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바람(2)
"불러라. 불러라."
"최기석. 최기석. 최기석."
민주혁이 분위기를 몰고 가자 다른 선생님들까지 가세했다.
최기석은 쥐구멍에 숨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인마. 뭐해? 빨리 안 일어나냐?"
"······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향해 쏟아지는 초롱초롱한 눈에 부담감이 눈처럼 불어났다.
"노래는 못 부르지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최기석은 가볍게 목을 풀고 숟가락 마이크를 들었다.
지금 기댈 수 있는 건 유일무이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 천생만남뿐이다.
"5분 먼저 도착했어. 어떤 사람일까 상상을 했지. 키도 크고 예뻤으면 난 좋겠어~"
최기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못 부르는 노래를 다른 사람 앞에서 부르려니 음색이 엉망이다.
노래를 듣던 선생님들이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최기석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여기까지입니다."
최기석이 서둘러 자리에 앉자 선생들이 다시 박수를 쳤다.
말 그대로 예의상 치는 박수다.
"잘했어."
윤지혜가 담담하게 최기석을 칭찬했다.
"와······ 완전 못 불렀는데요?"
"사람들은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거야. 좋은 노래를 듣고 싶었으면 노래를 틀었겠지."
"그럼 부막내인 제가 노래 한 곡 뽑아 보겠습니다. 박수!"
짝. 짝. 짝. 짝.
민주혁은 스스로 박수를 유도하고 노래를 불렀다.
왕년에 노래방을 다녔는지 노래솜씨가 상당했다. 구성진 트로트에 몇몇 선생님들은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노래가 끝나자 제대로 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인사를 받았는데 우리도 가만있을 수 없지?"
"우리가 아니라 저잖아요."
윤지혜는 의외로 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윤지혜의 노래가 시작됐다.
과거 드라마 OST로 인기를 모았던 발라드 곡이다.
"언젠가 이 눈물이 멎기를, 언젠가 이 구름이 걷히고 포근한 햇살이 이 눈물을 멈춰 주길······."
흉부외과에 들어온 지 이틀 만에 얼음마녀라는 별명을 얻은 윤지혜가 애절한 발라드를 불렀다.
음정은 정확했으며 가사 하나하나에 감정이 실렸다.
예상치 못한 노래실력에 스태프들이 입을 떡 벌렸다. 더불어 다른 테이블까지 윤지혜의 노래에 집중했다.
그녀의 고운 음색이 식당을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짝! 짝! 짝! 짝!
"윤 교수님 멋있어요."
"윤 교수님 대박."
스태프들이 입을 모아 윤지혜를 칭찬했다.
윤지혜가 단번에 회식 자리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노래로 무르익은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야. 밖에 좀 나가 봐."
민주혁이 최기석에게 귓속말을 했다.
"왜요?"
"윤 교수님이 아까부터 안 보여."
최기석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입구 쪽을 뒤진 후에 화장실이 외진 골목으로 향했다.
그곳에 윤지혜가 있었다.
윤지혜는 벽 쪽에 쭈그려 앉았는데 그 앞에 참치 캔이 놓였고 유기견이 참치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교수님. 뭐하세요?"
"화장실에 가다가 이 강아지가 보여서."
최기석은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처음 봤다. 윤지혜도 사람이고 웃을 줄 안다는 게 놀라웠다.
"있잖아."
"······."
"버림받는다는 건 참 힘든 일이야. 그렇지?"
윤지혜가 중얼거렸다.
뭔가 사연이 느껴지는 말이라 최기석은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제 가자."
"네."
두 사람은 함께 회식장소로 돌아갔다.
* * *
회식이 끝나고 이 주가 지났다.
수술 스케줄이 없었기에 최기석은 권지석을 도와 병동 처치에 나섰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오전 10시가 되었다.
"나 갔다 올게."
"꼭 1등 먹어라."
"당연하지."
최기석은 권지석의 응원을 받으며 별관 2층에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오늘은 성형외과장 배 봉합대회가 있는 날이다.
대회 참가 인원은 50명.
인턴 중 봉합의 일인자가 누구인지, 레지던트 중 봉합의 일인자가 누구인지 가리게 된다.
우승자에게는 상금 200만원, 준우승자에게는 100만원, 3등에게는 50만원이 포상으로 주어진다.
원래는 민주혁도 참여해야 했지만 일이 생겨서 참석을 못하게 됐다.
회의실로 들어가자 제법 많은 인원들이 이미 자리를 잡았다.
일부는 뜨개질하며 손을 풀었다.
"기석아."
정설화가 아는 체를 했고 최기석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너도 왔구나."
"응. 레지 선생님들이 한번 나가 보라고 해서."
"열심히 해."
최기석은 정설화에게 격려를 걸어 주고 20번 숫자가 적힌 자리에 앉았다. 한 테이블에는 5인이 앉을 수 있는데 사전에 미리 번호를 맞추어 두었다.
"자신 있냐?"
맞은편에 앉은 남강준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봉합하는데 왜 자신이 왜 필요해? 그냥 하면 되지."
"역시 생각 없네."
남강준은 대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주일 전부터 열심히 봉합술을 갈고 닦았다. 최기석 정도는 가볍게 눌러 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러니까 봉합은 원래 생각 없이 하는 거라고."
최기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윽고 성형외과장을 비롯해 대회 감독을 맡은 레지들이 우르르 회의실로 들어왔다.
간단한 개회사가 이어지고 본격적인 대회가 시작됐다.
상위 6명을 가리는 예선은 단순 단속 봉합이다.
가장 기초적인 술기로 찢어진 부위를 한 땀 한 땀 꿰매는 것이다.
"제한 시간은 5분. 봉합의 개수와 봉합의 결속 정도로 점수를 매기겠습니다. 시작!"
진행자의 외침에 인턴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개중에서 여유로운 이는 최기석뿐이다.
최기석은 느긋하게 봉합사의 포장을 벗기고 니들홀더를 손에 쥐었다.
끼기기긱.
니들홀더에서 나는 소리가 경쾌했다.
'달려 볼까?'
니들홀더로 바늘침 부분을 잡은 후 봉합 모형에 운침했다.
모형이지만 손맛이 제법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하려는 마음이 싹 사라졌다.
최기석은 눈을 빛내며 봉합에 스피드를 올렸다.
'다들 잘하네.'
성형외과 레지던트 전상혁은 자신이 맡은 테이블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회라고 준비했는지 전반적인 실력이 좋았다.
비록 난이도가 제일 낮은 단순 단속 봉합을 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의 시선이 문득 최기석과 남강준에게 머물렀다.
이쪽 테이블에서 두 사람의 실력이 독보적이다.
다른 인턴들은 주로 매듭에 애를 먹었는데 두 사람은 매듭을 무난히 끝냈다.
특히 최기석은 매듭법을 골라서 쓰는 여유를 보였다.
'젠장!'
남강준은 모형을 삼분의 일 가량을 봉합하고서 최기석을 힐끔 응시했다.
최기석이 그보다 몇 바늘 정도를 더 꿰맨 듯 보였다.
지고 싶지 않아서 열을 냈다.
"그만!"
전상혁의 외침에 인턴들이 도구에서 손을 뗐다.
이어지는 채점.
전상혁은 우선 매듭의 개수를 살폈고 매듭 간의 간격과 균일함을 살폈다.
그중 두 명은 매듭만 많이 지었고 봉합의 상태는 영 엉망이다.
다른 한 명은 꼼꼼하게 봉합했지만 매듭의 개수가 적었다.
"으음······."
전상혁은 마지막으로 최기석과 남강준의 모형을 비교했다.
최기석의 매듭이 남강준보다 다섯 개 더 많았으며 정확도에서도 앞섰다.
"최기석 인턴. 결선."
"네."
최기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남강준에게 질 이유가 없었다. 혹시 손이라도 다쳤으면 모를까.
잠시 후 봉합대회 인턴부 결선이 시작됐다.
최기석과 조태호, 정설화를 포함한 세 명의 인턴이 뽑혔다.
"네 테이블에는 실력 있는 얘가 없었나 보지?"
조태호가 최기석을 도발했다.
"강준이가 있었던 걸 보면 그런 것 같네."
"입만 살아서······."
조태호는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작은 아버지가 최기석을 푸시하지 않으면서 계획이 어긋났다.
그래서 이번 대회에서라도 우승해 최기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본선은 단속 연속 봉합입니다. 삼 분 동안 가장 많은 봉합을 한 사람이 우승이에요."
본선 진출자가 테이블에 앉자 진행자가 입을 열었다.
단순 연속 봉합이란 단순 단속 봉합와는 정반대의 봉합법이다.
단속 봉합이 상처를 꿰매고 매번 매듭을 짓는다고 하면, 연속 봉합은 처음 운침한 자리에 매듭을 짓고서 봉합이 끝난 지점에서 한 번 더 매듭을 짓는다.
즉 매듭이 처음과 끝에만 있기에 자칫하면 중간에 봉합사가 풀리거나 끊길 위험이 있었다.
"기석아. 파이팅."
"너도."
최기석은 웃으며 정설화와 응원을 나눴다.
"자. 그럼 본선 시작합니다!"
진행자의 외침에 인턴들이 눈에 불을 켰다.
끼기기기긱.
최기석은 니들홀더로 봉합 바늘을 조인 뒤 봉합을 시작했다.
솔직히 누구를 견제할 필요가 없었다.
어우최(어차피 우승은 최기석)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결선의 막이 오른 지 1분 째.
"아······."
인턴 한 명이 탄식의 한숨을 쉬었다. 실을 단단하게 당겨 두지 않아서 흐물흐물 퍼졌다.
한마디로 망한 셈이다.
지금 와서 다시 봉합을 한다 해도 다른 사람을 쫓아갈 수는 없었다.
단순 단속 봉합과 단순 연속 봉합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탈락으로 이어진다.
'병신.'
조태호는 옆에 앉은 인턴을 힐끔하고 중얼거렸다.
손재주는 타고나야 한다.
노력으로 얼마만큼 실력을 올릴 수는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재능이라는 것이다.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본인이야말로 대회의 우승자라고 조태호는 생각했다.
짧지만 치열한 시간이 지났다.
"이제 끝! 손 떼요."
진행자의 외침에 본선에 오른 인턴들이 손에 쥐고 있던 도구들을 내려놓았다.
'저 자식이?'
조태호는 최기석의 봉합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압도적으로 1등을 할 거라 생각했건만 최기석도 제법 봉합 부위가 길었다.
언뜻 봐서는 그와 차이점이 안 느껴질 정도다.
"어때?"
"둘 다 잘했는데요? 운침 부위도 균일하고 실도 적당히 팽팽해요."
"그럼 더 많이 한 쪽을 뽑아야지."
전상혁과 전임의가 최기석과 조태호의 모형을 번갈아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럼 최종 순위를 발표합니다. 3등은 정설화 인턴, 2등과 1등은 아주 간발의 차이로 갈렸는데요. 최기석 인턴이 1등입니다."
"네?"
조태호가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2등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제가 왜 2등이에요?"
"와서 봐요."
조태호는 뒤늦게 최기석의 모형과 본인의 모형을 비교했다.
최기석이 그보다 세 바늘 가량을 더 운침했다.
심사위원의 말대로 간발의 차이로 진 것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시상이 시작됐다.
병원에서 처음 열린 봉합대회 인턴부의 우승자는 흉부외과의 최기석.
레지던트부 우승자는 대장관외과 김대현이 차지했다.
"어떻게 생각해? 둘이 붙으면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
성형외과 과장인 나철범이 최기석과 김태현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게임이 될까요? 아무리 그래도 인턴하고 레지던트인데."
성형외과 치프 이태만이 우려를 표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진심이세요?"
"넌 레지던트 쪽 심사 보느라 인턴 쪽 못 봤잖아. 저 녀석 물건이야."
나철범이 최기석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태블릿 PC 걸고 특별 매치 가자."
"알겠습니다."
이태만은 진행자에게 나철범의 뜻을 전했다.
"자. 대회가 끝나기 전에 특별 매치를 진행하겠습니다. 인턴 우승자와 레지던트 우승자의 한판 승부를 펼칩니다. 이 대결의 승자에게는 태블릿 PC가 주어집니다."
진행자의 말에 최기석과 김대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식적인 대회 스케줄은 모두 끝났기 때문이다.
"너희 둘이 한 번 붙어 봐. 재미있을 것 같아."
"선배. 아무렴 제가 인턴한테 지겠어요?"
이태만의 말에 김대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과장님은 생각이 다른 가 봐. 인턴 너도 불만 없지?"
"네."
최기석은 담담하게 테이블에 앉았다.
"힘내. 기석아. 너라면 할 수 있어."
정설화가 최기석의 등 뒤에 서서 어깨를 주물렀다.
권투 시합 전에 코치가 선수의 어깨를 풀어 주는 듯한 분위기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
특별 매치가 성사되면서 테이블 주변으로 참가자들이 우르르 몰렸다.
이제 모두의 눈이 두 사람의 손에 집중되었다.
"특별 매치는 수직 매트리스 봉합법으로 진행합니다. 매듭을 매는 법은 자유, 봉합의 견고함과 매듭의 개수로 채점합니다. 준비됐어요?"
"네."
최기석과 김대현이 동시에 대답했다.
스페셜 매치가 시작되기 전, 최기석은 지금까지 왼손으로 들었던 니들홀더를 오른손으로 들었다.
자. 이제 봉인을 풀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