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81화 (81/220)

81.

“몸이 좀 추워서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나였다. 레너드는 보통 사제라면 잘 하지 않는 스카프를 신기해하며 말했다.

“그런데 잘 어울려요. 뭐랄까, 어색한 것도 말레드레드가 하면 원래 유행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요?”

“……다행이네요.”

실은 목에 난 마왕의 손자국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레너드의 긍정적인 해석에 안심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가만히 스카프에 손을 올리며 이 흔적이 빨리 사라지기만을 빌었다.

그때 한쪽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그곳에는 기사들이 몰려들어 있었는데, 투구를 쓴 기사단장이 기사 하나와 대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싸우는 동안 대검들이 현란하게 움직였고, 기사단장이 압도적인 검술을 자랑하는 가운데, 늘씬한 기사도 잘 따라오며 방어하는 듯 보였다.

전체적으로 싸움은 위협적인 느낌보다 마치 가르쳐 주려는 지도의 느낌에 가까워서, 내가 멈칫했을 때 레너드가 부럽다는 듯이 설명해 왔다.

“기사단장께서 특별히 훈련시켜 주시는 거예요. 레베카를 많이 아끼시죠.”

공녀 출신의 성기사를 제도와 격식에 엄격한 기사단장이 아낀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마물과 싸우려 하는 고귀한 여성이 그의 입장에서 어떻게 예쁘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그녀가 나태하지 않고 검과 훈련에 열정적인 면모를 보이는 성향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누구든 지휘관으로서, 검술 선배로서 그녀를 아끼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레너드가 주위를 살폈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이야기를 이어 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에겐 많은 특권이 허용되어 있는 편이에요.”

“특권이요?”

내가 멈칫해 질문하자 레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이라도 시종을 데려올 수 없는데, 그녀는 데려왔거든요. 그것도 자신이 직접 고른 숙소에 말이에요. 그녀의 숙소가 지휘관들의 숙소와 가깝다는 건 말한 적 있나요? 아무튼 그녀는 옷과 식사도 일반 성기사들의 것이 아닌 상등품의 품질로 따로 지급받고요, 외출도 일반 기사들보다 쉽게 할 수 있어요.”

레너드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공작가에도 주기적으로 연락하고 있고요. 공작께서 걱정이 무척 많으신 편이라, 연락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바로 상관에게 연락하신다고 해요. 상관이 불편을 한 번 토로했을 정도로요.”

레너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귀족 생활의 편의나 특권은 쉽게 저버리기 어렵죠. 그녀는 귀족 중에서도 아주 높은 신분이니까요.”

“레베카 공녀…….”

나는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과 배경을 중얼거렸다. 레너드는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아론나이드가 더 신기하다니까요. 태생으로 치면 아론나이드가 더욱 고결한데도 우리와 똑같이 생활하는 데 스스럼이 없는 걸 보면요. 저조차도 가끔은 옛날이 그리워지면서 향기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비단 이불에 쓰러지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레너드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아론나이드는 이 본대의 작은 숙소에 지극히 만족하는 것 같아서요. 수도로 가면 분명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데도 떠나지 않는 걸 보면 말이죠. 정말 신기해요.”

레너드는 금발의 사내를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단순히 아론나이드가 황족 출신이라는 것만 안다면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나는, 아론이 더러운 옷을 입은 채로도 아무런 불평이 없다는 것도 알고, 마른 빵과 맛없는 우유를 먹으면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내가 주는 쿠키 하나에 감격한 눈을 일렁이던 아이. 차별과 박대, 궁핍함을 알고 있던 소년은 홀로 섬에 떨어지면서 생존과 적응의 의미마저 완벽하게 터득해 버렸다. 그런 그가 이런 본대를 불편해하리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가 이 본대를 떠나지 않는 궁극적인 이유는 나란 존재에 있다고 하더라도.

“……후우, 수고하셨습니다!”

이윽고 레베카의 대검이 지쳐서 떨어지고, 활기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투구를 벗은 기사단장이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눈빛을 한 채 격려하는 말이 들려왔다. 대충 정리하자면 자네도 수고했네, 실력이 많이 늘었어, 하는 칭찬의 내용이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잘 지도해 주신 덕분입니다, 하고 답해서 분위기를 한층 더 훈훈하게 만들었다.

다정한 두 사람을 보며 레너드를 비롯해 주위 사제들이 부러워하고 있을 때, 나는 우연히 고개를 돌린 레베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일부러 더욱 예쁘게 웃으면서 내게 목례를 했고, 레너드는 감탄하면서 ‘그녀와 따로 아는 사이인 거예요?’ 하고 묻기까지 했다.

나는 잘 모른다고 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나는 그녀의 차가운 눈에 주목하고 있었다. 나를 정말로 싫어한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눈을 보고 있노라니, 그녀가 얼마나 아론을 좋아하는지 반증이 되는 듯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미소 지었고, 기사단장을 비롯해 사제들의 시선은 곧 내게 쏠렸다. 그들은 아름다운 소환사의 진면목을 본 것처럼 감탄했고, 그것은 레베카를 발끈하게 만들었다.

곧 그녀가 보란 듯이 더 예쁘게 웃음을 짓자 사람들은 또다시 바삐 고개를 돌려 레베카에게 칭찬의 말을 했다. 그래서 내가 또 활짝 웃자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내 쪽으로 향하고…….

마침내 레너드가 얼굴을 붉히며 혼란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예쁜 분들이 자꾸 웃으니까 눈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지러울 정도로요.”

그의 말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사제들에게 쓸데없는 현기증을 선사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먼저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떼었다.

그 뒤 그녀가 어찌했는지 모르겠다. 이 의미 없는 미소 싸움에서 이겼다고 좋아했을 것 같지 않은데. 나는 그녀를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소박하게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우리는 그날 오후 같은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녀는 선두에서 마물을 향해 달려가는 열혈 기사는 아니었다. 침착하게 기회를 노렸다가 마물이 방심했을 때 뒤를 치는 타입이었다.

나는 그녀가 커다란 마물을 상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물은 앞쪽에서 몰려오는 기사들에게 독침을 뿜고 있었고, 몇몇은 방패를 든 채 그것을 힘겹게 막아서고 있었다.

“조심해!”

긴박한 경고가 연달아 들려오는 가운데, 그녀는 기사 하나가 마물의 뒤로 접근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물은 공격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기사가 마침내 바로 뒤로 가서 신성력을 피워 냈을 때, 마물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침을 뱉었다.

더러운 녹색 액체를 뒤집어쓴 기사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졌고, 마물이 만족해 다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는 그때를 노렸다는 듯이 마물에게 신성력이 배인 검을 휘둘렀다. 마물은 괴성을 지르며 엎어졌고 그녀는 더욱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앞쪽에 있던 성기사들도 금세 그녀와 협력하여 마물을 찔러 댔다.

커다란 마물은 그렇게 죽었다. 나는 그녀가 동료들과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희생인지 제물인지 모르겠지만 다친 성기사를 안쓰러워하는 모습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승리에 도취되어 동료들과 환호의 미소를 지었을 뿐.

곧 마물 시체를 소거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근래의 전투에선 마물을 소환 영역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 죽인 뒤 정화하는 작업이 주를 이뤘다. 본대의 성기사 숫자가 많아지면서, 아무래도 작전의 방향을 소탕이 아닌 소거에 맞춘 탓이다.

나는 지팡이에 기운을 피워 냈다. 마물의 조각난 시체를 소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곧 내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정화 작업은 잘되어 가고 있어요?”

레베카였다. 그녀는 소위 예의 바른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잠깐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밤이 되기 전엔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군요. 꾸물거리지 않으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을 텐데.”

그 말은 내가 게으르다고 타박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발 좀 치워 주세요.”

그녀가 정화해야 할 땅을 밟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인데,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요구해 왔다.

“제 장화에도 신성력을 부어 주시겠어요? 보다시피 전 전투에서 신성력을 많이 소모한 터라 정화 작업할 기운이 나지 않네요.”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도도했고, 태연했으며, 자신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기꺼이 있다는 듯이 날 보고 있었다.

보통 신고 있는 채로 장화를 정화하려면 지팡이를 아주 가깝게 대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녀의 앞에서 허리를 숙이다시피 해 정화 작업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는 대신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지팡이에 온기를 집중했다.

어느새 둥그런 흰 빛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걸 공처럼 던지듯이 그녀의 신발로 날려 버렸고, 그녀는 신성력이 공처럼 튕겨서 장화를 꾹 눌러 오자 흠칫 놀라서 한 발을 들고 말았다.

“뭐, 뭐하는 거예요!”

“정화, 요.”

내 또박또박한 대답에 레베카는 미간을 잔뜩 좁히며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거뭇하게 부패되어 있던 앞코가 보란 듯이 반짝이자 움찔한 그녀는 화를 억누른 듯한 얼굴로 말했다.

“특이한 정화네요.”

“응용을 잘하는 편이어서요.”

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내가 꼬박꼬박 대꾸해 오는 게 즐겁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제 대검 손잡이를 꽉 쥐면서 적의가 드러나는 눈으로 말했다.

“매번 느끼는 건데,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지나치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냥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을 뿐이다.

“경고하는데, 제 주제를 알지 못하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될 거예요.”

“협박하시는 거예요?”

내가 기죽지 않고 웃으며 대꾸하자, 그녀는 멈칫했다가 곧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렇게 들렸어요? 설마요. 전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대놓고 남을 공격하지 않는다고요.”

“그 말은 뒤에서 방심했을 때, 야비하게 친다는 거예요? 아까 마물을 공격한 방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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