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64화 (64/220)

64.

굵고 엄한 중앙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빠져나왔다.

“마족이 다시 마물을 정비해 상당한 수로 공격해 온다면, 이 인원으론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보통 마족은 뒤로 빠져서 우리가 마물에게 진땀을 뺄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 뒤 기력을 상실한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 진영이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무언가 곤란하다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가 무엇 때문에 곤란하다고 느끼는지 궁금해졌다. 금세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젊은 지휘관의 말도 틀린 게 아닙니다. 이 인원으로 대적할 수 있도록 전략을 미리 짜놓는 것이요. 어쩌면 이 시점에선 가장 긴요하게 요구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는 좀 더 점잖은 어조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를 공격해 오는 마물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력을 보충하는 속도보다 마물의 군대가 늘어나는 속도가 빨라서, 적정한 지원을 못 받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다행히 이번엔 중앙에서 기사단장을 보내 주었지만, 어제 마족의 등장을 보건대 이도 충분한 지원은 아닙니다.”

그는 낮고 단호한 톤으로 강조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을 거라고 예상해야 합니다. 이제 부족한 인원을 가지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싸울 건지가 중요해질 겁니다. 지원할 수 있는 인원이 전체적으로 부족한 만큼, 부대들은 마족과 마물을 전략적으로 상대하는 방법을 부대 내에서 자체적으로 논의해야 합니다.”

“흠. 그래도 어제 마족이 너무 강성이라 기사단 둘은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중앙 기사단장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성격을 생각해 보건대 의도적으로 그런 것 같았다. 곧 이게 이유란 듯이 중앙 기사단장이 과장되게 물었다.

“흠, 젊은 지휘관께서 상부에다 말을 올려 보는 건 어떻습니까.”

잠시 후, 내가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올려 보았지만 지원이 어렵다는 답변만 받았습니다.”

아론이었다. 담담한 대꾸에 중앙 기사단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상부’에 충분히 말한 것입니까?”

상부란 단어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느껴졌다. 아론이 대답했다.

“의도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어제 마족 때문에 걱정하고 계시다는 것도요. 하지만 황제 폐하께선 더 냉혹하고 엄하게 반응하실 겁니다. 그런 것 하나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무얼 하냐는 듯이요. 알아서 살아남길 바라실 겁니다.”

아론이 가차 없이 말하자 기사단장이 당황했는지 잠깐 아무 말도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점잖은 목소리가 허허 웃으며 끼어들었다.

“황제 폐하께선 도시 하나가 멸망하지 않고선 지원 부대를 보내지 않으실 겁니다. 수도를 방어하기에도 늘 인원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니까요. 수도가 지켜지지 않으면 제국 전체가 무너진다고 보시는 분이라, 마족의 등장만으론 여기에 대대에 가까운 기사단을 보내지 않을 겁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인원으로 해 봐야겠지요. 그럼 구체적인 전략을 논의하기 전에.”

기사단장이 말을 멈췄다. 곧 나는 그의 그림자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곤 천막이 휙 치워지면서 나를 쏘아보는 굳은 얼굴이 나타났다.

“함부로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사제를 꾸중해야겠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변명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란을 보러 왔다고 말할 것이었으나 그의 살벌한 눈빛에 혀가 얼어붙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도 큰 문제가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요.”

기사단장이 열어젖힌 입구 사이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나의 상관의 상관, 즉 이 본대의 대장으로서, 상관들의 의견을 취합해 중앙과 교섭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은 처음이어서 멈칫했는데, 내 시야를 가리면서 기사단장이 냉엄하게 쏘아붙였다.

“남의 이야기를 몰래 듣는 건 예의에도 어긋납니다.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일 텐데 모른다니. 제국민으로서 기본적인 교육도 못 받은 모양입니다.”

“……엿들으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기에 압도당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울컥하고 가슴에서 반항심이 치솟았다.

“지나치려다가 마족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나는 어제의 기세등등했던 마족을 떠올렸다. 그녀는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듣게 된 거예요. 죄송합니다.”

“……흠. 변명은 그럴싸하나, 계속 들으며 서 있었다는 건 끝까지 들을 심산…….”

그때,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아론이었다. 그는 기사단장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못 들을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아침 조회 시간에 사제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내용이니까요.”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몰래 엿듣고 있었다는 게 괘씸한…….”

“목소리가 크니까 가만있어도 들릴 수밖에요. 애초에 비밀스럽게 할 이야기라면 다른 장소를 골라야 했습니다.”

기사단장은 묘하다는 눈으로 아론을 쳐다보았다. 아론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은 저분이 보고하는 장소니까요. 저분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닙니다.”

“……지휘관이 그렇게 말한다면.”

기사단장은 한발 물러났다. 아론이 나를 옹호하며 나선다는 게 조금 의아하단 눈빛이었지만 아론의 심성을 생각하면 그것도 이상한 게 아니라고 보는지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였다.

아론은 고개를 돌렸다. 흠잡을 데 없는 화사한 미남자를 보자 왜인지 가슴이 따끔, 찔려 왔다. 방금까지 마왕과 있어서 그런 것일까.

“카란을 찾아왔습니까?”

아론이 제법 다정하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얼떨결에 끄덕이자 아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은…….”

“도와드려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유를 설명하고는 아론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잠깐 실례해도 되겠냐는 질문에 대장은 문제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중앙 기사단장도 마지못해 그러라고 했다. 기사단장은 아론나이드가 기껏 사제 하나를 위해 길 안내를 한다는 게 무척 못마땅해 보였다. 형식과 신분에 엄격한 그는 아론나이드의 배경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가 볼까요?”

아론은 덤덤하게 앞장섰다. 나는 아론의 눈빛이 진해져 있는 것을 보면서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천막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아론이 입을 열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으응, 잠이 안 와서.”

나는 주변을 살펴보고 답했다. 또 아론나이드에게 반말한다고 무례한 여인이라 여겨질 순 없었다. 조심스럽게 말하며 한숨을 쉬는데, 어느새 아론이 내 옆에서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기사단장의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 말이 격식 없이 나간 것 같습니다.”

원래 그런 사람인 거 같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예민해져 있어? 마족 때문에?”

내 질문에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마족의 등장이었으니까요. 제가 다시 나타날 거라고 경고하자 그 때문에 크게 겁을 집어먹은 것 같습니다.”

아론은 신중한 톤으로 덧붙였다.

“전 마족이 다시 마물 무리를 데리고 등장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에 맞춰서 전략을 짜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고요. 성기사단장은 그런 마족을 상대하려면 중앙에서 더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원이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 인원으로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도록 전략을 짜게 될 것입니다.”

아론은 물 흘러가듯이 이야기했다. 나는 아론의 말을 들으면서 내 경고의 여부가 크게 상관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론은 이미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모두 고려하고 있었다.

강력한 마족의 재등장, 그가 끌고 올 수천 마리의 마물. 그 위험과 위기에 대한 경고를, 아론은 영특한 머리로 예감하고 미리 전략을 짜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내가 감탄하고 말자 아론이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았다.

“아니. 너무 완벽해서…….”

나는 마음에 얹어졌던 부담감이 옅어지는 걸 느꼈다.

“네가 철저하게 준비를 한다니 마음이 놓여.”

나는 마왕이 말했던 걸 떠올리며 은근히 털어놓았다.

“마족이 수천 마리나 되는 마물을 끌고 올까 봐 걱정이었거든. 분명 대군을 끌고 올 거라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잠을 못 잔 거군요.”

아론은 내가 일찍 일어난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수 있을까?”

내 질문인지 넋두리인지 모를 말에 아론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아론의 눈길이 천천히 일렁인다. 나를 보면서, 암연하게 타오르면서.

“말레드레드가 여기 있으니까요. 반드시 이길 겁니다.”

아론은 부끄러운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듣는 사람조차 수긍하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뒤늦게 내가 의미를 알아차리고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며 민망해졌는데, 아론은 그런 내가 예쁘다는 듯이 다정하게 웃어 왔다.

“이른 아침부터 말레드레드를 보니 너무 좋네요. 하루가 모두 잘 풀릴 것 같아요.”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야?”

투명하게 대꾸했지만 내심 싫지 않은 말이었다. 나는 그를 찬찬히 보았다. 어제의 피로는 모두 가셨는지 아론은 말끔했다. 단순히 말끔한 걸 넘어서 우아할 정도로 고상한 데가 있었다. 입고 있는 갑옷만 아니라면 그가 당장에 무도회에 있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외모와 분위기였다.

“……말레드레드. 그런 눈으로 절 보고 있으면.”

아론의 눈빛이 왠지 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무언가 동한 듯 그의 시선이 진하게 깊어져 있었다.

“제가 참기가 힘든데요.”

“무, 무슨 말이야. 지금 길 안내하는 거였잖아.”

“물론 그렇죠.”

아론은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좀 더 한적한 길로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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