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칼날은 마치 겹겹이 나눠진 지네의 꼬리 같았다. 칼이 쭉 늘어날 때면 그 하나의 마디가 칼날에서 떨어져 나와 기사들에게 날아갔다.
“악!”
그 날 서고 빠른 공격을 기사들은 온전히 받아내지 못했다. 신성력이 번쩍이며 대검이 요란하게 움직였지만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칼날 공격에는 절망적인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마기가 베인 칼날은 신성력으로 무장한 대검이 아니라 기사를 노렸고, 기사들은 온몸에 치명적인 자상을 입은 채로 무력하게 쓰러져갔다.
“이런, 사악한 힘이……!”
성기사단장의 외침이 크게 들려왔다. 그는 온몸에서 눈이 부신 흰빛을 쏘아내고 있었다. 그 빛으로 물러나는 칼날들을 보면서, 기사단장은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힘의 원천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칼날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기사단장에게 몰려갔고, 곧 그가 비명을 지르며 검은 회오리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아…….”
대장님이 쓰러진 채로 기사단장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초반에 공격을 당한 그의 손에선 흰빛이 아스라이 사라질 것처럼 껌벅거리고 있었다. 정신을 잃어 가는 걸까. 나는 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도망가야 한다. 아니, 모른 척해야 한다. 알고 있는데…….
“으아아……!”
분명 알고 있는데……. 비명이 귓속을 찌르며 내 가슴을 난도질하듯 괴롭히자 나는 어느새 지팡이를 들고 달리고 있었다.
펑.
신성력 공을 만들었다. 칼날의 회오리를 목표 삼아 던지자, 회오리가 그치고 칼날들이 지네의 꼬리처럼 하나로 합쳐졌다. 갑자기 등장한 나를 파악한 듯, 위협적으로 꿈틀거리던 칼날들이 이내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자리에 멈춰서 얼른 소환 영역을 그렸다. 이것은 아주 짧고 간단한 주문으로, 칼날을 마계로 돌려 보내는 데는 역부족인 방법이다. 하지만 날아오는 칼날을 잠깐 동안이나마 혼란스러운 차원의 입구 틈새에 끼워 넣을 수는 있었다.
“……읏!”
수십 개로 나눠진 칼날은 내가 만든 영역에서 갈피를 잃은 것처럼 뱅뱅 돌았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차원의 문을 혼자 열 만큼의 능력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 차원의 문을 열 것처럼 입구를 살짝 열어서 대상을 혼란스럽게 할 수는 있었다.
“흐윽!”
문제는 힘의 주체가 정신을 차리면, 대상을 빠져나가게 하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보며 기겁했다. 마치 생명체가 으르렁거리듯이 마기가 거칠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근처에 주체가 있는 걸까? 나온 기운들로 하나의 구름이 형성되는 것을 보면서, 어금니를 콱 물고 지팡이를 단단히 쥐었지만 몸의 경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기, 기사단장님!”
나는 간신히 외쳤다. 어차피 칼날을 계속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기사단장이 칼날을 붙들고 있을 때 그것을 공격한다면 완전히 저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단 하나의 계략만으로 뛰어든 것이고, 따라서 기사단장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어, 어서 공격하셔야……!”
그러나 내 외침은 허무할 정도로 메아리 쳤을 뿐이다. 기사단장에게서는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까 공격에 크게 당한 것일까.
“……?”
의아해서 쳐다보았을 때, 나는 기사단장의 가슴에 막 세 개의 창끝을 찔러 넣는 마족을 발견했다. 마족은 아주 자연스럽게 가슴을 관통할 만큼 깊게 찔러 넣은 다음, 기사단장이 절명하자 창을 빼내었다.
피가 울컥하고 터져 나왔다. 동시에 피부와 근육이 찢겨 갑옷까지 처참한 몰골이 된 기사단장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마족은 창끝이 갑옷에 걸려 잘 빠지지 않자 인상을 쓰면서 창대를 흔들고 있었다.
“시, 신의 거룩한 빛이……, 너, 너희들을 징벌…….”
대장님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들려왔다. 그 순간에서도 대장님은 사제답게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마족은 그 기도가 듣기 귀찮다는 듯이 발을 들어서 대장님의 얼굴을 밟아 버렸다. 팍, 얼굴이 뭉개지는 소리에 나는 굳어졌고 속이 뒤틀렸으며 이내 참지 못해 눈을 감고 말았다. 마족은 금세 자신의 창을 들고 내 쪽으로 순간이동을 해 왔다.
“소환사인가?”
마족은 비틀거리는 내 손에 쥐어진 지팡이에 시선을 보냈다.
“의외군. 조사단에 소환사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조, 조사단?”
나는 마족이 그 단어를 말할 줄 몰랐다. 그 말은 대장님과 성기사단장이 특별한 임무를 띠고 괴생명체를 조사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는 의미다.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뜨자 마족이 고개를 까닥였다.
“조사단. 너희들이 실험체들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실험체들이 늘어나면 틀림없이 이상하다고 느껴서 원인을 찾을 테니까.”
마족은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곧 말을 정정했다.
“아니, 너희들에겐 괴생명체라고 불린다지? 그래. 괴생명체들. 우리는 그들이 인간계에 고루 퍼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어. 에레나 님의 큰 뜻을 이루려면, 인간계의 타락이 제일 우선이니까.”
“무, 무슨 말을…….”
나는 손이 격정적으로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손의 떨림은 손목으로 이어졌고, 곧 팔과 어깨까지 전해졌다. 내가 겁먹기 시작했다는 것을 제대로 느꼈는지 마족이 기쁘다는 듯이 히죽거렸다.
“그러니까, 일개 사제 따위에게 일일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거야. 넌 곧 죽을 거지만, 그래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목격했잖아? 인간들은 보통 알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고 하지. 나는 네가 그 공포를 느끼면서 죽어 갔으면 해.”
마족은 창을 내 가슴으로 겨누었다. 창이 내 가슴을 관통하게 되면 나는 즉사할 것이다. 눈앞의 있는 마족은 고위 마족이었고, 나이트 몇이 붙어야만 상대할 수 있는 고급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를 휘어 감은 그의 회오리 칼날이 내 목을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내겐 신품이 있어.”
“신품?”
내 말이 뜻밖이란 듯이 마족이 멈칫했다. 곧 그는 내 가슴께를 유심히 보더니 낄낄 웃었다.
“신의 흔적이 그리 조금 묻어 있는 거로는 날 어쩌지 못해.”
마족은 재밌다는 어조였다.
“아주 오래된 시대의 물건이군. 인간들은 이런 것을 미친 듯이 숭상한다지? 중요한 순간엔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을 말이야.”
마족은 내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단검의 일부가 닿는 순간 신성력이 번쩍였다.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마족은 비웃듯이 입가를 끌어올렸다.
“따끔하네. 하지만 그뿐이야. 이런 거로는 날 막지 못해.”
마족은 내 가슴에서 단검을 꺼냈다. 반항하듯이 올라오는 신성력에 거대한 마기를 끌어다 넣었다. 신성력과 마기. 둘은 치열하게 부딪치나 싶더니 곧 신성력을 품은 단검이 팍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되고 말았다. 마족이 이것 보라며 말했다.
“봤지? 너도 이런 꼴이 나게 될 거야.”
“마왕.”
“뭐?”
내 중얼거림에 마족이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마왕을 소환하고 싶어.”
“무슨…….”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기도 그럴 것이 나는 사제다. 사제가 마지막 순간에 소환하려는 자가 자기네들의 군주라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은 곧 조소로 변해 내게 쏟아졌다.
“너같이 정신 나간 사제도 있나? 하하!”
그렇게 웃은 마족은 이내 창을 뒤로 길게 빼었다. 뱀의 뾰족한 꼬리를 닮은 세 개의 첨예한 창끝이 내 가슴을 향한다. 그것은 죽음을 상징했다. 마족은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이야기 재밌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 아마도 다가올 고통이 너무 처참할 것 같아서. 순간에 끝났으면 하는 바람 사이로 잊고 있던 누군가가 스치듯 지나쳤다. 아마도 너무나 따뜻한 봄의 색상을 갖고 있었던 소년이, 아니, 남자가…….
“어?”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던 한 청년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게 아론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때, 내 눈앞으론 또 다른 남자가 보였다. 그의 이름은 마왕. 아니, 그의 신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지칭일 것이다. 마왕은 암흑의 안개가 사라지는 너머에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고, 정확히 마족의 창끝이 향한 내 가슴을 보고 있었다.
마왕이 안개를 뚫고 걸어 나오며 말했다.
“추적을 막고 있던 것을 없앴군.”
“네?”
마족이 어리숙하게 대꾸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왕이 나타났다는 것에 대해서 몹시도 당황한 눈초리였다. 마왕은 그에게 말했다.
“신품을 없앤 게 너인가?”
“아, 예, 예…….”
“그거 하나는 잘했군.”
마왕은 창끝에 선 나를 가리켰다.
“하지만 죽일 수 없는 사제에 대해 들었을 텐데?”
“네? 들었습니다만, 서, 설마 저 소환사가……? 하, 하지만 어떻게 여기에……. 에레나 님께서 이곳에 나타난 사제나 조사단은 모두 죽이라고 명하셨던 터라…. 저, 저, 왕이시여…….”
혼란스러운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마족이었다. 그의 울긋불긋한 얼굴색 변화를 보면서 마왕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공포스럽지. 하나 걱정하지 마라. 더는 그러하지 않을 테니.”
마왕이 손을 휘젓자 그의 팔에 검은 비단처럼 그의 팔에 감겨 있던 천이 스르륵 움직였다. 나는 그것이 그 옛날 룬이라고 불렸던 마왕의 성에 있던 지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악-!”
검은 애완동물이 자신에게 달라붙자 마족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애완동물은 머리를 똬리를 틀며 완전히 그를 감쌌고, 곧 그는 둥둥 공중에 떠서 검은 뱀에 감긴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왕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제야 숨통이 트인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마왕은 재밌다는 눈빛이었다. 내가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려 준 그는 이내 천천히 내 뺨으로 손을 가까이 했다.
“일부러 나를 피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
“나를 소환하다니, 무슨 생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