. 이상하게도 그 억지가, 그 외골수적인 편견이 싫지 않다는 거다.
마치 나를 내 생각보다 더 의미 있게 봐 준 느낌에. 내가 더 의미 있는 존재라 말해 주는 그의 신념에.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론은, 무엇이 됐든 내 말을 따른다는 이야기인 거지?”
“그런 이야기죠.”
아론은 살며시 웃었다. 그를 둘러싼 공기가 부드럽게 변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전 당신의 기사이며 종이며 노예일 겁니다. 언제나 말이죠.”
“…….”
울컥. 왠지 가슴 속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기분이다. 역하지 않은 산들바람. 그 부드러움과 다정함의 물결은 마음을 부수지 않고 작은 꽃잎으로 만들어 휩쓸고 다닌다. 나는 그 아득함과 황홀함에 젖어 있었다. 잠시 말의 목덜미를 쓸며 입을 다물고 있는데 아론이 가만히 말해 온다.
“그러니까 두려워 말아요.”
그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내가, 사람들을 이끌고 도시로 가려던 사제가 사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다고? 이대로 잘될까 무서워한다고?
“……그럴게.”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실은 나조차도 용기란 단어를 힘겹게 끌어내고 있음을. 소녀가 잘못될까 너무나 무섭다는 것을, 아론은 알고 있었다. 내 대답에 아론은 내 손에 가만히 자신의 손을 올렸다.
커다란 손. 따뜻한 손. 듬직한 손. 나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갈까요? 소녀를 여기에 태우면 좋겠군요.”
아론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가 신경 써 준 것이 고마웠다. 소녀가 먼저 말에 앉아서 가기로 하고, 힘든 자가 있다면 번갈아 태우기로 했다. 우리는 그렇게 길을 떠났다.
가까운 도시는 걸어서 반나절이 걸린다. 촌장은 길을 따라가면 늦을 거라고 하며 산과 둔덕을 타고 가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산길을 탔고, 중간중간 허기는 촌장이 챙겨 준 빵과 물로 해결했다. 다들 불안했는지 처음에는 말이 없었지만, 자연을 느끼며 걷고 뛰자 조금씩 풀어져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어, 아래에서 왔어요? 나도 그 지역 출신인데!”
“반가워요! 고향 사람은 오랜만에 봐요!”
말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자 사람들은 금세 더 가까워졌다. 다만 괴생명체들은 그 대화에도 쉽게 끼어들지 못했다. 그들은 더욱 눈치를 보고 있었고,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대로 벽이 생기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소녀가 꽃이 넓게 피어 있는 벌판을 보고 달려가자 상황이 달라졌다.
“너, 너무 예뻐요-!”
화사한 꽃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괴생명체. 평범한 소녀라고 보기 힘든 외양이었지만 알록달록한 꽃들 사이에서 이를 드러내고 웃는 소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운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 그것이 좋고 의미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닌지 생존자들은 이내 소녀에게 어떤 꽃이 좋냐고 묻기 시작했다. 꽃목걸이를 솜씨 있게 만들어 건네는 이도 있었다. 소녀가 그런 모습을 보이자, 다른 괴생명체 사람들도 이내 편한 자세로 꽃을 즐기기 시작했다. 엎드려서 꽃 향을 맡기도 하고, 눈을 감고 바람에 섞인 향내를 찾기도 한다. 그냥 아무렇게나 뻗어 있는 자도 있었다. 무엇이 됐든 다들 편안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 모습을 도시 사람들도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군요.”
아론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
“당장은 어려워도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도 이들을 존중받을 생명으로 볼 테니까요.”
나는 더욱 확신이 섰다. 이 일이 내 임무라는 것을. 여태까지 사제로서 수동적으로 임무를 행해 왔던 것과 달리, 나는 더없이 적극적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내가, 사제로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 건지 모른다. 아론을 자유롭게 하고 싶었던 나는, 마물의 공격으로 고통받는 이들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소녀가 그 기회를 내게 주었다. 그냥 마왕에게로 떠날 수도 있지만, 이 일을, 이 임무를 해결하고 간다면 더없이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쉬고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어서 가요.”
아론과 함께 서둘러 도시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마왕이 기다림에 지쳐 강제로 나를 찾아가기 전에.
서두른 보람이 있었을까.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성벽에 도달했다. 아론은 주홍빛 해가 이글거리는 저편을 보며 성벽과 성문을 유심히 살폈다.
“저쪽에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군요. 문지기는 두 명 정도이나 저 수가 다가 아닐 겁니다.”
“저, 저희는 숨어야 들어가야 하나요?”
괴생명체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나는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입성이라는 건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요. 들어가기 전부터 모습을 숨기면 꺼리는 게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오히려 당당히 들어가야 해요.”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례로 서서 걸어가는 겁니다. 제가 선두에 설 거고 말레드레드가 후미에 설 거예요.”
나는 좀 더 깊이 생각해보고 말했다.
“어쩌면 말은 소녀가 타고, 제가 옆에서 걷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제, 제가 말을 타요?”
소녀는 놀란 것처럼 나를 보았다. 아론은 내 말에 멈칫하더니 곧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말했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입성이 상징적인 의미이니. 제가 말을 타고 사람들을 끌고 가면 포로라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소녀가 말을 타고 사제가 옆에서 끌어 주면, 그건 함께 한다는 의미로 보겠죠.”
아론은 감탄하듯이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시선이 멋쩍었으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에 조금 웃으며 소녀가 타는 것을 도와주었다. 소녀는 긴장한 듯 보였다. 나는 그런 소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용기를 내. 나도 함께 낼게.”
“네, 언니.”
소녀의 미소가 값지다. 나는 그 미소에 더욱 힘을 얻은 것처럼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렇게 사람들이, 괴생명체들이 우리를 따라왔다. 줄줄이 따라오는 모양은 마치 앞에서 돌아보면 뱀의 꼬리처럼도 보였고 강의 물줄기처럼도 보였다. 느리지만 꾸준히 흘러가는 모습은 생동감이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성문에 도착했을 때, 문지기들이 당황해서 창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 실례지만.”
그는 창끝을 소녀에게 겨눠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소녀가 탄 말을 끌고 있는 사제인 나를 보면서 당황하고 있었다.
“어떤 용무로 방문하신 건지.”
“신전에 가고 싶어서요.”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을 거두기 위해 손에 신성력을 피웠다. 하얀 신성력이 눈처럼 맺히자 소녀는 살짝 눈을 감았다.
“신성력으로 증명할 게 있어서.”
소녀는 어느새 다시 눈을 떠 신성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집중한 모습이 예뻤다.
“정말 환해요…….”
소녀가 감탄하며 중얼거렸을 때, 문지기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문지기들은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조금 더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기사를 데려왔다.
“사제님은 통과되나 같이 온 이들은 아쉽게도…….”
기사는 곤란하다는 듯이 미간을 왕창 찡그리고 있었다. 그때 뒤에 있던 아론이 나섰다.
“안 될 게 뭐가 있습니까. 신원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네, 네?”
기사는 놀란 눈으로 아론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설마 아론나이드 경? 아, 죄, 죄송합니다. 그게 수도에서 뵌 적이 있다 보니……. 그러니까 실제 만나 뵌 것은 아니고 제가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어서…….”
그는 몹시도 당황했다. 후미에 아론이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아론은 그런 그를 보면서 말했다.
“신전으로 가야 합니다. 이들은 모두 안전하니 제가 사제분과 함께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 그렇다면…….”
기사는 거의 울상을 짓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불안해 보이는 사람들과 이상하게 변한 사람들. 그는 혼란에 빠진 듯 보였다. 아론은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위에 보고해도 좋고, 신전에 말해 놓아도 됩니다. 어차피 꺼릴 게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