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서 (1)
"무슨 일인데?"
"수술 끝나고 쉬려는데 다들 바쁜 것 같아서. 미스터 최, 시간 있으면 같이 쉴래?"
"좋아. 1층에서 커피라도 한잔하자."
두 사람은 병동을 떠나 카페에 자리 잡았다.
"그나저나 미스터 최. 진짜 대단해."
"뭐가?"
"벌써 메이죠에 스타가 됐잖아. 자살 환자 구한 일로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도 받고 매스컴도 탔잖아. 게다가……."
라훌이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벌써 첫 집도까지 했다며?"
"충수 절제술 말하는 거지? 응급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어. 레지던트들 대부분이 다른 병원 세미나에 갔었으니까."
"그래도 부럽다. 신규 레지던트 중에서 제일 먼저 집도에 성공했잖아."
본래 메이죠의 신규 레지던트들은 한 달이 지난 후부터 간단한 개복술이나 충수 절제술 등을 집도한다. 그런데 최기석은 일주 차에 이미 집도를 끝냈다.
심지어 복강경을 이용해서 말이다.
신규 레지던트 최고의 실력자는 최기석이다.
의국 내에서는 이미 그런 소문이 떠돌았다.
"너나 다른 사람들도 금방 따라올 텐데. 뭐."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거야."
최기석은 커피를 마시고 라훌을 응시했다.
지금은 허허실실하고 있지만 라훌은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그는 최기석을 제외한 레지던트들 중에서 정치력이 가장 높았다.
하이어 시스템으로 조기 진급하겠다는 포부도 밝혔고 말이다.
경계 대상 1호라고 할까.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인도 의료는 어때?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인도의 의료라……."
라훌이 턱을 쓸어내렸다.
"썩 좋은 편은 아니지. 인구 밀도에 비해서 의사가 턱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병원들도 대부분 대도시에 몰려 있으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까지 전염병이나 폐결핵으로 죽는 경우도 많아."
"……."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의료관광은 발달했지. 다른 나라에 비해 진료비가 싸거든. 그래서 외국 사람들한테 메디컬 비자를 주기도 해. 한국은 어때?"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특징 중 하나는 전국민건강보험제도가 빠르게 자리 잡았다는 거야."
"……."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고 12년 만에 전국민건강보험제도가 이뤄졌거든. 이건 전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하지 못했던 일이지. 물론 빨리 추진하는 바람에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
"그리고 이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돈 잘 버는 과에 의사가 심각하게 몰려 있어. 그래서 흉부외과나 산부인과, 비뇨기과 같은 곳은 대학병원에서조차 레지던트가 없어. 아주 심각할 정도로."
"하아……. 의료문제는 어느 나라에서든 심각한 것 같다."
라훌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의료제도나 시스템은 쿠바가 발달했다고 하더라. 전국민무상의료체계에 패밀리 닥터까지 있고 의료기술하고 의학기술도 최고수준이라고 하던데?"
"쿠바가? 정말?"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 오죽하면 쿠바에 의료천국이라는 별칭이 붙었겠어."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들은 쿠바의 의료 수준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쿠바에 대해 아는 건 '체 게바라'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은 각국의 의료제도를 화제로 한참 대화를 나눴다.
"미스터 최, 혹시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
라훌이 헛기침하고 화제를 돌렸다.
"내일 췌장암 환자 스크럽이 있는데 나 대신 서줄 수 있을까?"
"왜?"
"너한테 떠넘기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내일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몸 상태가 완전히 꽝이야."
"그럼 내가 할게."
최기석은 흔쾌히 대답했다.
스미스의 수술 보조는 디버프를 얻을 좋은 기회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라훌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자 증상에 근육통, 진단명에 피로가 떠올랐다.
사실 그는 스크럽을 부탁하는 라훌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스미스의 수술에 보조로 들어간 신규 레지던트는 없었다.
즉 이번 췌장암 수술이 최초 케이스인 것이다.
아마 라훌은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쓰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스미스가 신규 레지던트의 보조를 어떤 식으로 평가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말이다.
정치력이 높은 라훌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암흑 인장을 얻는 일이 아니었다면.
그가 아프다는 거짓말을 했다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으리라.
"고마워, 미스터 최. 오늘 일은 잊지 않을 게."
"이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최기석은 라훌과 대화를 나누다가 병실로 돌아갔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았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의국에서 입원 환자 처방을 내리고 있었다.
E.
M.
R이 익숙하지 않을 때는 단순 처방 하나 내는 데도 애를 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 감고도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그의 습득이 빨랐다기보다는 메이죠의 E.
M.
R 자체가 워낙 접근성이 좋았던 덕분이다.
"으라차차!"
시원하게 기지개 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방.
동기들 대부분이 스크럽에 들어갔고 짝꿍인 모건은 라운딩 중이다.
최기석은 가만히 눈 감고 수술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메이죠에 처음 와서 참관한 수술.
전설의 심장 - 폐 동시 이식술을 말이다.
다시 돌이켜보고 있음에도 당시 벅찬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렇게 어려운 수술은 언제쯤 집도할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뛰어넘고 싶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까…….'
상태창을 열어 지금까지 획득한 P.
P를 확인했다.
현재 보유한 P.
P는 42,000.
팔로 4징증으로 아파했던 이주희에게 받은 레전드 아이템 시간을 넘어서.
이를 사용하는데 이제 고작 8,000 P.
P가 남았다.
필요한 P.
P는 대략 3개월 안에 마련할 수 있을 듯싶었다.
과연 최초의 레전드 아이템은 어떤 능력을 보여 줄까.
상상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이이잉.
갑자기 울리는 콜폰.
최기석은 곧바로 통화를 연결했다.
"일반외과 기석 최입니다."
[네, 선생님. 여기 소화기내과인데요. 응급실에서 환자 진료 중인데 잠깐 와주세요.]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응급실로 내려가자 소화기내과의가 한 환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환자분인가요?"
"네. 복부 초음파랑 CT 찍어 봤는데 만성 췌장염이에요. 아무래도 외과에서 수술해야 할 것 같은데."
"확인해 볼게요."
최기석은 자리에 앉아 검사 결과를 살폈다.
췌장의 여러 부위에 협착이 발견되었고 췌관은 상당 부분 석회화가 진행되었다.
확실히 내과적 치료로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일반외과에서 온 기석 최입니다. 어디가 제일 불편하시죠?"
환자 가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속이 엄청나게 아픕니다. 그동안은 참을 만했는데 어제부터 통증이 너무 심해져서……."
가일이 얼굴을 찡그리며 상복부를 가리켰다.
"통증이 나타난 후 체중이 급격하게 빠지지는 않았나요?"
"네. 한 5킬로그램은 빠진 것 같아요."
"대변도 잘 못 보시죠?"
그의 질문에 가일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인차 가일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자 만성 췌장염 진단이 나왔다.
더불어 상태는 응급이고 경과는 불량이다.
"내과 선생님. 이 환자, 외과에서 받겠습니다."
"네. 그럼 수고해요."
소화기내과의가 떠나면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럼 저 수술 받아야 합니까?"
"네. 일단 입원해서 내시경역행성담췌도조영술(ERCP)을 비롯해 추가적인 검사를 더 받으실 겁니다. 늦어도 3~4일 후에 수술이 있을 거고요."
"닥터 최. 기왕 수술받을 거면 말입니다."
가일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수술을 다음 주로 미룰 수 있습니까? 내가 변호사인데 이번 주에 중요하게 처리할 소송이 있어요. 그걸 끝내고 수술을 했으면 좋겠…… 으으으윽!"
가일이 고통스런 표정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방금 본인의 질문에 본인이 답한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
"지금 상태로 이번 주를 버티며 소송을 치르는 건 무리에요. 당장 입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일, 소송이 목숨보다 소중합니까?"
최기석의 일침에 가일이 입을 다물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중년 여성과 여학생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보! 괜찮아요? 선생님, 우리 남편 어디가 아픈 거죠?"
가일의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질문했고 어린 딸은 가일의 품에 안겼다.
최기석은 만성 췌장염에 대해 설명하고 입원과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입원할게요."
가족들의 등장에 가일이 백기를 들었다.
최기석은 입원 오더를 내린 후 가일과 그의 가족이 병실에서 대화를 나누도록 했다.
'슬슬 움직여 볼까?'
최기석은 병실을 돌며 환자를 살피다가 마지막으로 외과 중환자실을 찾았다.
제이스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제이스는 오전 회진 시간에 급성 심근경색을 겪었다.
이후에는 응급으로 내과에서 내시경 치료까지 받았다.
간이식 대기기간이 길어지면서 급성 식도정맥류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과의 처치로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결과 식도정맥류 진단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기자가 빨리 나타나야 할 텐데…….'
최기석은 제이스에게 격려를 걸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그런데 누군가가 불쑥 화장실에서 튀어나와 그의 앞길을 막았다.
제이스의 아들 윌리엄이다.
"선생님. 아버지 상태는 어때요?"
"썩 좋지는 않아요. 이식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더 악화 될 겁니다."
"간이식, 제가 할게요."
윌리엄의 깜짝 선언에 최기석은 몸을 들썩거렸다.
간이식이라면 못하겠다고 펄쩍 뛰던 윌리엄이 아닌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선생님이 알 필요 없잖아요."
윌리엄이 도끼눈을 뜨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적합성 테스트를 해 보고 맞으면 입원하죠."
"네. 근데 여기 대기실에 조금 더 있다고 테스트 받아도 되는 거죠?"
"그래요. 마음의 준비가 되면 다시 찾아와요."
최기석은 윌리엄과 헤어진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윌리엄이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
아무래도 그것은 줄리에게 들어야 할 듯싶었다.
"……."
"……."
병동에 들어서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스테이션 쪽 복도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으며 간호사들조차 온데간데없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굉음이 터졌다.
펑!
귀가를 때리는 소리, 이건 분명 총소리다.
최기석은 긴장감을 일깨우며 조심스럽게 소리의 근원지로 이동했다.
병실이 늘어선 복도에 모건과 한 남자가 대치중이다.
남자는 모건에게 총을 겨눈 채 한바탕 욕을 쏟아붓고 있었다.
최기석은 뒤늦게 남자를 알아차렸다.
남자의 이름은 릭.
얼마 전 수술 중 아버지를 잃고 병동에서 난리를 피웠던 적이 있었다.
'이런!'
릭에게 시선을 거두고 벽 뒤에 숨어서 신고하려는 찰나, 그와 정통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마침 잘 왔다. 뻐킹 아시안. 네 얼굴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벽 뒤에서 나와. 안 그러면 깜댕이를 죽여 버릴 거야. 빨리!"
릭의 총구가 최기석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