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94화 (194/220)

194화

“아론…….”

왜인지 눈가가 뜨겁다.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이 알 수 없이 올라오는 액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지금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아닌데 참으로 이상하다.

“나는.”

다만 추측해 보자면 아론이 나라는 존재를 온전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떤 빛이나 어둠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말레드레드라는 한 인간으로서. 순수하게 나를 느꼈다. 그 인지에는 가식이나 편견이 없었다. 나는 내가 존재하는 대로 보여질 수 있었으며 내 맘대로 음영의 양감을 가질 수 있었다. 아론의 세상 속에선 나는 어떤 인간이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악이든 선이든. 그렇게 자유로웠고 그렇게 순수했다.

나는 얼룩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론이 나를 부드럽게 보는 것이 왜인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동시에 무거웠던 머리가 맑아졌다. 가슴이 시원해지며 생각이 명확하게 떠오르자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마왕에게 갈 거야.”

“…….”

“이미 선택한 거니까 되돌릴 수 없어.”

아론은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저번처럼 격렬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바다처럼 고요하게 나를 응시했다.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그래서인지 나도 떨리지 않고 속내를 말할 수 있었다.

“내가 가게 되면 더는 인간이 아닐 거야. 그에게 종속된다면 마족이나 마물이 될 테니까.”

마족에게 속한 영혼이 다시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마계에 영원히 속하게 될 터였다.

“그러니 날 찾아 헤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없어졌다고,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아론을 보았다. 이왕이면 미소 지으려 했다. 내가 한 결심을 이미 받아들였다는 듯이.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너답게 살아.”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 어쩌면 나의 진정한 욕구일지 모르는 말을 그에게 전달했다. 자유롭게, 무엇에도 거슬리지 않고. 나는 아론에게 진심을 담았다.

“날 찾지 말고 아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아론은 내 말이 끝나자 침묵했다. 한참 만에 나온 그의 말은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전 이미 결심했어요.”

“그래……?”

“고민하고 괴로워했지만 금세 깨달았어요. 제가 아주 오래전에 어떻게 살지 결정했다는 걸.”

아론은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진하디 진한 그 눈동자에는 어떤 후회도 자책도 끼어들 자리가 없는 거 같았다.

“그러니까 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

나는 간신히 말했다. 아론이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는 생각이 들어 눈가가 더욱 시큰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괜히 눈물이라도 방울져 그에게 보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일어나려 하자 아론이 붙잡았다.

“가지 말고, 제 곁에 있으면 안 돼요?”

“여긴…….”

“알아요, 불편하죠.”

내게 불편하다고 말할 입장이 아니었다. 적어도 침대에 묶여 사지를 고정 당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아론은 애원하듯이 말했다.

“밤은 너무 길어요. 여긴 너무 춥고요.”

“그럼 천을 가져오라 할게.”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아론은 떠나려는 내 손을 덥석 잡아 왔다. 그는 묶인 채로 손목을 움직이느라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눈빛은 한결같았다.

“말레드레드가 곁에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었어요.”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상태로 무언가 욕정에 가득한 짓을 할 수도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의 옆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뿐인데도 아론은 그걸 원하고 있었다.

“가지 말고, 나와o 있어요.”

아론은 노래하듯이 갈구했다.

“말레드레드를 원해요. 오로지요.”

나는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등 뒤를 스치고 올라가는 걸 느꼈다. 나를 보는 시선에서 어릴 적의 깊은 우월감을 상기하며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 몫의 덮을 걸 가져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론은 이번엔 손을 놓아주었다. 기쁨에 차 반짝거리는 눈빛이 어이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나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빨리 와요.”

몸 건장한 사내에게 귀엽다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야겠다. 그가 믿을 수 없이 귀엽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그러나 나의 밝은 기분은 계단에서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 유리가 바닥에 조각나는 것처럼 깨지고 말았다.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는 건 좋지 않아요.”

나는 벨을 보았다. 그녀는 사무적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오늘 일도 있었으니까 밤에는 편히 쉬는 게 좋을 겁니다.”

“제 일만 잘하면 무엇을 해도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알아요. 이건 그냥…… 조언이에요. 말레드레드는 크게 신경 쓸 일이 있으니까 밤 때문에 낮을 망칠까 걱정되거든요.”

“지나친 걱정이에요.”

이상하게도 나는 내 맘에 들지 않은 상대에게는 더욱 비뚤어지게 나가는 성향이 있었다.

“아론과의 밤이 기력을 상하게 하진 않아요. 그도 체력이 좋지만 저도 밤에는 더욱 체력이 좋거든요. 몇 시간을 해도 될 만큼.”

내 대꾸에 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 음란한 말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벨은 지나치려는 내 팔을 붙잡았다.

“말레드레드.”

“뭐죠?”

나는 그녀가 잡은 팔을 한 번 보았다가 물었다. 내 얼굴과 몸, 전체에는 경계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벨은 조용하게, 꼬집듯이 말했다.

“아론나이드 경은 폐하의 조카예요. 폐하께서 함부로 대하는 척 보이지만 저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생각보다 더 깊고 굉장합니다.”

“이번에도 지나치게 걱정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만.”

나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벨은 그래도 말해야겠다는 듯이 표정을 굳혔다.

“가볍게 듣지 말아요. 이 일을 성공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말레드레드는 대우가 달라지겠지만 그게 조카를 향한 기대만큼은 아닐 겁니다. 운이 나쁘면 추방될 수도 있어요. 그분께서 마음을 달리 먹으면 죽게 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말을 받았다.

“거리를 두고 적당히 대하라고요?”

나는 그녀의 뒷말을 가로챘다. 벨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어두운 눈빛에서 자신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알지 않냐는 물음은 보인다. 나는 작게 숨을 쉬었다. 이미 황제에게서 느낀 것이지만 황궁 사람들은 내가 무모할 거라고, 대담하고 주제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남자 문제에 있어서, 그저 욕망만 따르다가 일을 망칠 거라고.

나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잊었나 모르겠지만 저는 폐하와 계약을 한 몸이에요. 폐하께서 소환사 하나와의 계약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분을 믿고 따르겠어요? 저는 폐하를 믿어요. 그분은 위대한 신성 제국의 군주이시죠. 제가 믿는 신의 가장 위대한 종이고요. 그런 분께서 허튼 약속을 하실 리 없습니다. 저는 확신해요.”

나는 그녀에게 잡힌 팔을 빼냈다. 벨은 그런 나를 막지 못했다. 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아론과 거리를 두지 않겠어요. 그는 제 것이 분명하니까요.”

“…….”

침묵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무언의 항의를 느낀다. 그러나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내 일만으로도 복잡했으니까. 나는 그녀를 두고 방으로 내려갔다.

덮을 것을 챙겨 다시 올라갔을 때, 다행히 이번엔 아무도 없었다. 아론만이 방에서 눈을 감은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자나 싶어 조용한 걸음걸이로 다가가자 아론이 눈을 떴다. 자는 게 아니라 잠시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라는 듯이, 아론의 눈이 금빛으로 출렁였다.

“기다렸어요.”

나는 그 말에 수줍게 웃으며 그의 옆에 누웠다. 벗은 몸의 그는 따스했다. 따스함이 지나쳐 뜨거울 정도였다. 그의 가슴에 살짝 기대자 아론의 표정이 한없이 나른해진다. 그는 눈을 아래로 깔았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아름다운 색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쏟아졌다.

“말레드레드의 온기가 좋아요.”

“…….”

“세상에서 가장.”

그는 참 달콤한 말을 서슴없이 한다. 나는 대꾸 없이 기쁘단 의미로 그의 살결에 얼굴을 비볐다. 묶여 있어도 그의 피부의 매력은 떨어지지 않는다. 잘 단련된 신체는 누구보다도 매끄러웠고 흠 없이 보드라웠다. 이 환상적인 살결은 근육으로 이루어졌으며 강인한 뼈와 조화를 이루어 굉장한 힘을 자아낼 것이다. 나는 그가 어디에서나 활약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커다란 대검을 휘황찬란한 빛으로 휘두르며 제국을 영광으로 이끌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말레드레드.”

“……응?”

그의 온기에, 그의 위상에 취해 그의 품을 파고들었을 때였다. 아론의 목소리가 어딘가 곤란하다는 듯이 변해 있었다.

나는 오래지 않아 그의 하체가 남다르게 솟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 움찔하자 아론의 변명이 따라온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말레드레드가 그렇게 비비니까.”

아론의 눈빛은 그러나 기뻐 보였다.

“몸이 절로 반응해요. 그대의 모든 것에 깨어나듯이.”

아론은 한층 더 뜨겁고 그윽한 눈으로 말했다.

“전 말레드레드가 정말 좋은가 봐요.”

“아론.”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나를 유혹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의 말에 이토록 동하고 말다니. 낮에 마왕과의 정사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그에게 굶주려 있는 내 자신이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것을 손으로 만지며 그를 자극하고 말았다. 아론의 표정이 탁해졌다.

“음…….”

키스가 이어진 건 금방이었다. 질척거리는 혀가 안으로 들어와 금세 모든 것을 녹여 버리고 만다. 얼마나 달콤하고 감미로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액체에 빠진 기분이다. 모든 게 끈적였고, 모든 게 흘러내렸다. 나는 욕망이란 거대한 항아리 속 물처럼 존재할 뿐이었다. 휘저어지고 흐트러지며 그렇게 살아가는 생물……. 그렇게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있었다.

“어떡하죠?”

아론은 간신히 입술을 떼며 눈가를 흐렸다.

“지금 당장 말레드레드를 갖고 싶어요.”

아론은 간절하게 속삭였다.

“갖고 또 갖고, 울고 괴롭다 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밤새 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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