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63화 (63/220)

63.

“……네?”

나는 그가 흘려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이야기를 거론하자 움찔했다. 그는 나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상대가 누구였지? 마물이었나?”

“그게…….”

마족이 있었다고 말할까?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 왔다. 유희를 넘어선 이야기를 하게 되면 유희란 영역이 부서지는 것은 아닌지, 결국 서로의 다른 세계마저 간섭하게 되는 건 아닐지 불안해진 것이다. 마왕은 그런 나를 간파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말하기가 두려운가? 내가 그대의 삶에 관여하게 될까 봐?”

“……솔직히.”

나는 선을 그어 두자는 의미로 대답했다.

“부담스러워요. 당신은 마왕이고, 전 사제니까. 당신이 마음을 먹는다면 제 세계쯤 아무렇지 않게 함몰될 것 같아서…….”

나는 쾌락 속에 숨겨 놓았던 공포를 꺼내놓았다.

“대답하기 망설여져요.”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난 이미 그대에게 그대의 삶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내가 질문하는 이유는 엄연히 이것이 우리의 유희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야.”

나는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이 그를 보았다. 마왕은 자신의 앞에 검은 거울을 하나 생성했다. 그곳에서는 마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잠시 후 어떤 형체가 드러났다.

마물. 수천 마리의 마물이 집결되어 있었다. 명령에 따라 모인 것처럼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는 그것들을 보면서 나는 겁에 질리고 말았다. 가슴이 꽉 막혀 오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공포심에 나도 모르게 생명줄인 지팡이를 찾아 손을 더듬거리는데, 마왕이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방금 수하 하나가 보고했지. 인간계에 절망을 보여 줘야 한다고 하면서, 저것들을 이끌고 신성국을 무찌르러 간다고 했어.”

“저걸 모두 데리고요……?”

마왕이 그렇다고 하자, 나는 머릿속이 검게 변하고 말았다. 저 정도의 숫자를 상대할 도시의 사제들이 있을까? 수천 마리라면 몇 개의 부대만으론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신성국 사제의 반. 엄청난 대군이 투입되어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도시들이 얼마나 파괴될지,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죽어 나갈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가늠할 수 있었다.

‘분명 끔찍하겠지.’

나는 죽음의 광경을 떠올려 보고는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마왕에게 다시 말했다.

“절 보내 주세요.”

목이 타는 것 같고 머리가 어지럽다. 죽음의 그림자가 내 뒤에 드리워졌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마왕에게 매달렸다.

“어서요, 제 세계로 돌아가 봐야 해요!”

마왕은 그런 나를 의미 모를 눈으로 응시했다. 그 붉은 눈길은 예리했다. 마치 내 곳곳을 좀먹고 있는 공포와 절망을 읽고 있는 것처럼 날카로운 관통력이 있었다. 이윽고 마왕이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그대의 세계로 가고 싶다고? 그대가 최전선에서 싸워야 하는 사제란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마왕은 손을 뻗어 내 턱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내 움츠러든 얼굴을 쏘아보았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대는 금세 죽고 말 거야. 저런 마물 군단을 상대하게 된다면 살아남을 리 없지. 그대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니까.”

“놔주세요, 전 가야 해요.”

기분이 이상하다.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밖에 기회가 없다고 온몸의 세포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것은 당장의 내 안위를 생각해서도, 내 쾌락이나 욕망을 생각해서도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어쩌면 죄책감일지 몰라.’

사제로서 마왕과 섹스를 한다는 죄책감. 사제로서 내 본분을 잊고 배덕하게 사악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속죄라면 이것밖에 없었다. 나는 결국엔 사제였고, 욕망을 해결하고 나면 다시 마물과 싸워야 하는 소환사로 돌아가야 하니까. 나는 내가 머물 자리를 위해서 싸워야 했다.

“부디 절 보내 주세요……!”

나는 턱을 잡고 있는 그의 팔에 두 손을 올렸다.

“…….”

“어서요!”

내 애절한 간청이 이어지자 마왕은 멈칫했다. 내가 잡고 있는 자신의 팔을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가 깊었다. 마왕은 작게 중얼거렸다.

“이 온기가 기막히게 좋단 말이야.”

나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이 그를 보았다. 그는 갑자기 내 허리를 끌어다가 제 가슴에 달라붙게 만들었다.

“큿…….”

거친 동작에 나는 그의 가슴에 턱을 부딪치고 말았다. 얼떨떨해져서 올려다보자 이글거리는 붉은 눈빛이 따라온다.

“이 더운 체온을 유지하게 만드는 게 그대의 팔딱거리는 심장이란 걸 아나? 그 기관이 멈춰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온기지.”

“아, 으읏…….”

나는 내 몸이 고스란히 마왕에게 비벼지는 걸 느꼈다. 그가 바짝 끌어당긴 탓에 얇은 옷 아래의 봉긋한 가슴이 그대로 가슴 근육에 문대졌고, 허리며 다리며 밀착되듯이 그에게 달라붙고 말았다.

‘이런 때 설마…….’

나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걸 느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다시 정사를 하자고 덤비면 막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저항하고 반항해도 그의 힘에는 못 이길 테니까.

두려움과 초초함에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의 뜨거운 눈길이 내 눈 위로 쏟아졌다.

“잘 들어. 나는 그대의 심장이 멈추는 일 따윈 바라지 않으니까. 그대가 그 이상한 소명감을 굳이 부려야겠다면 충고하지. 질 것 같으면 덤비지 말고 도망가도록 해.”

“……알겠어요.”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그가 말한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전투에 들어가면 생각처럼 퇴각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달아나다 죽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는 일단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모하게 싸우지 않을게요.”

그가 왜 이러는 알고 있었다. 내 목숨을 온전하게 살려서 자신의 유희를 이어 가고자 충고해 주는 것이다. 내심이야 어찌 됐든 마물 대군이 온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고 도망가라고 충고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결과적으로 살 기회를 제공해 주는 셈이니까.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열심히 살아남을 테니까, 우리의 유희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오만한 건지 모르겠군.”

내 성실한 대답에도 마왕은 비딱하게 나왔다. ‘마물을 보자마자 도망갈게요.’라는 대답을 기대한 걸까. 나는 마왕의 싸늘한 분위기를 읽으며 조심스럽게 그를 껴안았다. 그러자 그가 약간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무사히 살아남을 테니까.”

그를 안은 이유는 고마워서도 있고, 절박해서도 있다. 그에게 애절하게 말했음에도 통하지 않았으니 좀 더 육체적으로 그의 마음을 풀어 보고 싶었다.

“절 보내 주실 거죠?”

“…….”

마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을 들어 올려 확인한 그의 눈은 이제 차가운 빛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고 있었다.

자신을 도리어 껴안아 버린 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이면서도 그런 적극적인 모습이 꽤나 만족스러운 것처럼 불만과 즐거움이 교차한다. 마왕은 내 허리를 쓸어내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대는 제법 교활해. 자신의 몸과 얼굴을 도구처럼 사용할 줄 알지.”

“으, 읏, 그만…….”

어느새 내 꼬리뼈를 내리누르며 둔부의 살을 움켜쥐는 마왕의 손길은 야릇했다. 이상한 생각이 솟구쳐 올라오자 나는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말았다. 내 거부감 어린 눈빛을 빤히 바라보면서, 마왕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싫지 않단 말이야.”

“흣…….”

“수하의 출격을 취소하고 싶어질 정도로.”

“네?”

이번에야말로 나는 정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한낱 인간을 위해 공격을 멈추겠다는 거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마왕이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의문으로 동그래진 내 눈가를 한 손으로 쓸면서, 마왕은 고개를 내렸다. 그의 옆얼굴이 내 볼가에 닿는 게 느껴졌을 때, 음산하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말레드레드. 부디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도록 해. 마물보다 그대가 더 의미 있으니까.”

“……!”

나는 멈칫했다. 눈앞이 번쩍일 정도로 명확한 목소리였다.

“아니면 내 이름을 불러도 좋아. 위기 시엔 신보다는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게 좋을 테니.”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내가 믿지 않는 힘이 도사려 있었다. 그 마기는 차원의 문을 생성하는 힘이었고, 나를 이곳에서 돌려보내 줄 힘이었다. 마왕은 잘 가란 듯이 손을 휘저었고, 나는 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눈을 뜰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손이 떨려 왔다. 그 이유가 마물 대군을 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왕의 자신을 부르라는 말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를 모욕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소환사가 신이 아닌 마왕의 이름을 부르짖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지. 나는 어깨를 한차례 부르르 떨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시간은 새벽이었고, 아직 훈련이 시작되기에도 이른 시간이었다.

‘조금 전에 본 것을 어떻게 전달하지?’

군대가 막연히 쳐들어온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보가 마왕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물론 밝힐 수 없었고, 언제 어디로 쳐들어올 건지도 정확하게 몰랐다.

다만 몰려온다는 사실에 입각해 대군을 준비하고 무기를 정비하게 하는 건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어찌 전달하나 고민하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천막을 나왔다.

방어구와 바지, 지팡이까지 단단히 준비한 나는 긴장한 상태였다. 으스름한 새벽, 몸을 스쳐 가는 바람에 뒷목이 더욱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내 걸음은 자연스레 카란의 천막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불빛이라도 있다면 내 마음을 어떻게든 전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카란의 천막에선 뜻밖에도 환한 불빛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천막에서 여러 그림자가 보였다. 대부분 검을 든 모습이었고, 갑옷을 차려입은 성기사의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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