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82화 (82/220)

82.

“무, 무슨……!”

그녀는 낯을 붉히며 반격해 왔다.

“그건 하나의 공격 전법이라고요! 기사가 아니라서 이런 쪽에 문외한인가 본데, 마물의 시야를 피해서 뒤를 가격하는 방법은 아주 영리하면서도 노련한 타격 방법이에요!”

그녀는 나를 노려보면서도 동시에 낮잡아 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뭘 알겠어요. 그저 마물로 더러워진 장화를 정화시키는 방법밖에 모르는 소환사인데.”

레베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 말투가 순진무구한 듯 들려도,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그녀는 어리석지 않다. 어느새 미소가 사라진 얼굴에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적의만 서려 있다. 그녀는 말없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네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냔 듯이, 나를 질책하는 눈으로.

“……내 충고 무시하지 말아요.”

그녀는 작게 덧붙였다.

“발붙일 곳 없는 사생아라면 더더욱.”

그리고 휙 돌아선 그녀는 기다리고 있는 성기사 무리에게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들을 만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니 역시 만만찮은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사생아라는 비난은 내게 더 이상 새롭지 못하다. 진부한 소리를 내뱉는 그녀에게 반사적으로 울컥하는 마음이 치솟았으나 그것도 잠시, 쌓여 있는 마물 시체와 더러워진 땅을 보자 내가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나는 묵묵히 지팡이를 들었다.

***

그날 밤, 나는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레베카 때문은 아니었다. 잠을 설치게 만든 원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마왕, 나와 비밀스러운 관계에 있는 초월자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남긴 자국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그는 왜 유희 상대에 불과한 나에게 집착할까. 왜 그토록 이 관계를 이어 가고 싶어 하는 걸까. 수하들에게 화를 내고, 공격 명령을 축소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나를 살려가면서.

솔직히 내가 전략적이나 전술적으로 공략할 가치가 있는 인간도 아니고, 신의 사제로서 엄청난 능력을 보유한 것도 아닌데.

‘설마 나라는 인간을 애정……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정이란 말은 인간 사이에서나 통용될 말이었다. 수십 세기를 살아가면서 세상을 지배하는 영속적인 초월자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생이 짧고 유한한 우리 인간과 달리,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유한한 존재를 사랑하는 건 그 자신을 죽이는 맹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실의 고통이 늘 반복된다고 생각해 보라. 어떤 초월자도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며 멀쩡하게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한 존재가 영원의 세월을 살아가려면, 타자(他者)와의 관계나 감정에 대해 무감하거나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태어날 수밖에 없다. 신과 마왕이 후계자를 둘 뿐, 누군가를 배우자로 삼거나 두지 않는 것을 보건대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렇다면, 내가 유희의 상대이기 때문이겠지.’

나는 마왕이 흥미에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존재가 주는 육체적인 흥미와 그에 따른 정신적인 만족감이 나를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떠난다는 말에 흥분한 것이겠지. 유희를 나누는 상대에 불과한 인간이 감히 제 의사를 반하고 사라지는 거니까.

‘그렇다면 그가 나를 버리게 만들어야 할까?’

나는 멈칫했다. 마왕이 나를 더 이상 흥미 없어 할 방법. 그게 뭐가 있을까?

그의 앞에서 신성력이라도 뿜어내며 축복의 노래라도 불러야 할까? 아니면 사제복을 입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춤이라도 춘다든지. 뭘 하든 간에 마왕에게는 죽음을 재촉하는 성스러운 광녀처럼 보일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늦게 잠이 들었고, 몇 시간 후 나팔 소리가 아침을 알리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잠을 적게 잔 탓에 훈련소에서 기운차게 움직이기 힘들었다. 나는 일부러 기합을 넣어 가며 가슴 속에서 온기를 끌어모아 신성력을 변형하는 훈련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신성력 크기를 키우라고 했던 감독관도 내가 그 부분에 있어 성과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자, 응용하는 데 힘쓰란 듯이 지켜만 보고 있는 실정이었다.

“신기하군.”

내가 신성력을 뽑아서 리본처럼 길게 늘어뜨리자 감독관이 작게 감탄했다. 나는 이것을 밧줄처럼 마물을 잡는 데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 신성력을 뿜어 마물을 공격해 피해를 입히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만약 피해를 주면서 잡아 둘 수 있기까지 하다면 싸움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말레드레드, 오후엔 작전 보조를 하게 될 거야.”

훈련을 끝내고 카란의 천막에 가자 그가 할 일을 말해 왔다. 나는 그 표현이 낯설어서 다시 물었다.

“보조요?”

“그래. 지원이 아니라 보조. 성기사들이 마물을 처리하고 나면 그 시체를 치우는 일을 맡게 될 거야.”

“…….”

카란의 미간은 잔뜩 좁혀져 있었다.

“기사들이 늘어나니까 그들 중심으로 작전이 전개되고 있어. 각 팀에 배치할 만큼 소환사가 충분히 있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레 소탕보다 소거에 집중하게 되고, 점점 그게 편하다는 기사들이 늘어나고 있지.”

나는 카란이 불만스럽게 말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보통 마물 소탕이란 성기사와 소환사의 협동으로 이뤄지는데, 현재는 성기사가 주가 되어 마물을 난자한 뒤, 소환사가 그 시체를 처리하고 땅을 정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소환사로서 오래 싸워 왔던 그는 이 상황이 매우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구시렁거렸다.

“마물을 왜 굳이 마계로 돌려보내는지 아나? 그건 단순히 마계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야. 돌려보낸다는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지.”

카란은 눈을 날카롭게 뜨며 예리한 분석의 말을 늘어놓았다.

“마물의 시체는 마계에서도 골칫거리가 분명하거든? 우리가 해마다 잡는 마물이 얼마나 많은지 떠올려 봐. 그 수북한 시체, 가득한 마물의 거죽은 마계에서도 분명 처리하기 곤란한 문제일 거란 말이야. 그런데 높으신 분들은 그저 우리가 마물과 싸워 이긴 횟수만 중요하다고 하니.”

카란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답답할 노릇이지.”

“……그럼, 앞으론 시체 처리 일을 주로 맡게 될까요?”

“큰 작전이면 소환사에게 소환의 영역을 그리라 하겠지만, 지금처럼 마물 숫자가 적은 전투에선…….”

카란은 안쓰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한동안 그러게 될 거야.”

“……그렇군요.”

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사실 에레나가 나타난 이후로 몰려오는 마물의 숫자는 급격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나는 이게 마왕의 덕분인지, 아니면 에레나라는 마족이 알아서 공격을 포기했기 때문인지 궁금해졌다.

‘그녀가 마왕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고 있을 마족은 아닌 것 같은데.’

인간미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검은 눈동자를 떠올린 나는, 소름이 오싹 돋아 어깨를 움츠렸다. 서둘러 나가려는데, 카란이 나를 불러세웠다.

“그런데 자네. 특정 성기사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네?”

당황했다. 설마 아론과 나의 관계가 알려진 걸까. 굳어진 채 카란을 보자 그가 곤란하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아니. 불만이 접수되어서. 자네가 정화 작업을 하면서 무례하게 굴었다고.”

나는 순간적으로 특정 성기사가 아론이 아니라 레베카를 말하는 것임을 알고 안도했다.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딱히 무례하게 굴었다고 생각할 만한 일은 안 했는데요.”

“나도 보고서를 읽어 봤지. 자네가 공격하는 것처럼 신성력을 날렸다고 하던데.”

나는 살짝 웃었다.

“정화 작업이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화 작업을 하지 않는 분들의 입장에선 거칠고 삭막한 일이니까요.”

“흐음.”

나는 지금 레베카가 정화 작업을 하지 않고 떠났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그녀의 불성실한 작업 행태를 이르자 카란이 눈매를 좁혔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가 보겠습니다.”

“말레드레드.”

나가려는데, 카란이 다시 나를 불렀다.

“자네는 영리해. 쉽게 좌절하는 성격도 아니고.”

칭찬일까? 카란의 말은 늘 어딘가를 찌르는 가시 같은 부분이 있어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다. 카란은 나를 깊게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적을 만들면 곤란해져. 적당히 물러나지 않고 상대를 도발하며 화를 키우니까.”

레베카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나의 타고난 성정을 일컫는 걸까. 무엇이 됐든 카란은 예감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이어 갔다.

“무난하게 살려면 져 주게. 어차피 다가오는 적들을 모두 이길 수 없으니까.”

“……말씀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말하고 천막을 나왔다. 하늘은 구름이 껴서 어두웠고 덥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 속에 축축한 습기를 느꼈을 때, 어느덧 한 방울씩 비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물이 옵니다!”

빗발이 굵어졌을 때, 나는 성기사 무리 뒤쪽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분명 보조를 하려고 왔는데, 쏟아지는 빗속에서 마물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은지 여기저기서 지원을 외치고 있었다.

“으악!”

“벨로!”

성기사 하나가 마물이 휘두른 방망이 같은 팔에 나가떨어지자, 다른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기사도 마물의 다리에 맞아서 멀찍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컥!”

“이런, 3팀에 5, 6팀 지원!”

지휘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지시에 다른 곳에서 마물을 상대하고 있던 기사 6명이 달려오려고 했으나, 그 앞을 거대한 마물이 가로막자 어쩔 수 없이 그 마물부터 상대해야 했다.

“사, 살려…….”

동료들이 오지 못하자 쓰러진 기사 두 명이 다가오는 마물을 보며 질겁했다. 창백해진 그들의 얼굴 위로 물줄기가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물의 날카로운 이빨이 그들의 목을 향했을 때,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어 나는 아까 연습했던 신성력을 뿜어냈다.

파악.

달빛처럼 환한 빛을 뿜는 신성력 리본은 그대로 마물의 몸을 옥죄어 갔다. 신성력을 사용해 묶은 것인데, 마물은 그것만으로도 괴로워하며 울부짖었다. 나는 그사이에 쓰러진 기사에게 달려갔고, 그의 팔을 붙잡아 치료 사제에게 데려갈 수 있었다.

문제는 아예 의식을 잃고 쓰러진 기사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내 신성력 리본을 끊고 마물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1팀, 어서 지원해!”

지휘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는 마물이 휘두르는 공격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는 피하지 못해 공격이 내 살갗을 스쳤고, 거기서 울컥, 하고 피가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고여 지저분해진 흙바닥 위를 기어가다시피 움직였고, 내가 있던 자리에 마물의 공격이 위협적으로 꽂히는 소리를 들었다.

“1팀!”

지휘관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마물의 사악한 숨소리, 분노한 눈빛, 끔찍한 마기를 느끼면서 공포에 몸이 얼었을 때, 나는 1팀의 기사가 내 쪽을 보는 것을 느꼈다.

레베카. 그녀는 나를 보았다가 곧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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