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33화 (133/220)

133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마족에게 자비 없는 그의 행동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겠노라고?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말 아래 공 마물이 스며든 땅이 부패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서히 어둠에 물들면서 변해 가는 것이……. 나는 왠지 가슴이 욱신거려 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전투가 끝나고 정화 작업이 이어졌다. 공 마물이 심하게 뛰어다녔던 터라, 숲이 엉망이었다. 공 마물은 본대까지 들어왔는데, 다행히 이미 숙소엔 신성력이 뿌려져 있던 터라 그쪽 땅을 부패시키지 못했다.

“그냥 신성력만 없앤 셈이지. 천만다행 아니겠어?”

소환사들은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불길한 느낌을 지워 버릴 수 없었다.

‘분명 마족이 왕의 명령이라고 했지.’

마족들이 왕이라고 부를 사람은 한 존재밖에 없다. 나는 공 마물이 본대를 공격해 신성력을 없애 버린 게 우연이 아닐 거란 생각에 착잡해하며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왔나?”

“!”

나는 정말 기겁하고 말았다. 숙소에는 마왕이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놀러 나온 사람처럼 유유자적한 태도로 말했다.

“조촐한 숙소군.”

붉은 눈에 흑발을 지닌 사내가 내 숙소 한가운데에 있다. 나는 눈을 깜박여 그가 진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어떻게.”

“알 텐데. 이걸 위해서 내 수하 둘이 죽었으니까.”

마왕의 눈빛이 냉혹하게 번쩍였다. 심기는 불편해 보였지만 태도는 얌전했다. 수하의 죽음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인 걸까. 마왕은 심기를 짐작할 수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대를 예전처럼 만나기가 갈수록 까다로워지는군.”

“……오늘 공격은 그럼.”

“다 알면서 묻는 거라면, 그냥 어서 내 곁에 오지 그러나.”

마왕은 손을 뻗었다. 나는 긴장했다. 그가 나와 관계를 하러 마족 둘을 보냈다는 이야기일까. 하지만 평소라면 마계로 소환을 했을 텐데 그가 직접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긴장된 순간에 머리를 굴리려고 애썼다. 그리고 답을 알아차렸다.

“……저를 소환할 수가 없었군요.”

내 말에 마왕이 그걸 알아챘냐는 듯이 짐짓 놀란 얼굴을 했다.

“그래. 신성력이 뿌려진 땅 때문만은 아니었지.”

마왕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그것은 행복한 미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분노가, 그리고 적의가 담겨 있는 미소였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내 가슴을 향했다.

“그대 안에 들어가 있는 신성력이 어떤 마기든 전부 튕겨냈기 때문에 그대를 소환할 수 없었다.”

나는 가슴에 올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아론이 얼마나 많은 신성력을 들이부었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신성력을 부어 넣었는지도. 따라서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라는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묻고 싶을 뿐이다.

“전보다 더한 신성력이라니. 결론은 하나밖에 없지. 그 성기사가 내 존재를 알았다는 것밖에.”

마왕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나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이 그를 따라서 움직였고,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왕, 어둠과 잔혹함을 상징하는 세계의 상징이다. 그런 존재가 나를 코앞에 두고 유혹하듯 눈꼬리를 접으면서 물어 오는 것에 당연히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는 어떤 반응이었지? 나를 죽이겠다고 사납게 외치던가? 아니면 마계의 모든 존재를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던가?”

그는 거의 완벽하게 아론의 반응을 짚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론은 내가 마계로 가는 것을 절대로 막으며, 모든 남자를 베어서라도 나를 독점하겠노라고 했다. 설사 자신을 증오하고 미워하더라도 구속하겠다고.

나는 마왕의 유혹에 넘어가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할 뻔하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려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며 침착하게 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이죠?”

“왜 내가 이야기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대와 쾌락을 나누러 왔을 수도 있는데.”

나는 마왕을 참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럴 시간이 없잖아요. 왜냐하면 당신의 힘은 이 순간에도 무너지고 있으니까. 일개 소환사인 제가 알아차릴 정도로.”

마왕 주변의 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랐다. 마기는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자꾸만 흩어지려다가 간신히 뭉쳐지는 모습이 반복됐다. 마왕은 ‘잘 아는군.’하고 그 사실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알다시피 이곳은 신의 힘이 강하게 모여 있는 곳. 내 힘을 유지하기가 여느 때보다 쉽지 않아. 그대를 만나러 오는 것에도 큰 힘이 소모됐지만 직접 말을 전할 수 없었어. 왜냐하면.”

마왕은 입가를 올렸다.

“내 생명체들에 반하는 경고를 해 줘야 하니까.”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마왕은 내게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인간답지 않은 입김이 귓가에 느껴지고 곧 뜨거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내일, 강한 마족 하나가 수하들을 끌고 이곳으로 쳐들어올 거야. 명목은 그동안 죽인 동족들의 목숨값 때문이지.”

“명목?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뭔데요?”

“다 알려 주면 재미없잖아? 이미 중요한 건 알려 줬으니까 잘해 봐.”

마왕은 웃으며 제 마기를 운용했다. 나는 그의 발에서부터 마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서둘러 외쳤다.

“강한 마족이라니, 어느 정도 강한 걸 말하는 거예요?”

“그대가 알 정도로 강하다.”

“!”

나는 숨을 멈췄다. 마왕은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잠시 굳은 채로 서 있었다. 머릿속에선 내가 아는 마족들이 주르륵 연상되기 시작했다.

‘설마 에레나가 직접 올까?’

차기 마왕이라는 그녀는 마왕보다 훨씬 까다로운 상태가 될 터였다. 인간을 끔찍하게도 혐오하고 죽이려 드는 존재니까.

‘예전에 마왕이 거울로 그녀에게 진행되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었는데.’

설마 내일 있을 습격에 대한 계획을 말하는 거였을까? 나는 알 수 없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머리가 어지럽다. 이것을 어떻게 전달할지도 문제였다. 어떻게 경고를 해 대비를 할지가…….

‘응?’

그때 문득 숙소 아래 땅이 눈에 들어왔다. 땅은 누렇게 말라 버석거렸다. 설마 하며 밖으로 나가자 내 숙소 주변으로 거뭇하게 변해 버린 흙이 보였다. 풀이 걸음 한 번에 가루처럼 부서지는 것을 허망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누군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역시!”

펠이었다. 그는 확신했는지 눈빛에서 투기를 일깨웠다. 그의 검이 당장이라도 빼어지려나 싶을 때, 뒤에서 누군가 그의 어깨를 홱 잡아당겼다. 아론이었다.

“여긴 지휘관들의 숙소입니다.”

아론의 표정은 몹시도 냉혹했다. 펠은 검을 잡으려던 동작 그대로 굳어서 입을 열었다.

“아, 아론나이드 경.”

펠은 흥분한 채로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내가 있는 곳의 땅과 나라는 존재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그는 얼마나 격분했는지 말을 더듬고 있었다.

“보, 보세요! 따, 땅이! 색깔이 변했어요! 대지가 죽어 버린 거라고요! 그건 한 가지 의미밖에 없습니다, 바, 바로! 저 여자! 저 여인이 사악하고 끔찍한 마기를 뿜어내는 마족이라는 것밖에!”

펠은 말을 마치면서 검의 손잡이를 뽑았다. 금방이라도 그의 검이 내 쪽으로 달려들까 싶었을 때, 아론이 펠의 앞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은 목만 남은 마족의 얼굴이었다. 죽은 마족의 머리가 갑자기 떨어지자 펠은 기겁해서 뒤로 물러났고, 아론은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

펠이 놀라서 묻자 아론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신성력으로 마족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요. 섣부른 호기심에 가져온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쪽 땅을 오염시킨 것 같군요.”

아론의 숙소는 내 숙소와 아주 근접해 있었다. 따라서 아론의 숙소 역시 거뭇하게 땅이 변해 있었다. 펠은 그걸 확인하고 다시 아론에게 물었다.

“지금 지휘관께선 개인적으로 마족의 목을 소멸하려다가 이 땅을 의도치 않게 오염시켰다는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아론은 분명히 말하고 펠을 어두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내가 아는 어둠보다 훨씬 밀도 높은 어둠이었다. 살기와 분노를 꽉꽉 뭉쳐 놓은 눈은 제3자인 나까지 소름이 돋게 할 정도였다. 아론은 아주 천천히,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론 이곳에 오지 마세요.”

“아, 아론나이드 경.”

“그녀를 모함하지도 말고 그녀 곁에 있지도 말아요.”

아론은 분명하게 경고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

펠은 어금니를 콱 깨물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경고가 아닌 협박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생각으로 펠은 나를 한 번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재빨리 숙소를 벗어났다. 아론이 그를 가만히 보며 중얼거렸다.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군요.”

“…….”

마음이 어지럽고 심란하다. 펠에게 나의 사생활에 대해서 고백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짓으로 변명하기엔 믿어 줄 것도 같지 않으니. 그와 부딪치지 않는 것밖에 답이 없었는데 같은 본대에 있다 보니 그것도 어려웠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자 아론이 물어 왔다. 나는 얼른 자세를 반듯하게 유지한 채로 그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괜찮아.”

“다행이네요.”

아론은 나를 유심히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이윽고 장갑 낀 손으로 마족의 머리를 쥐었다. 고통스러움이 가장 극대화된 순간에 죽었다는 듯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나는 속이 울렁거려 왔다. 나는 아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 신성력으로 마족을 없앨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가져온 거야?”

내 질문에 아론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윽고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