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01화 (101/220)

101.

“……그가 말입니까?”

되묻는 목소리는 익숙했다. 아론이었다. 아론의 되물음에 사제는 왠지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얼마나 걱정하던지요. 옆에서 보는 제가 다 놀랄 지경이었다니까요, 호호!”

“…….”

“그럼 제가 더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없습니다.”

아론은 짤막하게 말하고 나를 잠깐 보고 싶다고 말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지휘관으로서 수하가 걱정된다는 말에 치료 사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왠지 눈을 뜰 수 없었다. 깨어 있었지만 눈을 뜰 수 없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장에 그를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해진 탓이다.

일주일. 그는 그 기간 동안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해 달라고 말했다. 일주일은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었다. 그와의 관계는 사실 답이 정해져 있었다. 내가 원하는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면 안녕, 하고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 것일까.

수없이 시도해 봤지만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면 나 역시 그에게 다른 무언가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아론을 생각하자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다른 남자하고는 달랐다. 어두운 과거의 편린 한 조각에서 끌려 나와 환하게 빛을 발하는 청년은 지난날의 향수와 애잔함, 그리움과 평온을 모두 상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를 보면 가슴을 누군가 움켜 드는 것처럼 슬픔과 괴로움이 밀려오다가, 또 어느 순간 그 감정들은 차갑게 얼어붙어 냉정하게 그를 바라보게 되는 내가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편지도 없었고 흔적도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울보 소년. 별거 아닌 소년이라고 생각했던 그를 나는 왜 그리 찾아다녔던 걸까.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린 소녀의 마음에 스며들었던 정이란 게 무엇이냐고, 울보 아론을 꼭 찾아내고 싶었던 마음이란 무엇이냐고 끈질기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미 사라진 자는 사라진 자였고, 과거의 아론은 과거의 아론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미련을 갖기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한 나는, 아론의 이 끈질기고 집착 가득한 태도가 곤란했고 불편했다. 가볍게 만나고자 했던 것을 비틀어 버린 그가 원망스러웠다.

‘더군다나 발라 잎사귀까지 모조리 가져가 버리고…….’

그의 그런 지독한 행동까지 더해져 버리자 나는 기분이 싸늘하게 변해 가는 것을 느꼈다. 아론의 시선이 내게 쏟아지는 것을 느꼈지만 꿈쩍도 하지 않자, 오래지 않아 내 목에 와 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멈칫.

그 손은 내 목 중앙에 닿아 있었다. 손끝이 살결을 눌렀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이미 그가 들어올 때부터 서늘한 기운을 감지했던 나이다. 그런데 왜 그에게서 더욱 냉랭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일까. 피부에 소름이 돋은 것을 은연중 확인하면서 의아해하는데, 불현듯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마왕.’

그가 내 목에 잇자국을 냈다. 그 치사한 짓에 기분 나빠하며 아침 훈련할 때 스카프를 했던 나였다. 치료소에 누워 있으면서 스카프가 없어졌는데, 하필 이때, 아론이 내 목을 보고 말다니.

‘설마 펠하고 이랬다고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오해를 푼들 의미가 있을까. 그 대상이 마왕이라는 것을 알면 더욱 분노할 그였다. 나는 눈을 더 뜰 수가 없었다. 현실을 모른 척하고 싶어졌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 아론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지 여전히 냉기를 뿜어내는 채로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노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관계를 정의할 시간을 준 동안에도 남자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내게 분노해서…….

이윽고 그가 걸어나가는 소리가 났다.

“어머, 아론나이드 경. 이제 가시는 거예요? ……어? 아론나이드 경?”

친절함으로 가득한 사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론은 대답 없이 나가 버린 모양이었고, 사제는 놀랐는지 ‘왜 저리 화가 나셨지?’ 하는 소리를 들리게끔 중얼거렸다. 이윽고 사제가 내가 있는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 상태를 확인하고는 ‘달라진 건 없는데.’하고 중얼거리고는 제 볼일을 보러 나가 버렸다.

나는 그녀가 나가고 나자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떴는데도 흐릿한 시야에 마치 안개 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막막했다. 현실을 보고 있는데도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진 기분. 머리까지 지끈거려 오는 느낌에 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카란이었다. 그는 내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고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내 얼굴색을 확인하고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젊은 사람이 혈색이 그게 뭔가.”

“잠을 못 자서요.”

“혹시 레베카 때문에?”

“설마요.”

그녀는 생각도 못 했다. 내가 한숨 쉬며 고개를 젓자 카란이 다행이란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신경 쓰지 않는다니 정말 다행이군. 밖에서 치료 사제가 자네 몸에 회복되지 않은 상처가 있다고 했어. 혹시 그 때문에 그런 건가?”

고개를 저으려던 나는 구구절절 변명이 귀찮아질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카란은 혀를 쯧쯧 찼다.

“젊은 사람이 몸의 회복력을 너무 과대평가하면 큰일이 일어날 수 있어. 좀 더 제 몸을 아끼고 돌보게. 싸우는 자에겐 결국 몸이 전부이니까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치료 사제는 회복을 위해 내일까지 쉬어야 한다고 말하더군. 일주일 안정을 취하면 완전히 나을 거라고 했고.”

그 말을 하는 카란의 표정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럴…… 여유가 없는 거군요?”

“어제 등장한 마물이나 마족들이 모두 난폭하기 짝이 없어.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무자비하게 공격해 왔지. 그들이 내뿜는 마기는 생명이란 것을 모조리 죽이려고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를 산산조각 내려 하더군.”

카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생전에 이런 마기의 발현은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마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어.”

나는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마왕, 그의 상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상부에선 이게 다 신성국의 저항이 거세서 마계가 발광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카란은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며 미간을 좁혔다. 나는 카란의 추측이 좀 더 정확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말해 줄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걱정이 되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본대의 피해가 큰 건가요?”

“아무래도. 예전에 세웠던 작전들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어제 전투로 전투에 참여한 성기사 반이 죽고 소환사 일부가 크게 다쳤네. 여기 치료소는 본대 안이라서 그나마 조용하지만, 전투가 일어났던 곳에 세워진 임시 치료소는 전쟁터에 가까워. 다친 이들이 워낙 많으니까…….”

카란의 미간이 더욱 좁혀들었다. 씁쓸해진 눈빛으로 그는 겨우겨우 말하는 듯했다.

“이번이 첫 전투인 소환사도 있었어.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청년이었는데 말이야…….”

“…….”

“자네도 알다시피 소환사가 요새 보조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경험이 미숙한 자를 넣어도 된다고 판단한 것도 있어. 생각해 보면 마족들에겐 여전히 소환사는 먼저 죽여야 할 목표인데 말이야. 우리가 너무 우리 위주로만 생각해 미숙한 자들을 투입하다 보니 쉽게 마족의 목표물이 되고 만 것이지.”

카란은 제 책임이란 듯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짙은 후회와 죄책감에 휩싸여 있는 그를 보니 나는 괜히 가슴 한구석이 시려 왔다. 전투로 내몬 것은 그가 한 것이 아니다. 엄연히 그 젊은이가 소환사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맞닥뜨려야 하는 미래였지만 카란은 상관으로서, 선배로서, 책임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카란은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환사에 대한 보호가 더 확실히 이루어져야 해. 우린 직접 공격이 아닌 간접 공격을 위주로 훈련된 자들이니까. 성기사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야.”

카란은 의지를 담은 눈으로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 공작 각하께 그 부분에 대해 직접 말씀을 드려 볼 생각이네.”

카란은 또박또박 말했다.

“소환사는 마물을 청소하는 청소부의 일원이 아니라, 마물과 싸우는 전사의 일원으로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이야.”

카란은 강조했다.

“성기사가 보호를 해야지, 성기사를 보조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그분께요? 상부가 아니라?”

“상부에는 말을 해도 형식적인 대답만 돌아와. 위에서 원하는 게 아니라고. 결국 신성국의 전체적인 틀이나 방향을 정하는 분은 제일 높으신 그분이시니까. 하지만 과연 그분께 누가 건의를 드릴 수 있겠나. 공작 각하라면 가능하겠지.”

카란이 그 때문에 공작의 안내를 선뜻 맡아서 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카란은 정치적인 인물이 아닌데도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카란이 같은 소환사들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보며 내심 무척 감탄했다. 그는 편안하게 문서 작업만 해도 되었다. 굳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무난하게 지낼 수 있는데…….

나는 그의 눈에 반짝거리고 있는 선한 의지를 읽으면서 천천히 물었다.

“그런데 제 도움이 필요하신 건가요?”

“공작 각하를 설득하려면 소환사가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 줄 필요가 있으니까. 자네가 선두에서 신성력을 뿜어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생각이 달라질 걸세.”

나는 강한 신성력을 갖고 있지도, 남다른 무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외양이 보기 좋고, 자태가 바르다는 점 때문에 선두에 서곤 했다. 그 역할이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카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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