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밤새 마왕에게 휩쓸리고 난 후 찾아온 아침, 나는 굼뜬 동작으로 훈련을 시작하고 있었다.
“집중해! 소환 영역이 흐트러진다!”
감독관의 지적을 들으며 나는 가슴 속의 온기를 온전하게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낮에는 마물과 사투를 벌이고 밤에는 마왕과 정사를 벌인 나는,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거기에 유희에 대한 마왕의 집착이 내 생각보다 유난하다는 데에서 나는 이상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의 유희 관계를 막는 자가 누가 됐든, 그게 설사 자신에게 속한 마물이나 마족일지라도 용서치 않겠다는 그의 말이 배 속에서부터 편치 않은 이물감을 끌어내 내 기분을 흐트러뜨리고 있던 것이다.
나를 위해서 제 종족을 해칠 수 있다는 말이,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호흡이 가빠지고 기분이 나빠지는 느낌이었다.
“말레드레드!”
결국 집중력이 무너져서 지팡이의 흰 빛이 사라지고 말자, 감독관의 외침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그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훈련을 해도 되겠다고 한 건 자네야.”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훈련에 임한 것이었는데, 결과는 좋지 못했다. 쉬고 싶은 몸처럼 어지러운 머릿속도 이성의 공백을 찾아서 헤매고 있었다. 내가 어두운 얼굴이 되어 입술을 꾹 다물자, 훈계하던 감독관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어제 고생했다고 들었네. 하지만 소환사가 제 몸 상태 하나 파악하지 못해서 어떻게 사악한 존재들을 가늠해 싸우겠나.”
그게 혼내는 이유란 듯이 말한 감독관은 종이를 보며 말했다.
“자네는 오늘 저녁 작전에 투입될 수 없겠군. 하루 더 쉬는 거로 하지. 내일 카란에게 말하면 자네가 새롭게 들어갈 팀을 알려 줄 거야.”
“기존 팀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요?”
내 물음에 감독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마족을 상대하려고 짠 팀이니까. 당분간은 마물 소탕에 적합한 팀에 들어가게 될 거야.”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지팡이를 챙겨 훈련소를 나왔다. 문을 막 빠져나오자 성기사들이 앞 공터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아론나이드가 그 중앙에 있었고, 성기사들이 그런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검술 훈련을 지도하고 있는지, 아론이 조심스럽게 손목을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성기사들의 감탄 소리가 합창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옆에 있던 소환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은 좋겠다. 저렇게 아론나이드에게 직접 물어보고 지도도 받을 수 있고.”
“그러게. 우린 가까이 다가가기도 어려운데 말이야. 이제 아론나이드가 팀에 소속된 게 아니라서 더 그래.”
“그런데, 저 성기사는 너무 노골적으로 붙어 있는 거 아니야?”
나는 그들이 누굴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어제 아론을 찾는다며 뒷문으로 나왔던 성기사.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훌륭한 가문이라고 말하던 갈색 금발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투구를 벗은 채였다. 대검을 든 그녀는 갑옷을 입고도 늘씬한 자태였고 얼굴에선 활력이 가득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보고 있노라면, 나까지 힘이 날 것 같은 그런 여자. 비키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발랄하면서도 우아하고, 당당함이 느껴지는 귀족가의 레이디였다.
나는 그녀가 아론의 오른편에 딱 붙어서 어떻게 검을 쥐고 신성력을 내뿜어야 할지 묻는 소리를 들었다. 이미 아는 것인데도, 아론의 설명을 다시 한번 듣고 싶다는 그녀를 보면서 주변 기사들이 성실하다, 기본에 충실하다며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에 있는 소환사 무리에선 조용히 속삭임이 이어졌다.
“저 성기사가 누군지 몰라? 암보로 공작가의 장녀잖아.”
“맙소사, 그럼 공녀네? 공녀가 성기사가 됐어?”
“한동안 화제였는데 몰랐나 보네. 아론나이드의 등장만큼은 아니지만 수도 사교계가 한차례 시끄러웠어. 한창때의 공녀가 성기사가 된다는 것 때문에 말이야.”
은밀한 듯 낮아진 목소리에 나까지 더욱 긴장되며 그쪽에 더 귀를 기울이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신성력이 있었다고 해서 유명했는데, 딱히 성기사 훈련을 받지 않고 있다가 몇 년 전에 성기사 훈련소 입단을 결정해서 다들 놀랐다니까. 공작가에서는 계속 말렸는데 공녀의 고집을 꺾었나 봐. 폐하께서도 공녀의 결정이 훌륭하다며 지지해 주셔서, 결국 공작이 성기사 훈련소로 들어가는 걸 허락했다고 알아.”
“와. 그렇게 성기사가 되고 싶어 했다니, 뭔가 대단하다!”
소환사들은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귀족가의 자제들이 사제가 되는 경우는 많았지만, 그건 가문을 이끌 의무가 없는 자들인 경우에 한해서였다. 가문을 이끌 후계자들은 생사의 고비를 넘어야 하는 사제로 입단하기를 꺼렸다. 이미 안전하고도 보장된 길이 있는데 누가 목숨을 내놓아 가며 마물들과 싸우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겠는가.
물론 나이트까지 올라가서 백작 지위를 새롭게 획득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극히 드문 경우였고, 대부분은 사제의 명부에 작은 족적을 남긴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왜 뒤늦게야 성기사가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존경스러워!”
“나도. 아론나이드의 옆에 있는 게 잘 어울리네!”
소환사들은 이내 감탄하면서 덕담들을 해 주고 있었다. 그들에게 전도유망한 공녀가 성기사가 되어 비슷한 배경을 가진 남자 곁에 있다는 것이 흡족하게 다가온 것인지, 이후 나오는 말들은 호의적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땐,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저러다가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그렇게 되려고.”
누군가 그럴 리 없다고 대꾸했지만, 소환사들의 눈빛은 다들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이 여인을 부러움이 담긴 눈으로 보고 있었다.
“황족 출신의 성기사와 공작가 출신의 성기사. 잘 어울리긴 하네.”
누군가 중얼거린 말이 불편한 가시처럼 이상하게 나를 찔러 왔다.
나는 이내 소환사 무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걸음을 옮겨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떠들고 있는 성기사 무리와 부러워하는 소환사 무리. 그 어느 쪽에도 낄 수 없음을 느끼면서 숙소로 돌아왔을 때, 라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훈련에 다녀오는 길인가 보네요.”
라드는 내 복장을 보며 나지막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어쩐지 아파 보였다. 나는 그가 불편한 자세로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독한 약초 냄새로 그의 몸이 성치 않다는 것을 확신했다.
고위 마족에게 당한 터였다. 강한 마기가 입힌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그를 보면서 나는 얼른 숙소를 가리켰다.
“괜찮으세요? 안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요.”
“아니에요, 얼굴 보고 가려고 잠깐 들른 거예요.”
나는 멈칫해서 묻고 말았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회복을 위해서 본대를 떠나려고요. 이곳은 싸우는 데 적합한 곳이라 다친 제가 길게 머무는 건 좋지 않다고 하네요.”
라드는 쓰라린 미소로 들은 말을 전달했다.
“기사단장께서 앞으로 이곳이 더욱 치열한 싸움터가 될 거라 하셨어요. 다친 기사가 오래 머물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요.”
“이곳이 말이죠?”
나는 두려움에 쿵쿵거리며 뛰는 가슴을 느끼면서 말했다. 라드는 악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고위 마족이 공격해 왔으니까요. 거기다가 젊은 지휘관에게 대가를 치르겠다고 경고까지 하고 나오다 보니 황성에서까지 주목한 모양이에요.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조만간 중앙에서 지시가 내려오리라 봅니다.”
“아…….”
나는 에레나를 떠올렸고 아론을 상기했으며 본 적 없는 황제를 떠올렸다. 세 명 다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인데, 그런 존재들이 이 공간에 모여든다고 생각하니 상대적으로 구석에 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괜찮을까. 이대로 내 이중생활을 지속해도 될까, 걱정마저 든다. 그 와중에 아론에게 붙어 있던 금발 여인을 떠올리고 말자 나는 속이 거북해졌다. 그 바람에 안색마저 어두워졌는지 얼른 라드가 위로해 왔다.
“말레드레드는 괜찮을 겁니다. 오히려 수도에서 강한 기사단이 내려와서 전력이 보강됐으면 됐지, 약해지거나 허술해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곳은 안전할 거예요. 저도 엘크리찬께 이곳이 안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몸이 성치 않은데도 나를 먼저 걱정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내 인사에 라드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잠시 침묵했다.
“좀 더 이곳에 머무르며 말레드레드와 친해졌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게 제일 아쉽네요. 이대로 먼저 가는 게요.”
어쩐지 살랑거리는 분위기가 그에게서 풍겼다. 정말 아쉽다는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사내에게선 무시할 수 없는 감정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어떻게 답해야 하나, 냉혹하게 거절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났다.
“아론나이드?”
라드가 먼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드의 표정이 환해지며 호감을 드러낸 것과 달리 아론은 굳은 얼굴로 라드를 쳐다보았다. 라드가 먼저 기쁘단 듯이 말했다.
“저번 작전을 함께해서 기뻤습니다. 엘크리찬의 현신이라는 분과 함께 싸울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검술 대련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론의 목소리는 조금 다급하고도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라드는 여전히 해맑게 그를 쳐다보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떠나기 전에 말레드레드를 만나려고요. 워낙 친해진 터라…….”
그렇게 말한 라드는 문득 의아함이 들었는지 아론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휘관께서는 왜 여기에 계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