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02화 (102/220)

102.

“선두에 서서 능력을 발휘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전투란 건 늘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될 때가 많아서요. 위급한 상황도 변화도 많고…….”

“알아. 나는 어디까지나 그 선두에 서는 걸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좋겠어.”

“……할게요.”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몸이 덜 회복되었지만 전투가 곤란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카란이 무엇 때문에 이런 부탁을 하는지 알고 있는데, 거절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카란은 안도하며 얼른 덧붙였다.

“오늘 저녁에 소거 작전이 있어. 위험한 상황은 아니야. 어제 도망간 마물을 수색해 정화하는 작업이니까. 하지만 수색 범위가 넓어서 대규모의 성기사와 소환사가 투입될 거야. 그때 공작 각하를 모시고 그곳을 시찰할 걸세.”

카란은 미안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자네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데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게 좀 미안하군. 하지만 다른 소환사보다 선두에 자주 서 봤던 자네가 실력 발휘를 하는 게 훨씬 믿음직해서 말이야. 자네라면 귀족이 있든, 성기사가 있든 개의치 않고 제 일을 묵묵히 해낼 테니까.”

카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자네를 믿어. 소환사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마지막은 본심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다정했다. 그리고 왜인지 나는 그 말에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인간으로서. 그 말은 평범한데도 감동적이었다.

그가 나가고 나자 오래지 않아 다른 방문자가 도착했다. 레너드였다. 그는 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건너건너 들었다고 하며 몸이 괜찮은지 물었다. 내 얼굴빛이 좋지 않다는 것에 무척 놀란 그였으나 내가 괜찮다고, 오늘 중으로 복귀할 거라 하자 그는 다행이라는 듯이 반응했다.

“말레드레드를 멀리서 본 적이 있거든요, 어제. 근데 안색이 너무 안 좋아서 걱정했어요. 마음고생이 심했나 싶었거든요.”

“마음고생이요?”

내 질문에 레너드가 아차 싶었는지 손을 저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딱히 신경 쓸 건 아닌데…….”

“무슨 일인데요?”

내 직설적인 질문에 레너드가 망설이는가 싶더니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그 출신 이야기가 자꾸만 돌아다녀서요. 이상한 말도 덧붙여서.”

“사생아라는 말 말고, 다른 거요?”

“네, 그러니까…….”

레너드는 나를 힐끔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향에서 남자들을 유혹해서 여기 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내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레너드가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대부분은 의아해했어요! 사제가 그런 식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신성력이 있고 믿음이 있어야 하니까! 아무래도 누가 악질적인 소문을 퍼트린 거 같아서 카란이 크게 화를 냈어요. 한 번만 더 그런 이야기가 들리면 그게 누가 되었든 간에 반드시 상부에 알리고 동료를 헐뜯은 중벌을 주겠다고요.”

나는 잠깐 어지러웠다. 누가 그런 소문을 퍼트렸을까. 아마도 레베카겠지. 그녀는 내 평판을 훼손시키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녀가 날 기회주의적인 요염한 여자라고 떠들고 다닌다 한들 사제로서의 내 지위를 빼앗을 순 없었다. 그저 우아하고 정숙하다는 평가에 흠이 갈 뿐.

‘역시 아론 때문인가.’

아론이 내게 신경 쓴다는 걸 알아서, 내게 정이 떨어지도록 이런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 거겠지. 나는 그녀의 술수가 귀여웠다. 쓰린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그녀는 내 머릿속에서 작은 악동일 뿐이다. 실제로 나를 두렵게 하는 건 나를 진짜 죽이려는 마족 에레나나 나를 마족으로 몰아가는 성기사 펠, 그리고 나를 원한다는 두 남자였다.

마왕의 일도 문제였지만 아론의 일도 곤란했다. 다른 남자가 있다고 고백해도 물러나지 않는 아론을 보면서 나는 차라리 레베카의 술수가 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설득시킬 수 없다면, 차라리 정떨어져 내게서 멀어지도록…….’

눈을 질끈 감았다.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 남자의 마음이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그를 따라서 내 몸이 부서지고 내 마음이 갈라진다. 그 틈틈이 사이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건 황금빛의 순정이었다…….

“괜찮아요?”

내 몸이 벅차다는 듯이 흔들렸는지 레너드가 얼른 물어왔다.

“조금 비틀거리는데……. 제가 괜한 말을 전했나 봐요. 저도 참. 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라고 전했을까요?”

반성한다는 듯이 고개를 깊게 수그리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일부러 입가를 끌어 올려 웃었지만 레너드의 침울한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미안하다는 듯이 눈매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청년을 보니 왠지 차가웠던 마음이 조금 부드러워진다. 성기사지만, 때론 동료 소환사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레너드. 그하고도 언젠가는 이별하고 말 테지만 그럼에도 좋은 관계로 있고 싶었다.

동생 같고, 친구 같은 그에게 나는 내 모습의 일부를 드러냈다.

“전요, 사실 성격이 까칠한 편이에요.”

“네? 말레드레드가요?”

레너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모습이 무척 순진하고 온순해 보였다. 나는 잔잔히 웃었다.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고 늘 주의를 기울이니까요. 하지만 실제론 제멋대로에 이해심도 적은 편이죠.”

“전혀 안 그런 거 같은데…….”

레너드는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내 스스로를 비하한다고 생각했는지 안절부절못하는 그에게 나는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전 상처 받지 않았어요. 오히려 조금 억울하네요.”

“억울이요?”

“네. 그런 적도 없는데 그렇다고 오해를 받았으니까요. 출세를 위해 누군가를 유혹했다고.”

“아아. 곧 오해가 풀릴 거예요.”

레너드는 그렇게 위로했지만 나는 도리어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믿고 있다면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여 줘야 덜 억울하지 않을까요?”

레너드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작별의 말을 건넸을 뿐이다.

그가 가고 나자 나는 저녁 때까지 방문자 없이 쉬고 싶다고 치료 사제에게 말해 놓았다. 지금은 카란과 레너드가 왔지만 아론과 펠도 올 수 있었다. 당장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는데, 다행히 치료 사제는 내 말을 순순히 들어 주었다. 그래서 작전이 있는 시간까지 홀로 곤히 쉴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저녁 작전에 투입된다고 하자 놀란 얼굴이었다.

“아직 치료가 덜 됐는데. 무리한 움직임은 최대한 조심하셔야 해요.”

“그럴게요. 고마워요.”

나는 그녀가 주는 따끈한 버섯 스프를 먹고 치료소에서 나왔다.

하루 충분히 쉬었던 탓에 몸은 확실히 나아져 있었다. 어지러움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며 나는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내가 쓰러졌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다행히 아론은 안 왔나.’

나는 설사 와서 봤다고 한들 내 것에 함부로 손대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차라리 걱정되어서 나를 찾아다녔겠지.

아까 치료소를 방문했던 아론의 기운이 심상치 않던 것이 떠올랐으나 애써 잊으려 하며 나는 펠이 어지럽혔던 가재도구들을 정리했다. 그릇과 옷, 화장도구들을 제 자리에 놓자 쿠키 주머니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보인다. 여전히 달콤한 향내가 풍겼다. 그것을 손에 쥔 것도 잠시, 나는 마계의 것이라면 지겹다는 듯이 던져 버리려고 했다.

‘쿠키가 무슨 죄라고.’

멈칫한 나는 이내 한숨을 쉬며 던져 버리려던 주머니를 서랍장에 넣어 두었다. 괜한 화풀이로 쿠키를 부셔 봤자 청소하기만 귀찮아졌다.

‘어서 갈 준비 하자.’

카란은 소환사의 선두에 서서 실력 발휘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공작에게 일하는 소환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할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남자를 유혹해 뭔가를 이뤄 내는 여자라고 나를 보고 있다면 그런 느낌을 아예 확실하게 줄 것이라고.

‘아론이 이걸로 나를 싫어하게 되면 차라리 다행이지.’

나는 아론의 절절한 얼굴을 떠올렸다가 지워 버리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속옷은 새 것으로 입고 얇은 블라우스를 걸쳤다. 일부러 가슴 방어구는 입지 않았다. 가슴 방어구는 낡고 지저분했기 때문에, 사제복만 걸치고 손과 발에 방어구만 각각 착용했다.

거울 앞에 섰다. 나는 몇 가지 도구를 이용해 꼼꼼하게 화장을 했다. 보랏빛 눈과 하얀 피부를 강조한 화장이 끝나자 묶고 있던 은빛 머리를 풀었다. 살짝 구불거리는 은빛 머리는 며칠 간의 고생으로 생기가 덜한 상태였다.

나는 얻어 온 머릿기름을 발랐다. 우아하게 꺾어지는 머리카락의 곡선을 만들고 거울을 보자 화사한 은발이 출렁이는 여인이 보인다. 창백한 안색도 화장의 덕분인지 혈색 넘치게 보였다.

이제 지팡이를 들었다. 공들인 차림에 나무 지팡이는 단출해 보였지만, 오히려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화려한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하며 힘을 주었고 손에 미약하게 흰빛이 빛나자 마음이 포근해졌다.

신성력. 이 힘은 내가 누군지를 보여 준다. 꾸며진 외양 속에 가려진 자가 진정 누구인가를 말이다. 나는 빛을 물끄러미 보았다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허리춤에 지팡이를 매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새 작전이 벌어지는 곳은 확실히 넓었다. 본대의 왼편에 있는 평야 지대를 아우르고 있었다. 관목과 덤불이 자라나는 평야에는 간간이 높은 나무가 몇 그루 있을 뿐 대체로 시야를 넓게 뻗칠 수 있는 평평한 땅이었다. 그곳을 몰려온 성기사와 소환사가 채우고 있었다.

“도망간 마물은 수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마물이라도, 우리 땅을 어지럽히는 사악한 존재인 만큼 반드시 찾아내 그것을 죽이고 주변 땅을 정화해야 합니다.”

모처럼 본대에서 가장 높은 대장이 나와 있었다. 그는 중앙 기사단장과 아론나이드 지휘관을 슥 바라보고는 사제들에게 말했다.

“모두 두 지휘관의 지시를 받아 이번 작전을 성실히 수행해 주세요.”

나는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긴장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무얼까. 바로 뒤쪽에서 하얀 말을 탄 채로 무장한 사병들과 따로 움직이는 사내 때문에 그럴 것이다. 갈색 말을 탄 카란이 그의 옆에서 뭐라고 입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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