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서 (2)
"내 말 안 들려! 이 깜댕이가 죽어도 좋아?"
릭의 외침이 복도에 퍼졌다.
최기석은 하는 수 없이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복도로 나섰다.
"더 가까이 와."
최기석은 릭의 명령에 따라 거리를 좁혔다.
이제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이십 보에 가까웠다.
"그래. 맞네, 맞아. 저번에 날 막아섰던 인간이 너라고. 저번에는 아주 고마웠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간호사와 의사들이 제 일을 못했으니까."
"닥쳐!"
릭이 신경질을 부리며 천장으로 총구를 겨눴다.
탕!
폭음에 이어 화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스멀스멀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면 상황을 헤쳐 나갈 방법이 떠오를지 모른다.
"무슨 구경났어? 눈깔 안 치워?"
탕! 탕! 탕!
릭이 병실에서 총을 난사하자 환자와 보호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문에서 멀어졌다.
"이봐, 깜둥이. 아직도 인정 못 하겠나? 엉?"
릭의 시선이 모건에게 향했다.
"우리 아버지를 죽인 건 이 병원이라고 말이야. 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었어."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병원이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럴 줄 알았다. 너희 병원 놈들의 핑계야 뻔하지."
릭이 히스테릭하게 웃으며 모건에게 총구를 겨눴다. 총구 끝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을 사용하고 릭을 똑바로 응시했다.
"릭. 그만 총 내려놔요."
"뭐라고?"
"총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릭이 콧방귀를 꼈다.
"크크크크. 의사라는 인간이 그렇게 상황파악이 안 되나?"
"그건 당신 역시 마찬가지에요. 이런 식으로 소동 피우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당신의 인생마저 무너트리고 말 거예요."
"협박인가?"
"충고입니다."
최기석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모건과 나를 죽인다고 해도 당신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은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겠죠.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말 아닙니까?"
"그…… 그건."
모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처음으로 총구를 바닥으로 내리고 착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효과가 있나?'
최기석은 한 줄기 희망을 품었다.
사실 총 든 사람에게 훈계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가 이렇게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건 폭군의 강림 특유의 제압능력, 상승한 카리스마 수치 때문이다.
"릭. 당신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병원을 찾아와 이런 행동을 했겠어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방법이 잘못됐어요."
"……."
"총 내려놔요. 같이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나도 도울게요."
최기석의 말에 모건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이에 릭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더니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큭. 정말 미치겠군."
"……."
"근데 말이야.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어."
릭이 고개를 들며 번뜩거리는 눈을 번뜩거렸다.
광기로 가득 찬 눈빛.
최기석은 그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었음을 직감했다.
"둘 중 누가 먼저 죽을래?"
릭의 총구가 모건과 최기석을 번갈아 가리켰다.
"나도 너희 둘을 따라갈 테니까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
"이런 이런. 둘 다 먼저 죽긴 싫은 모양이지? 그러면…… 너로 정했다."
릭이 최기석에게 총구를 겨눴다.
"이봐. 깜둥이 이 친구는 너 때문에 죽는 거야. 너희 병원 때문에 내 아버지가 죽은 것처럼 말이야. 죽기 전에 너도 내가 느낀 고통을 느껴 봐."
"그만 둬! 미스터 최는 아무 상관없잖아!"
"왜 상관이 없지? 네 동료인데 말이야."
릭이 이죽거리며 최기석을 응시했고 최기석은 침묵을 지키며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봐."
"없어요."
"무서워서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가보지?"
"아니. 난 안 죽을 테니까."
최기석은 가볍게 목을 꺾고 릭의 똑바로 쳐다보았다.
'뭐야. 이 인간은?'
그의 태도 변화에 릭이 몸을 움찔거렸다.
달라진 눈빛과 태도, 은연중에 뿜어내는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어째서 총을 겨누고 있는데도 이렇게 패기를 부릴 수 있는 걸까.
"죽을 때가 되니 실성했군. 잘 가라."
릭이 방아쇠에 건 손을 서서히 당겼고 최기석은 번개처럼 릭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어머! 닥터 최가 죽겠어!"
"미스터 최, 안 돼!"
병실에 있는 상황을 지켜보던 환자들과 모건이 언성을 높였다. 그들 중 일부는 아예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지만 그의 행동은 지나치게 무모해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최기석의 몸에서 짙은 회색빛 기운이 뿜어졌다.
오로지 그만이 볼 수 있는.
탕!
"비…… 빗나갔다고?"
놀란 릭이 몸을 들썩거렸다.
이만한 거리에서 사격에 실패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총을 발사했다.
탕!
두 번째 사격 역시 실패.
그사이 최기석은 릭과의 거리를 좁히는데 성공했다.
퍼어어억!
손등으로 릭의 손을 내리치자 릭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총을 놓쳤다.
최기석은 권총을 멀리 차 버리고 릭의 등 뒤로 돌아가 그의 팔을 제압했다.
때마침 출동한 경찰들이 우르르 현장으로 달려왔다.
"뻑킹! 놔! 놓으라고! 다 죽이고 나도 죽을 거라고!"
릭의 절규가 복도에 울렸다.
* * *
릭의 습격으로 메이죠는 한 바탕 홍역을 겪었다.
환자 또는 보호자가 총기 사고를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경찰들의 1차 조사와 클리닉 내 감시 위원회의 2차 조사가 연달아 이어졌다.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최기석과 모건은 일과가 끝난 후에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
"고생 많았다."
최기석은 모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담당 환자는 수술 중 사망하고 그 보호자는 모건을 죽이겠다고 총기로 위협했다. 그동안 모건이 받았을 정신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모건?"
"아, 미안. 갑자기 아무 생각이 안 나서."
모건이 뜸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나야말로 미안. 괜히 내 일에 휘말리게 해서."
"네 잘못이 아니잖아. 게다가 다친 사람도 없었고."
"……."
"따뜻한 커피라도 한잔하자."
두 사람은 1층 카페로 이동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모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아…… 내가 너무 바보였어. 릭과 좀 더 진지하게 대화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모건이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환자가 사망한 후 릭은 며칠 간격으로 그를 찾아와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버지가 수술 중에 죽을 리가 없다고, 그 이유를 밝혀 달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잘 타일렀지만 계속되는 방문에 짜증이 솟구쳤다.
그때 인내심을 더 발휘했다면 어땠을까.
"모건. 이미 지난 일이야. 네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마. 의사라고 해서 항상 모든 일을 예측하고 대처할 수는 없으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모건이 불안한 얼굴로 커피잔을 들었다 놓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 봐."
"아까 어떻게 릭에게 달려갈 생각을 했지? 너무 무모하지 않았나?"
최기석은 총을 겨눈 상대에게 무작정 달려들었다.
불구덩이에 제 발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해서 뛰었지.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죽는 거였잖아?"
"보통 그런 상황이면 도망치지 않나?"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닌가 보지. 뭐."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지. 그 거리에서 쏜 총이 두 번이나 빗나갔으니까. 만약 네가 총에 맞았다면 난 의사 생활 못 했을 거야."
모건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막간의 침묵 속에 최기석은 상태창을 확인했다.
불사신 칼라일 아이템이 사라졌다.
늘 든든하게 제 자리를 지키던 아이템이 없어지자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동시에 아이템에 대한 고마움도 생겨났다.
불사신 칼라일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네 시간 전에 끝났으리라.
'그래도 소득이 없는 건 아니지.'
칼라일을 잃고 숨겨진 임무를 완수했다.
덕분에 1,000 P.
P와 새로운 칭호 BANG을 얻었다.
BANG은 총기로 인한 사망률과 치명적인 부상을 50퍼센트 낮춰 주는 칭호다. 한마디로 총기 휴대가 가능한 미국 생활 전용 칭호라 할 수 있었다.
"하아……."
모건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총기 사건을 겪은 후 새롭게 생긴 버릇이었다.
마음의 그늘을 떨쳐 버리지 못한 그의 모습에 최기석마저 가슴이 아팠다.
"모건."
"왜?"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을 사용하고 부가스킬로 정언명령을 선택했다.
"오늘 일은 결코 네 탓이 아니야. 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널 손가락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힘 내."
[정언명령이 발동되었습니다.]
[동료의 죄책감과 심적인 고통이 대폭 하락합니다. 라포 3단계인 대상에서 특수효과 고무가 추가적으로 주어집니다.]
[고무: 감정적인 동요로 능력치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합니다. 지속시간 2주일.]
휘이이잉.
알림과 함께 최기석의 몸에서 뿜어진 하얀빛이 모건을 휘감았다.
"고마워, 미스터 최.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우린 동기잖아. 힘들 때면 기댈 수 있어야지."
"오늘 도와준 거 평생 잊지 않을 게."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최기석은 모건과 대화를 나누다가 병동으로 돌아갔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느라 일이 제법 밀렸다.
의국에서 잡무를 처리하고 윌리엄을 만나 간이식 적합성 테스트를 받도록 했다.
다행히 윌리엄은 생체 간이식 적합자였다.
윌리엄을 입원시키고 환자들을 살피던 중 복도에서 엠마를 마주쳤다.
"미스터 최! 괜찮아요?"
엠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달려왔다.
"낮에 총기 사고 있었다면서요? 스크럽 중이라서 소식을 나중에 들어서……."
"너무 걱정 말아요. 다친 데는 없으니까. 그나저나 엠마는 이제 완전히 나은 모양이네요."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엠마를 살피고 미소 지었다.
"지금 제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요. 본인이 죽을 뻔해 놓고서."
"그런 가요?"
"그런 가요가 아니라고요! 태평해도 너무 태평해! 충격이나 쇼크 받은 건 없어요?"
"딱히 없는데요?"
"미스터 최.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요. 혼자 끙끙 앓으면 병 생겨요."
엠마의 진심 어린 충고가 마음을 흔들었다.
분명 이 말을 직접 누군가에게 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만약에 이상하다 싶으면 엠마에게 가장 먼저 말할게요. 그러면 됐죠?"
"네. 꼭 그래야 해요."
엠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운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뭐예요?"
"선물이요. 미스터 최가 간호해 준 덕분에 빨리 나았잖아요. 뭐라도 챙겨 주고 싶어서."
최기석은 건네받은 작은 상자의 포장을 뜯었다.
엠마의 선물은 핸드크림이다.
"봉합 연습할 때 봤는데 손이 너무 거친 것 같아서 샀어요."
"우와. 진짜 마음에 드는데요?"
최기석은 핸드크림을 손에 바르고 향을 맡아보았다.
은은한 꽃향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저는 할 일이 있어서 그만 가 볼게요."
엠마가 황급히 의국으로 향했고 최기석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팔을 팔자로 흔드는 아줌마 걸음에 웃음이 터졌다.
* * *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할 일을 마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스미스의 췌장암 수술 스크럽이 두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방법이 좋을까?'
턱을 쓸어내리며 고민에 잠겼다.
평소라면 최선을 다해서 수술을 도우면 된다.
당연하면서도 어렵지 않은 일.
하지만 오늘은 목표가 다른 때와 달랐다.
오늘 스크럽의 목표는 스미스에게 빈틈을 보여 보이지 않는 손 디버프를 얻는 일이다.
디버프를 획득한 후 이겨 내야 신규 임무의 재료 아이템을 얻을 수 있기에.
"미스터 최. 무슨 고민 있어?"
곁에 앉은 제니퍼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