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헤르간의 기사단장이야.”
“……기사들도 변화가 되는군요. 하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당하겠죠. 저희 사제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거라 봅니다.”
아론은 영리하게 판단했다.
“신성력 때문에 저희를 변화시키는 건 쉽지 않겠지만요. 장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게 목적일지도 모르겠군요. 신성한 사제들을 타락시키면 신성제국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도 어려운 게 아니니까요.”
아론은 내부 분열이라는 분석을 했다. 그것은 에레나의 목적과 일치했다. 나는 현명하게 추리하고 있는 그에게 감탄하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아론. 그러니까 이 공 마물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해. 괴생명체가 좋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고, 나도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볼 때,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고 생각해.”
아까 도망치다 마주쳤던 괴생명체 여인과 아기가 생각난다. 그들은 단지 살기 위해 뛰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처절한 심정으로 말했다.
“적어도 우리가 생명을 지키는 사제라면 말이야.”
아론은 그 말에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깊은 우수가 깃든 눈동자로.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 눈이었지만 그 시선은 곧 냉정함을 머금었다.
“이상적인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괴생명체를 그대로 살려 두거나 되돌릴 방법이 없으니 죽이는 게 최선일 겁니다. 특히 마족들과 싸우는 상황에서는요.”
아론이 차갑게 몸을 돌렸다.
“아론, 하지만…….”
“말레드레드도 알고 있을 텐데요? 전투에서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하는 목숨도 있다는 것을.”
“……나는.”
목소리가 떨렸다. 왜 그런지 마음이 아파 왔다. 아론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심정에서 나오는 거부감을 느끼듯이.
“언제.”
아론은 다시 나를 보았다. 양손으로 내 볼을 감싸면서.
“그렇게 남을 신경 쓰게 된 겁니까?”
“……!”
“제게서 도망가는 것도 잊고, 제 몸을 돌보는 것도 잊은 채.”
아론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아픈 듯이 부서지는 눈빛을 보자 나는 그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말았다. 그렇다. 내 도망으로 괴로운 이도 아론이었고, 내 상처로 고통스러운 사람도 아론이었다. 사뭇 억울한 표정의 그를 보면서, 나는 너무 내 생각만을 했나 주춤하고 말았다.
“아론, 우리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짙어진다.
“우리 둘은……. 더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건 황제 폐하 때문도,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도, 그리고 네가 알고 있는 그 존재 때문도 아니야.”
아론의 눈이 무섭게 내게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거론한 것만으로도 살기 등등해진 그의 눈빛을 보면서 나는 침착하게 감정을 고하려 애썼다.
“내가 도망친 건, 널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야.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너를 너무 벅차해서……. 아론을 버거워해서……, 도망친 거야.”
나는 미소 지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가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 상처를 숨기려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론을 보고 있노라면 그 현상은 더 심해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나를 도망가게 내버려 둬.”
나는 원래 이런 존재라고 중얼거리자 아론이 침묵했다.
“……메아리 같아요. 말레드레드는.”
마침내 아론이 입을 열었다.
“멀어지면 질수록 더욱 깊은 파동을 내죠. 온 마음과 몸을 뒤흔들며.”
아론은 입가를 올렸다. 평소라면 더욱 근사해 보였을 그 미소는 어두운 눈빛 때문인지 오싹한 감이 돌았다.
“벗어요, 그러니.”
“……뭐?”
“우리가 예전 같은 관계가 될 수 없다면서요. 그럼 예전보다 훨씬 무겁고 끈끈한 관계를 만들 수밖에요.”
“농담이지?”
“이런 걸 농담으로 할 만큼 여유 있지 않아요.”
아론이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툭. 무거운 갑옷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자, 잠깐, 아론.”
“이곳은 제가 치료받는 곳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할 거예요.”
“으읏…….”
아론이 내 몸 위로 올라왔다. 앉아 있던 나는 그대로 그 무게에 눌려 눕고 말았다.
서, 설마 진짜로? 멍해져 있던 나는 아론의 입술이 목에 닿자 흠칫하며 그를 밀어냈다.
“흐읏……!”
그러나 아론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운 입김이 느껴지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무게나 힘을 당해 낼 수가 없다. 무엇보다 아론의 집념은 확실했다. 풀어헤쳐진 가슴을 애무하는 동안에도 내 옷을 착실히 벗겨나간 그는 곧바로 내 다리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믿을 수가 없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여기는 전장이었고, 나는 그에게 작별을 고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리가 벌려져 그에게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부위를 보이게 될 줄이야.
“흐읏!”
그의 뜨거운 혀가 돌기를 빠르게 애무하자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신음에 재빨리 입술을 두 손으로 막았다.
“으, 으음……!”
눈앞이 줄줄 녹아내린다. 아론은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 으읍!”
더 빠르게 안쪽을 자극하는 아론의 혀 놀림에 온몸이 전기가 돈 것처럼 짜릿해졌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신음은 격렬해졌고, 나는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허벅지에 힘을 주고 말았다.
“읍……!”
꾹 누르며 들어오는 혀는 깊고 능란했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는 혀가 달아오른 음부를 연속으로 핥자 눈이 뜨거워졌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분명, 그에게 냉정해지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더 이상 어울릴 수 없다고 말하려 했는데…….
그러나 그의 혀가 들어오자 더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결국 흐느끼듯 몸을 비틀고 말았다.
“역시 좋아요.”
아론은 입가에 묻은 체액을 혀로 핥아 올리며 말했다.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드는 남자는 치명적일 정도로 그윽하다.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딴생각 말아요.”
아론은 내 위로 완전히 올라왔다.
“읍!”
허리를 바짝 붙이자 투명한 물이 새어 나오는 음부로 파고들어 오는 성기가 느껴졌다. 곧고 굳은 아론의 중심이.
“아, 음……!”
“오직 저와 뜨거움만을 기억해요.”
아론의 눈빛은 한없이 일렁거렸다. 모든 것을 뛰어넘겠다는 듯이.
“다른 건 기억할 필요 없어요. 어떤 것도.”
“으음!”
“어떤 존재도!”
아론의 말은 주문처럼 울렸다. 깊은 바람과 욕망이 집약되어 내 정신을 휘어잡았다. 아득해지는 내 의식을 붙잡은 그는 강건하고 단단한 몸으로 나를 2차적으로 뜨겁게 불태웠다. 불씨를 품은 성기가 내 안을 달굴 때마다 나는 열꽃이 핀 것처럼 신음했다.
“아, 아……!”
결국 얼마 못 가서 입술을 막은 손을 떼고야 말았다. 온몸이 그를 따라서 흔들리는 들꽃이 된 기분이다. 바람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그 나약한 생명처럼.
얼마나 지났을까, 아론은 내 안을 뜨겁게 적시며 고개를 들었다. 땀이 흐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집요하게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간신히 숨을 헐떡이던 나는 천 뒤로 인기척이 들리자 숨을 멈추고 말았다.
“아론나이드 경.”
묵직한 목소리였다. 당혹스러워하는 나와 다르게 아론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는 침착하게 반응했다.
“무슨 일이죠.”
“죽어 있는 도시의 사제를 발견했습니다. 마족에게 죽임을 당한 거 같더군요.”
아론은 멈칫하고는 대답했다.
“곧 나가겠습니다.”
인기척이 사라지자 아론은 그제야 몸을 뒤로 물렸다.
“흐읏…….”
성기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나는 치를 떨었다. 방금까지 내 안을 쑤셔 왔던 성기에선 아직도 희끗희끗한 정액이 흐르고 있었다. 그건 내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론은 천을 가만히 끌어당겨 닦아 주려고 했다.
“내, 내가 할게.”
제 몸보다 내 몸을 챙기는 그의 행동에 서둘러 옷을 끌어당겼다. 주섬주섬 옷을 입는 동안에도 그의 한결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아론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까.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론 허탈해하는 내 자신이 느껴졌고, 자포자기하는 마음도 생겨났다.
‘어쩌면 그에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지 몰라.’
결국 그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할까. 내가 허망하게 그를 쳐다봤을 때, 아론은 어느새 갑옷을 다 챙겨 입은 상태였다.
“괴생명체 일은 제가 상부에 보고할 거예요. 말레드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요.”
“…….”
아론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얼굴이었다. 철저함과 냉정함으로 이루어진 사내는 나를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닌데 시선만으로 나를 옥죄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 마물의 능력은 심각하니 조만간 소탕하는 게 가장 좋겠죠. 그럼 가요.”
“……나도?”
“어딜 가든 데려갈 거예요. 어떤 위험하고 험난한 장소라도.”
“…….”
“말레드레드를 잃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꽉 잡았다. 우리가 손을 잡고 천막에서 나오자 기사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쏠렸다. 사제들은 모두 놀란 표정이었다. 당황스러운 가운데 부관이 정신 차리고 물었다.
“가, 같이 가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