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2화 (2/220)

2.

“나가 봐.”

내 말에 결국 노예가 울상을 지으며 물러났다.

나는 그가 주물렀던 살을 바라보았다. 발갛게 물든 살결. 아직도 느껴지는 열감. 그리고 온몸을 전율시켰던 해방감. 기억하고 있다. 나는 몸을 수그리며 눈을 감았다.

더 느끼게 되면 내가 망가져 버리진 않을지, 그리고 수녀원에서 도망치지 않을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노예를 거절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민해서 괜찮은 상대로 고르리라.’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고민한다는 건 내 신분과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게 신중히 접근한다는 의미였고 괜찮은 상대를 고른다는 건, 서로의 삶의 영역을 망가뜨리지 않을 상대를 고른다는 의미였다.

그렇다.

나는 뼛속까지 나다운 인간일 뿐이다. 내 외적인 평판을 예전처럼 이어 가면서 내 안의 억눌린 욕망도 해결하고 싶은, 그런 욕심 많고 모순적인 존재일 뿐이다.

나는 백작의 사생아로서 손가락질받고 싶지 않았고, 문란한 아가씨라고 욕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야하고 질펀하게 관계하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거울의 양면 같은 모습이 내가 원하는 나라는 걸, 이상한 액체를 뒤집어쓴 채로 나는 분명히 깨닫고 말았다.

그렇게 고민한 내가 고른 첫 번째 남자는 아론나이드 드올릭 펠더였다.

이름에서 눈치챘겠지만 그는 황가의 핏줄이다. 그의 어머니는 현 황제의 여동생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지금은 죽고 없는 선 황제였다.

그의 아버지는 노예 출신의 외국인 용병이었다. 신분에서 느꼈겠지만, 그의 부모님은 원래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로,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역경을 맞이했다.

그들이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자 선민주의 사상이 강했던 선황제는 대노했고, 당장에 용병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이후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했지만 결국 추적자의 손에 용병인 아버지는 목이 잘리고 그의 어머니는 손발이 묶여 끌려온다.

황제는 차마 딸을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가장 높고 고립된 황성의 탑에 그녀를 가두었다.

정확히 10개월 뒤, 그녀는 드레스를 찢어 천장에 밧줄을 만들고 거기에 목을 맸다. 자신의 사랑을 따라간 것이다. 10개월이란 시간 차이가 생긴 것은 배 속에 아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분노했고, 슬픔에 차서 그 어린 핏덩이를 볼 엄두도 내지 않았다.

그날 밤. 핏덩이 하나가 황성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로 빠져나왔다. 황제의 명으로 그 아이는 결국 내가 자란 도시로 보내진 것이다.

그 핏덩이가 울보 아론이다.

어린 시절 아론은 귀족의 아들로 입양된, 평민 중 운 좋은 경우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황가의 핏줄이고 어머니가 황녀였다는 사실은 분노한 황제 때문인지, 쉬쉬한 어른들의 철저한 입막음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린 내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지저분하고 잘 울고 다니는 소년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또래 아이들보다 덩치도 작았고 체격도 약해서 툭하면 맞고 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커다란 황금빛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일 때면 저렇게 연약해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하는 염려마저 들었다. 나도 어린 나이였지만 나보다 더 어린 아론이 가여워 몇 번 쿠키를 쥐여 준 기억이 났다. 어쩌면 사생아 출신인 나와 평민 출신의 입양아인 아론의 처지가 비슷하다 느꼈는지 모른다.

가문을 겉도는, 절대 주류에 섞일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에 서 있는 자들.

그나마 나는 백작의 피라도 이어받아 다행이지 않냐고, 작은 우월감마저 느끼면서 소년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아론은 내게서 달콤한 쿠키를 받을 때면 울음을 멈추고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이 작은 쿠키에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는 듯이, 한참이나 금안을 반짝이며.

나는 그 절대적인 시선이 간지러워져 조금 웃고 말았다.

아론은 그렇게 나를 선망했고 우리는 종종 어울렸다. 나는 순종적으로 나를 바라보며 존중하는 아론에게서 우월감과 뿌듯함을 느꼈고, 그런 아론과 함께하는 것이 즐거웠다.

때때로 아론을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으면 그의 손을 잡고 산으로 도망치기도 했는데, 체력이 약한 아론은 힘들어하면서도 끝까지 나를 쫓아왔다.

그랬던 아론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건 소환 작업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마물 소탕은 보통 성기사와 소환사의 협동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성기사가 마물들을 지정된 공간으로 몰아넣으면 소환사가 그들을 마계로 보내 버리는데, 훈련을 받고 첫 실습을 나온 터라 나는 무척 긴장했고 초반에 힘을 과다하게 사용해 지친 상태였다.

실제로 전투에 나와 보니 음습한 마물의 기운이 너무나 불길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소환 지팡이를 들고 있는 손이 땀으로 축축해져 자꾸만 지팡이를 놓칠 것만 같았으며 머릿속은 되직하게 흐트러져 엉뚱한 말이 주문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앞쪽에서 다른 소환사가 주문을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물이 소환 영역에 들어온 순간을 정확히 잡아내 주문을 외우려고 애썼다. 훈련 때보다 훨씬 고도의 집중력과 침착함을 요하는 일이었다.

살아 있는 마물. 그것도 흥분하고 분노한 마물이란 정신 나간 말처럼 걷잡을 수가 없다. 어디로 튈지 몰랐고, 어떤 공격을 뿜어낼지 몰랐다. 발악하듯 달려드는 마물에게 현혹되지 않은 채로 소환 작업을 마무리하는 건 노련한 소환사가 아니면 잘하기 어려웠다.

왜 경력자들이 첫날에는 바지를 두꺼운 것으로 챙겨 입으라고 충고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게 되면 골반까지 아프기 때문이다.

그나마 같이 배정받은 성기사들의 실력이 좋아서 마물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 내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신성력을 증폭해 주는 지팡이에 온 정신을 집중하며 마지막 마물이 사라지게 하려 애썼다.

“조금도 안 변했습니다.”

“……네?”

그러니까 내 대답이 굼뜨게 나온 이유는, 아직도 마물이 완전하게 소멸되지 않았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앞에 선 남자는 내 둔한 반응에 부드럽게 웃었다. 순간 이곳이 더럽고 악한 전장이 아니라, 눈부신 무도회장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주변을 정화하는 미소에 정신이 나갔던 나는 그가 누구인지 서서히 떠올렸다.

그는 나처럼 훈련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성기사였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출신에서부터 화제가 되었고 아름답고 훌륭한 외양, 반듯한 태도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신참인 나도 그의 이름을 들어 보았다.

아론나이드 드올릭 펠더. 그는 현 황제 아드리아를 이모로 둔 고귀한 신분이었고, 그 후광을 넘어선 굉장한 미남자로 유명했다.

성기사가 배경만으로 얻을 수 없는 지위인 만큼, 그의 손에서 빛나는 성검이 그가 얼마나 선택받은 자인지 알게 해 준다. 나는 다시 한번 묻고 말았다.

“네?”

이번에는 그가 던진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다.

아론나이드는 나를 부드럽게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낯설지 않아 나는 의아함이 들었다.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는군요. 하긴,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소환 작업이 마무리되었는지, 앞쪽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내 소환사 하나가 됐다, 하는 소리를 뱉어내자마자 그를 비웃듯 마물이 발악했다.

마물은 사방으로 촉수를 뻗어 왔다. 두 명의 소환사가 컥, 소리를 내며 팔다리를 뚫렸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때, 거대한 촉수 하나가 내게로 날아왔다.

안색이 창백해진 내가 빳빳해진 손을 움찔하려던 찰나, 그의 검이 움직였다.

커다란 대검에는 신성력이 강하게 배어 있었다. 휘황찬란한 빛이 허공을 갈랐다. 그 여파로 바람이 싸하게 좌우로 휘몰아쳤고, 신성력을 정통으로 맞은 마물은 산산조각이 나서 공중으로 흩어졌다.

“아론이에요.”

작고 더러운 조각들이 날린다. 사내는 자신의 망토를 내 쪽으로 펼쳤다. 나를 그 사악한 것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

폭발에 놀란 소환사들의 비명과 성기사들의 환호성이 전쟁터의 여음처럼 아득하게 들려온다.

“……어렸을 적.”

조용한 목소리가 뺨에 닿았다. 동시에 그에게서 풍겨오는 성인 남성의 체향이 그윽했다.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보내는 미소, 그리고 눈길에 한없이 긴장했던 몸이 편안해졌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닿아 있던 나는 그가 만들어 내어 준 공간에서 분명한 평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 울보 아론.”

그 울보 아론.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눈은 진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더럽고 잘 우는 소년 하나를 떠올리고 말았다.

기억 속의 소년은 한 손에 쿠키를 쥔 채로 나를 절대적인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딘가 간지러워져 왔다.

“너인 줄 몰랐…….”

나는 당황했다. 얼른 예의 바르고 교육받은 이처럼 그의 이름을 고쳐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저었다.

“편하게 말하세요. 변하긴 했지만, 전 여전히 그 아론입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살짝 휘어지는 눈가가 예술적이었다. 웃음을 품은 그 눈빛은 그윽했으며 유혹하는 것처럼 달콤했다.

“말레드레드.”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내 이름이 왠지 생경했다. 값비싼 보물의 이름처럼 들렸다.

여전히 굳어 있는 내게, 그는 조용히 읊조렸다.

“보고 싶었어요.”

그 단어가 시작이었다. 나는 어느새 그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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