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59화 (159/220)

159화

나는 그의 눈에 담긴 흥미도 정욕도 모두 재미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제법 냉담하게, 무거운 어조로 물을 수 있었다.

“이 도시에…….”

미동도 없는 붉은 눈동자. 무심하게 세상을 관조하는 눈빛은 그가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내 질문에 마왕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내게서 눈을 돌려 이색적인 도시의 지형을 돌아보았다.

“특이한 도시군.”

마왕은 그게 다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할 만큼 매력적인 도시는 아니야. 적어도 내가 한 짓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마왕은 내 뺨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지분거리며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부른 건가. 그렇다면 실망스러운데.”

그 손길은 어쩐지 선정적이었고, 마음을 간질이는 데가 있었다. 그에게 닿으면 익숙하게 느껴지는 감정들. 그것들은 내 욕망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뜨겁고 단순한 감정들이다. 마왕의 전신은 내 숨겨진 욕구들을 자극하기 충분했지만 아쉽게도 내 마음과 머리가 차갑게 얼어붙은 채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살짝 떼어냈다. 마왕이 의외란 듯이 눈썹을 올리는 걸 보면서, 나는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내뱉었다.

“전 이곳에서 마족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싶어요.”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룬에 감싸인 마족. 그는 기억을 조작당하는 중인 듯싶었다. 나는 두려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조사단이 나타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죽였어요. 조사단은 인간을 괴롭히는 괴생명체들을 조사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마족은 그 괴생명체들을 실험체라고 부르더군요.”

“우리 마족들도.”

마왕이 별 동요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간들처럼 실험을 한다. 좀 더 이 세계를 쉽게 얻기 위해서. 일부는 무작정 싸우고 부딪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하지.”

“실험이라면 우리 인간을 상대로요?”

나는 캐묻고 말았다.

“그렇다면, 괴생명체들을 마족들이 만들었다는 거예요? 우리 인간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하, 하지만 그들은 신성력에 반응하지 않았어요. 마족이 만들었다면 마기를 지닌 마물처럼 만들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대, 궁금한 게 많은 것 같군.”

마왕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나를 피해서 도망친 것치고는 지나치게 사제의 일에 미련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나뿐만 아니라 그 성기사로부터도 도망치는 중인 것 같은데.”

“그, 그게…….”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그에게 정곡을 찔리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만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그에게 캐물을 처지가 아니었다. 내 목표는 강대한 두 존재로부터 도망가는 것이었고, 없는 듯 이 세상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렇게 그를 불러내고 말았을까.

“…….”

문득 내 발까지 와 닿은 붉은 피를 발견했다. 피는 쓰러진 기사와 대장님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다. 끈적거리는 피가 내 장화를 적시고 있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입술을 더듬거렸다.

“아직 사제예요…….”

“뭐?”

웅얼거린 소리를 못 들었다는 듯이 마왕이 되물었다. 나는 강하게 그에게 외치고 말았다.

“아직 사제라고요!”

울컥한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깨닫는 순간 밀려오는 회한 같은 것이었다. 나는 사제였다.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신의 심부름꾼이었다. 사제란 직업이 어떤 허울이자 내 이면을 가리는 가면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제가 되었고, 사악한 기운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누구의 강요도 아니다. 내가 결정한 일이며 내가 판단한 사항이다. 내 삶의 방향을 내 생각대로 결정한 것이다. 어느 순간 번뜩 치밀어 오르는 치기나 충동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어둠의 욕망만큼 이타적인 행동도 필요하다고 느껴 사제가 된 것이다. 소환사로서 싸워 왔던 것이다.

그런 음과 양, 어둠과 빛의 양감을 모두 지닌 내가 어떻게 갑자기 한쪽을 외면한 채 냉정한 은둔가가 될 수 있을까. 사제와 사람을 모른 척하며 세상 속으로 숨을 수 있을까. 마족이 없는 세상처럼, 모든 것을 등지며 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어요! 모른 척할 수 없다고요! 기분이 아주 거꾸러져요! 저들의 죽음을 보면……. 당신이 밉고 당신네 종족이 저주스러워요!”

그렇다. 나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욕망하는 것만을 추구하는 말레드레드만의 면모는 아니다. 나는 사제로서 나를 지각했고, 내 안의 선량함을 느꼈다. 나태함과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욕구 속에 감춰진 그것을.

내 반응에 마왕은 다소 놀란 듯이 멈칫했다. 그는 곧 손으로 턱을 쓸며 곤란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그대는 갈수록 까다롭군. 초반의 욕망만에 빠져 있는 여자라면 상대하기가 무척 쉬웠을 텐데.”

“…….”

“그래. 궁금한 게 있다고? 대답해 주지. 내 수하 중 하나가 인간을 상대로 실험을 하고 있다. 실험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이야.”

“무, 무슨…….”

나는 괴생명체의 외양을 떠올리며 부정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이 무엇이지? 의지를 가진 채 선량한 척 자연과 동물을 지배하는 자를 일컫는다면, 그들도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은 신을 믿지 않을 뿐이야. 그들이 믿는 건 본능뿐이지. 더 살고자 하는 욕구, 더 먹고자 하는 욕구.”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공포의 가시처럼 섬뜩했다. 마왕은 겁에 질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대가 그들과 다른 게 있다면 신성력을 지녔다는 거겠지. 신의 선택을 받은 신성한 전사. 그게 사제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이유잖아?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 말이야.”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저들이…….”

나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왠지 뱃속이 비틀린 느낌이었다.

“저, 저와 같은 인간이라고…….”

“인간이야. 그들은 마계의 물질에 동화되어 있을 뿐, 얼마 전만 해도 그대와 같은 인간이었다.”

“……!”

“이제 답이 되었나?”

마왕은 느긋한 어조로 도시를 둘러보며 말했다.

“수하 하나가 인간계를 어떻게 타락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답이 말이야.”

“수, 수하라면…….”

나는 방금 전 마족이 꺼낸 이름을 내뱉었다.

“에레나…….”

마왕은 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게 정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레나가 인간을 괴생명체로 만들고 있었다니. 괴생명체는 근래 근방 도시에서 모두 출몰하고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은 인간들을 공격하고 식량을 훔쳐 갈 뿐, 마족들처럼 인간의 죽음이 그 목적이 아니란 것이다.

‘원래 인간이었다고 한다면…….’

그 끔찍한 외양에서 인간일 적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행동만 본다면 그냥, 식욕만 남아 있는 생명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생각을 거듭했다.

‘그렇다면 에레나는 인간들을 그 괴생명체로 모두 만들 작정인가?’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마왕을 쳐다보았다. 마왕은 모든 것이 지루해 보였다.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도, 그리고 재미없는 인간 도시를 바라보는 것도. 그는 수하의 머리를 꿈틀거리며 파고들고 있는 룬을 그나마 흥미롭게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거 외에는 모든 것이 무료하다는 듯한 사내를 보면서 나는 적극적으로 물었다.

“인간들을 괴생명체로 바꿔서 뭘 하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을 괴생명체로 바꾸면, 마, 마족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되는 건가요?”

“왜 우리가 인간들을 모두 괴생명체로 바꿀 거라고 생각하지? 말했다시피 실험체일 뿐이야. 모든 인간을 괴생명체로 바꿀 의도는 없어. 에레나가 밝히진 않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인간들이 괴생명체를 질색하고 그것들을 죽이면, 인간이 인간을 죽이게 되는 꼴이니 아주 만족스러울 거라고 보았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나는 그 말에 절벽에 가득했던 자루를 떠올렸다. 수없이 죽어 있는 괴생명체. 창으로 괴생명체를 때리는 기사들의 모습이 생각나자 왠지 몸이 비틀거리고 말았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괴생명체를 끔찍하게 여기며 그들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식량을 빼앗아 가는 그들을 마족보다 더 끔찍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 그렇다면…… 어, 어떻게 해야 그들을 되돌릴 수 있죠? 괴생명체를 원래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마왕은 딱 잘라 대꾸했다.

“애초에 그런 걸 염두에 두고 한 실험이 아니니까. 목적은 인간들을 마계의 물질, 특이한 마물과 동화시켜 신성력에 영향받지 않는 괴물로 만드는 것이었어. 인간들이 틀림없이 변한 인간들을 공격하겠지, 생각했을 뿐이다. 인간들끼리 그렇게 서로 싸우면 당연히 승리는 우리에게 기울 것이고.”

“아…….”

절망스럽다. 혀가 바짝 마르고 속이 타는 것처럼 아프다. 어떤 역함. 사악한 존재가 인간의 이기심과 보호 본능을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다, 당신…….”

마왕은 뭐냐는 듯이 나를 보았다.

“어떻게 그런 짓을…….”

“내가 마왕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설명해야 하는지 몰랐는데.”

마왕은 웃고 있었다. 오히려 겁먹고 분노한 나를 유쾌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다가왔다.

“그대는 어리숙하지 않았잖아. 비록 내가 인간 세계를 정복하는 데 흥미가 떨어진 왕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엄연히 마족들의 왕, 인간의 적수인 마족들의 군주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마왕의 손길이 내 뺨에 닿았다.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그 손을 쳐내려 했지만 마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쳐내려는 손마저 꽉 잡아 버린 것이다.

“큿……!”

마왕이 내 손과 얼굴을 붙잡은 채 끌어당기자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순진하지 않잖아, 그대. 그대와의 관계와는 별도로, 내 수하들이 늘 그대의 세계를 전복시키려고 했다는 것은 잘 알 텐데. 왜 새삼스럽게 그런 반응이지?”

“으, 읏! 저, 저리 가……!”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것인가? 사제가 자신의 소명이라고?”

마왕은 부추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저항해 봐. 오늘은 무력한 사제를 강제로 취하는 날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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