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95화 (95/220)

95.

“모두 늦게까지 수고 많았네.”

일이 다 끝났을 무렵엔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카란은 밤새 지시하느라 컬컬해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들어가는 대로 바로 자고, 훈련 시간에 늦지 말도록.”

그는 짤막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그대로 흩어졌겠지만 나는 카란의 눈길이 나를 유심히 보는 것을 느꼈다. 심상치 않다는 느낌에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지난번 마족의 공격이 묘했다고 말한 걸 기억하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했다.

“그래, 기억하고 있군. 마족의 공격이 매우 소극적이며 목적이 인간을 공격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 그 점이 의아해서 지휘관들끼리 모여 의논해 보았지. 결국 제대로 결론이 나지 않아서 중앙에 견해를 요청했네. 그러자 의외로 금방 답이 돌아왔지.”

카란은 목소리를 신중하게 낮췄다.

“이런 일이 제국 전역에서 벌어졌다는 거야. 우리 때처럼 마족 하나가 수십 마리의 공 마물을 데리고 나타나서 대지를 망가뜨리는 거지. 그래서 사제들을 급파하면 그들과 싸우다가 공 마물들은 대부분 죽어 버리고 마족은 유유히 사라지는 일이 말이야.”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요?”

내 말에 카란이 끄덕였다.

“그래, 자네도 이상하단 느낌이 들지? 나도 이상하다고 의견을 말했네만, 지휘관 중에서도 별거 아닐 거라는 말들이 나와서 말이야. 그냥 마족의 괴상한 전투의 하나일 뿐이라고 취급하더군.”

카란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앙에서는요?”

“중앙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마족들이 평상시 우리 세계에 자행하는 끔찍한 학살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반응하더군.”

“아…….”

나는 아쉽다는 듯이 반응했다. 카란은 내 반응이 조금 반가운 티를 내면서도 눈을 흘겨 떴다.

“자네처럼 반응한 사람도 있었어. 바로 젊은 지휘관, 아론나이드는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더군!”

“…….”

“그는 참, 젊은 나이답지 않게 신중하단 말이야. 현상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눈도 무척 예리하지.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지켜보았네만, 확실히 남달라. 어떻게 상황을 주도해 가야 하는지, 전투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선천적으로 알아보는 감이 있다고 해야 하나?”

나는 움찔했다. 최근 나를 대하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그 나이답지 않은 날카로운 통찰력은 그의 큰 자산이자 무기가 될 것이야. 이미 중앙에서는 그 장점을 알아보고 그를 데려가려 안달 나 있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던 카란은 멈칫했다.

“아니, 그의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지.”

카란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주제로 돌아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됐든 유명한 기사가 그렇게 말하니 다른 지휘관들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려는 분위기였네. 문제는 공 마물이 그렇게 사라지고 난 뒤 다시 출현하지 않았다는 거야. 때마침 제국 곳곳에선 다시 강력한 마물이 출몰하고, 부대마다 사제들이 부족할 지경이 되고 말았어. 단 며칠 만에 말이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물이 강력해진다면 사제들은 모두 바빠진다. 아론 같은 핵심 인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출몰하는 마물을 없애고, 마족을 쫓아내고 마계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다른 지역에까지 지원을 나가야 했다.

오히려 아론이 이런 가운데에서도 나를 꼬박꼬박 찾아오는 것이 굉장할 따름이었다.

‘잠도 줄여 가면서 오는 거겠지?’

며칠간 새벽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고 탐하는 그 때문에 피곤한 건 나였으며 지쳐가는 건 내 정신이었다. 아론은 오히려 분노와 배신을 연료 삼아 더욱 힘이 난 것처럼 나를 탐했고 오랫동안 내 몸 안에 머무르려 했다. 저라는 존재를 내 몸 안에 각인시키지 않고서는 떠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가지고 또 가졌다.

‘임신이라도 정말 시키려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내일은 발라 잎사귀를 먹어야 한다. 나는 눈앞의 카란에게 부탁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민망한 걸 무릅쓰고 부탁하면, 상관인 그에게는 어떻게든 구해다 줄 방법이 있을 테니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다시 공 마물을 조사하자는 이야기는 쏙 들어갔어. 눈앞에 닥친 위기가 있으니까 지나간 전투는 보이지 않는 거지. 그래서 말이야, 말레드레드.”

카란이 드디어 본심을 이야기하려는지 눈빛이 빛났다.

“자네가 사람들을 안심시킨다는 명목으로 조사를 하면 어떻겠나. 이미 자네는 시찰단을 훌륭하게 수행한 경험이 있잖아. 시찰단으로 자네가 간다고 하면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거야.”

카란은 믿음직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국 전역에 공 마물이 습격한 곳을 모두 조사하러 다닐 순 없겠지. 우리 본대에서 멀지 않은 지역으로 가는 거야. 벨, 노트담, 솔즈베리, 그리고 어디냐……. 그래. 헤르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나?”

나는 머뭇거렸다. 그의 의도는 지금 나를 선두로 하여 시찰단 명목인 조사단을 파견하고 싶다는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시찰단 파견은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와야 가능한 거잖아요?”

“그렇지. 아마 조만간 내려올 거야. 마족들이 자주 출몰하는 일로 도시마다 사람들의 불안이 커진 상태니까. 가까운 벨에서는 도적들이 들끓어서 성기사들이 그들을 소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들었어. 그래서 시찰단이 조만간 파견될 거라고 자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마물을 조사하고 다니는 일은 지금의 정화 작업보다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본대를 갑자기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 심란함을 야기한 자는 아론이었고, 마왕이었다. 내 생활 근간에서 자꾸 나를 들쑤시는 두 존재 때문에 나는 곤란했고 또 착잡했다.

“……지금은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요.”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채 떠나는 건 좋지 않았다. 마왕이나 아론이나 내가 어떤 장소에 있든 따라올 존재였다. 내가 몸을 피하면 오히려 더욱 큰 문제를 야기하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야 했다.

“어, 그래?”

카란은 다소 의외란 듯이 대꾸했다.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는 멈칫했다가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유를 설명했다.

“요 며칠 무척 어두운 얼굴이라서. 이곳에서 안 좋은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카란은 은밀하게 내 표정을 살폈다.

“여자 때문이 아닌가 했는데 말이야.”

“여자요……?”

남자가 아닌 여자가 왜 나온 걸까. 내가 멈칫해서 되묻자 카란이 도리어 움찔했다.

“이런, 몰랐나? 몰랐으면 됐어. 알아 봤자 착잡해질 일이니까.”

“무슨 일인데요?”

“으음, 레베카 말이야.”

“…….”

“듣기론 자네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어. 뭐, 안 좋은 이야기라고 해도 그냥 자네의 신분을 말하고 다닌다는 거지만, 어찌 됐든 그녀가 떠들 일은 아니니까.”

레베카 공녀. 그녀가 내가 사생아임을 떠들고 다닌다는 건가? 나는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내 평판을 저해하면 아론이 그녀에게 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기분이 상해서 표정을 굳혔다. 카란이 미안했는지 얼른 이렇게 위로해 왔다.

“사제들은 딱히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상관들도 마찬가지지. 신성국의 기조가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자는 중용한다, 가 아니었나. 그러니까 자네는 그런 면에서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 자네의 신성력 변형 능력은 매우 우수하니까. 내 소환사 인생에 자네처럼 변형을 잘하는 자는 없었다고 장담하지.”

카란의 칭찬은 왜인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아마도 오늘은 마왕이 나를 부르겠지. 마왕에게 가서 대답을 해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

“우윽…….”

나는 구역질이 나서 앞으로 몸을 수그렸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손발이 떨려 왔다. 이게 무슨 경우일까. 결국 배 속이 꼬인 것처럼 아파 오자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투명한 위액을 쏟으며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

몇 분이 흘렀을까.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여전히 역한 토기가 올라왔고 머리는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내 몸이 왜 이럴까. 가만히 그렇게 생각하며 보고 있으니 점차 뿌연 시야가 명확해졌다.

우후죽순 자라난 기이하고 괴상한 나무, 하얗고 검은, 모순적인 색의 덤불, 이빨이 달린 꽃과 벌레를 달고 있는 나비.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요정과 하얀 빛의 커다란 눈알 동물을 보면서 나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곳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아니다.

‘……마계.’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마왕이 대체 나를 어디에 소환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괴롭고 고통스러운 몸을 추스르려 했다. 내가 간신히 옆에 있던 덩굴처럼 굽어진 나무를 잡고 일어섰을 때, 갑자기 나뭇잎들이 뾰족하고 길게 늘어져 내 팔을 칭칭 감아 왔다.

나는 그 아픔에 새된 비명을 지르며 신성력을 발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나뭇잎들을 모두 잘라 버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둥글고 커다란 거미, 나비처럼 큰 날개를 가진 거미의 다리였다.

“읏……!”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거미는 나를 보더니 몸을 돌려 꽁무니에서 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실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거미줄과는 달랐다. 밧줄처럼 두꺼웠고 리본처럼 화려했다. 그것이 내 팔을 칭칭 감더니 나를 확 잡아끌었다.

“흑!”

실에서는 둔한 아픔이 느껴졌다. 단순히 팔을 조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렇게 먹이를 기절시키는지 머리가 어질거리자 나는 서둘러 어금니를 꽉 깨물고 다른 팔로 신성력을 시전했다. 그러자 신성력이 시들시들 빠져나와 거미줄을 녹였다.

온전치 않은 신성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영향이 있는지, 거미가 기겁하며 잡아끌던 것을 관두었다. 그러더니 더듬이를 비벼 활시위가 비벼지는 듯한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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