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96화 (96/220)

96.

동료를 부르는 듯한 소리에 나는 사색이 되어 얼른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몇 발짝 못 가서 쓰러졌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기어서라도 움직이려 했다. 이 무서운 세계에서, 나란 존재를 아무렇지 않게 삼켜 버릴 험악한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손으로 흙과 풀을 부여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쿵.

짓이겨진 풀 냄새와 흙냄새가 코를 찔러 왔을 때였다. 오싹한 기분과 함께 무거운 무언가가 땅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흐릿한 시야에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의 숨소리는 거대했다.

뜨거운 김. 무언가 썩어 가는 짐승 같은 냄새가 그 흐릿한 기운 너머로 몰려오자 나는 콧등을 찡그리고 말았다. 쿵쿵, 대지가 떨렸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을 때 다가온 그것의 형태가 보였다. 마치 거대한 애벌레에 갖가지 눈을 붙여 넣은 듯한 형태.

나는 소리 없이 기겁했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수십 개의 눈알로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포식자의 호기심이 들어 있었다. 눈을 세로로 깜박거릴 때 들려오는 소리가 이질적이었다. 나는 얼어붙어 있던 손을 아주 천천히 들었고, 본능적으로 내가 가진 힘을 발휘하려고 했다. 벌레의 눈이 묘하다는 듯이 껌벅거렸을 때, 수십 개의 그림자가 벌레 위를 덮었다.

활시위의 소리. 거미들이 몰려와 있었다. 동료 거미의 도움 요청을 들은 거미들은 이미 흥분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아닌 더 거대한 포식자에게 달려들었다. 거미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두꺼운 실을 뽑아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금세 애벌레의 거대한 몸은 칭칭 감은 실로 휘감겼다. 애벌레는 꿈쩍도 할 수 없어 보였다. 그러나 승리를 자축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전에 애벌레를 감은 실이 폭발하듯이 터졌다.

눈알에서는 거무스레한 액체가 터져 나왔다. 액체가 터져 나올 때마다 실이 부서지고 거미의 피부가 지글거렸다. 눈알의 액체는 강력했다. 거미의 날개에 액체가 튀어 구멍이 생기자 거미들은 속절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늘을 날고 있다는 이점이 사라져 버린 거미들은 흥분해서 애벌레에게 달려들었다. 애벌레는 육중하고 끔찍한 몸을 쿵쿵 움직이며 달려드는 거미들을 그대로 깔아뭉갰다. 애벌레의 눈알에서 검은 독액이 튀어 거미들의 껍질을 녹이는 동안, 거미들은 날개를 퍼덕거리며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곧 애벌레의 발아래 거미들의 시체가 쌓이고, 거미줄에 엉긴 눈알들은 거미 꽁무니에 붙어 다녔다.

‘이, 이럴 때가 아니야.’

멍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무릎을 땅에 대었다. 어지럼증이 올라왔지만 두 괴물이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달아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에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들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호흡이 가빠졌지만 반대로 구역감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한참을 달렸다. 구불구불한 숲길은 때때로 녹색이었고, 핏빛이기도 했다. 흙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길을 한참 달리다 이상하게 생긴 굵은 나무뿌리가 앞을 막았을 때, 나는 그제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따돌렸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서움이 가시는 동시에 새로운 불안감이 떠올랐다. 과연 이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떻게 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존을 떠올리자 단연코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신성력이었다.

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신성한 흰빛이었다. 그것은 내 목숨줄이었고 내 무기였다. 이 힘 덕분에 나는 험악한 괴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고, 잠시나마 괴물을 물리칠 수 있었다.

만약 차원의 문을 그릴 수 있다면 내 세계로 돌아가는 것도 완전히 헛된 꿈만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내 신성력이 차원의 문을 온전하게 열 만큼 충분치 않다는 것과, 그걸 해결할 만한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하루를 넘기면 죽게 된다.’

마왕의 말대로라면 나는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생명이란 초가 등불 앞에 놓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귀한 일분일초를 어떤 식으로 보내야 할지. 나는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

굵은 나무뿌리를 천천히 올려다보던 나는 풍성한 보라색 나무 끝에 주먹 크기의 동그란 빛이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경계하며 바라보고 있자 빛이 내게로 가까워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굳히며 손에 신성력을 집중했다.

빛은 아름다웠다. 보랏빛으로 빛나는가 싶더니 은빛으로도 빛났고, 때때로 화산이 폭발한 하늘처럼 자줏빛으로 빛났다. 해에 따라서 변하는 아름다운 비단처럼 반짝거리던 빛은 어느새 내 가슴 부근에까지 와서, 내 손에서 빛나는 신성력을 구경하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 빛에서 왠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숨을 진정시키며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빛이 누군가로 변해서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말레드레드를 지킬 거예요.’

청년은 눈이 부신 금발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가 말할 때마다 황금이 한 움큼씩 떨어지는 것처럼 황홀했다.

‘제가 반드시.’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그와 같은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것만 같다. 그 빛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넋을 잃었을 때 어느새 빛은 붉은 색깔로 변모했다. 그 빨간색은 이내 누군가의 눈동자가 되었고 그 뒤로 흑단의 물결치는 머리가 생겨났다.

‘그대를 원해.’

존재는 오만했고 압도적이었다. 주변을 압살해 버릴 기세로 상대를 점령했다.

‘그러니 영혼을 바쳐.’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처럼 말을 하는 남자. 마왕을 보면서 나는 두려움과 흥미를 동시에 느꼈다. 그가 하라는 대로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도 생겼다. 멍하니 그를 보고 있노라니 상대는 다시 검은빛으로 뭉쳤다가 누군가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녀는 나를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검은빛으로 이루어진 이계의 존재. 그녀는 차기 마왕 후보였으며 나를 눈엣가시처럼 미워하는 전형적인 마족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자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손발이 절로 떨려 왔고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그녀의 긴 손이 당장에 칼로 변해 내 목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무섭고 참혹한 존재였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들었다. 살고 싶었다. 살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나를 죽이려는 존재에 맞서서 무릎 꿇지 않아야 했다. 나는 그녀만큼 강하지 않았지만, 살고자 하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었다.

내가 가진 장점이라고 한다면 장점일 것이다. 바로 생에 대한 집착이자 집념……. 본능과도 같은 그 욕구가 나로 하여금 다시 흰빛을 끌어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이 환하게 빛나며, 나는 어느 순간 거대한 고목 뿌리에 휘감겨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으, 으으으……!”

내 몸을 옥죄고 있는 나무뿌리는 엄청난 압력을 선사했다. 나는 온몸의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압력이 가해지고 있음을 왜 몰랐을까.

나는 그 이유를 내 앞에서 빛나고 있는 동그란 꽃에서 발견했다. 그 꽃은 이빨이 있었고 눈을 가지고 있었다. 파충류의 눈처럼 뾰족한 동공을 연신 파르르 떨며 나를 향해 사나운 입질을 했다. 마치 나 때문에 제가 더 괴롭다는 듯이.

‘아, 신성력 때문에!’

나는 그제야 그것이 내가 뿜고 있는 미약한 빛에 발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꽁꽁 묶여 있는 상태로 손에서 빛을 희미하게나 발하고 있었고, 그 빛을 더 키우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집중했다.

크아아아.

그러자 나무가 기이한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나무 기둥을 비틀었다.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트는 나무를 보면서, 나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내 몸을 옥죄던 압박이 느슨해지자 나는 신성력이 배인 손으로 꽃줄기를 턱 꺾었다. 의외로 아주 쉽게 꽃은 꺾였고 꽃이 비명을 지르며 이빨을 덜덜 떨었다. 나는 꽃을 쥔 채로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질 수 있었다.

‘으, 윽…….’

높은 데서 떨어진 만큼 온몸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훨씬 컸다. 안 그래도 꽁꽁 조였던 몸이라서 그런지 더욱 아팠고, 더욱 욱신거렸다. 나는 한동안 허리를 구부린 채로 소리 없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느라 움직이지 못했다.

과연 내가 살아날 수 있을까. 미약한 인간 주제에 너무 큰 꿈을 가진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때 손에 쥔 무언가가 부르르 떨리며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무슨 일인지 보았다. 꽃이었다. 꽃은 어느새 꽃봉오리처럼 오므라든 상태였고, 그 아래 커다란 보랏빛 씨앗 하나가 있었다.

‘죽은 건가……?’

거대한 생명체의 죽음이란 뜻밖에도 아주 간단한 법이다. 나는 내 앞으로 거대한 나무가 비틀린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손 안에 남은 씨앗 하나. 이 괴생명체가 결국 씨앗을 남기고 죽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

나는 꽃 씨앗이 내 손으로 파고드는 것을 보았다. 신성력을 급하게 뿜었지만 씨앗은 내 손에 징그러운 녹색 줄기를 뻗으며 손에서 손목, 팔까지 잠식해 가기 시작했다.

‘다, 다시 살아나는 거야?’

나는 기겁해서 손에 번식하는 걸 막으려고 했지만 가능하지 않았다. 나를 자신이 자라나는 생명의 토대로 삼겠다는 듯이, 무섭게 번져 나가는 나무줄기를 보며 새하얗게 얼어붙었을 때,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왕. 그는 여느 때보다 창백해 보였다. 걷는 것이 어쩐지 힘들어 보이는 그를 보며 멈칫했을 때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 살아 있었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이런 곳으로 보낸 게 당신인지 따져 묻고 싶었다. 나를 죽이려면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을 터였는데, 왜? 그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대의 손에 있는 회라바라의 씨앗은 이제 마계에서 몇 남지 않은 아주 귀중한 나무의 열매야.”

마왕은 내 손에서 번지고 있는 나무줄기를 쳐다보았다.

“회라바라가 다 자라면 그 나무는 이 마계의 대지를 비옥하게 해 준다. 마계에 어울리지 않는 시체나 생명을 먹어 치워 그 양분을 다시 대지에게 돌려주게 되지. 마계가 번성하고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그의 어조는 지극히 다정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