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바람(1)
찰나의 순간이 영겁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얼어붙은 심장 패시브 덕분에 머리는 차갑게 유지할 수 있었다.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을 쓰고 미친 듯이 강하나를 향해 달렸다.
민첩성이 상승하면서 강하나와의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졌다.
트럭과 강하나의 거리가 지척인 상황.
최기석은 강하나를 끌어안은 채 인도 쪽으로 몸을 날렸다.
후우우웅.
트럭이 그대로 횡단보도를 지나쳐 도로를 내달렸고 두 사람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괜찮아요?"
최기석은 먼저 일어나서 강하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강하나의 눈동자가 살짝 풀려 있었으며 몸은 아직도 딱딱하게 굳었다.
충격이 심한 모습이다.
"다 끝났어요."
최기석은 강하나를 품에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무······ 무서웠어요. 흐흐흐흑."
강하나가 최기석의 품에서 흐느껴 울었고 최기석은 강하나가 진정할 때까지 등을 두들겨주었다.
"이제 괜찮아요."
강하나가 최기석의 품에서 떨어져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바보같이 왜 달려왔어요? 그러면 최 선생님까지 위험한데."
"그럼 강 쌤이 치이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요?"
"그건 아니지만······."
강하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졸음 운전인가?"
최기석은 트럭이 지나간 길을 응시했다.
운전하다가 졸았던 게 아니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횡단보도를 질주할 수 없었다.
"다행이네요. 강 선생님도 무사하고 야식도 무사해서."
최기석은 비닐봉투를 들고 강하나와 사이좋게 병원으로 돌아왔다.
병동 스테이션으로 도착하기 전 강하나가 최기석에게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짐 들어 준 수고비에요."
"이게 뭔데요?"
"확인해 봐요."
"이거······ 곶감이네요?"
최기석은 곶감과 강하나를 번갈아 응시했다.
수고비치고는 꽤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곶감이 면역력에 좋대요. 오는 길에 초 인턴 쌤이 생각나서 샀어요. 심장이식 수술받고 무리하는 게 좀 그래서요."
"잘 먹을게요."
"알면 됐어요."
최기석은 강하나의 짐을 스테이션까지 옮겨준 후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상태창을 살폈다.
강하나를 구한 순간 알림이 떴었다.
[특별 임무 살신성인을 수행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레어 젬 두 개를 획득하셨습니다.]
NEW [레어: 자연치유력 2배 상승]
NEW [레어: 질병저항력 2배 상승]
트럭이 덮칠 당시.
칼라일 효과를 믿고 강하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칼라일을 쓰지 않고도 강하나를 구했다.
덤으로 한 번에 레어 젬을 두 개나 얻었고 말이다.
이런 게 바로 꿩 먹고 알 먹기다.
최기석은 새로 얻은 젬을 응시했다.
두 가지 젬은 일종의 몸을 지켜주는 보호 젬이다.
이 젬들이 있다면 심장이식 수술 후의 후유증도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었다.
"최고를 향해서라······."
젬을 살피던 최기석은 송명진에게 새로 얻은 미션을 중얼거렸다.
아직 인턴인 그가 미션을 수행하려면 한참이 걸린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는 날에는 대한민국에 자랑스런 흉부외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고를 향해서.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떠올리며 최기석은 각오를 다졌다.
* * *
흉부외과에 픽스턴을 한 지도 어언 세 달 째.
최기석은 새로운 짝턴 권지석과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권지석은 타 대학 출신으로 기본적인 처치 능력이 좋았다.
그래서 상의하에 최기석이 한 번 더 수술실 보조를 맡았고 권지석이 병동 일을 맡았다.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최기석은 수술환자의 침상을 끌고 수술실로 향했다.
오늘은 장혁필이 집도를 하는 날이다.
흉부외과에 온 지 나흘 만에 펼치는 첫 집도.
어떤 솜씨를 보여 줄지 기대됐다.
'자, 그럼.'
최기석은 중앙 공급실에 도착해서 집도의인 장혁필과 제1보조인 윤지혜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장혁필은 액티스 스킬 두 개와 패시브 스킬 하나.
그리고 대인배라는 칭호를 가졌다.
외과적 처치 레벨은 7로 송명진보다 1.5가 낮았다.
윤지혜는 액티브와 패시브 스킬을 각각 하나씩 가졌으며 외과적 처치는 6이다.
"다들 준비 됐습니까? 오늘도 열심히 해 봅시다."
장혁필이 밝은 목소리로 스태프들을 다독였다. 이에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하얀빛이 스태프를 휘감았다.
[의욕 스킬을 받았습니다.]
[일시적으로 집중력, 자신감이 대폭 상승합니다.]
그랬다.
최기석의 격려 스킬과 비슷한 스킬을 장혁필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스킬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윽고 스태프들이 수술실로 들어가면 본격적인 수술의 막이 올랐다.
오늘 수술은 OPCAB(Off Pump CABG)
통칭 무 펌프 관상동맥 우회로 수술이다.
OPCAB는 인공심폐기를 사용하지 않고 협착된 관상동맥에 새로운 혈관을 이어 주는 수술이다.
인공심폐기를 이용하면 전신염증 반응, 색전증, 심정지로 인한 심근 손상이 있을 수 있는데 OPCAB를 펼치면 이런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또한 동맥경화가 심한 환자에게도 유용하다.
"잘했어."
타임아웃을 끝내자 장혁필이 최기석을 칭찬했다.
환자를 확인하는 절차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어렵지도 않건만 칭찬을 한 것이다.
최기석은 그가 다른 의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별일은 없겠지만 기사님도 긴장 늦추지 마세요."
"네."
장혁필의 말에 인공심폐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공심폐기를 쓰지 않는다고 해도 인공심폐기사는 꼭 필요했다.
인공심폐기가 필요한 응급상황이 올 수 있으며, 기계를 돌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할 일은 있었다.
"지금부터 무 펌프 관상동맥 우회로 수술을 시작한다."
장혁필이 집도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피부를 소독하고 피부를 절개한 후 톱으로 흉골을 반으로 갈랐다.
"메스."
메스로 심막을 절개하자 박동하는 심장이 보였다.
저 심장은 수술 내내 날뛰게 될 것이다.
저 심장 위에서 장혁필은 얼마만큼의 능력을 보여 줄까.
이윽고 장혁필과 윤지혜가 심외막 고정기를 환자의 심장에 부착했다.
심외막 고정기가 있어야 심장의 박동을 최소화하여 봉합을 편하게 할 수 있다.
"션트요."
윤지혜가 장혁필에 작은 침을 건넸다.
그러자 장혁필이 협착이 있는 좌전하행동맥에 션트를 삽입했다.
"메스."
장혁필이 메스를 들고 심근에 숨어 있는 좌측 내흉동맥을 떼어 냈다.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음에도 박리가 무척 깔끔하게 이뤄졌다.
자칫 동맥의 내막을 건드렸다면 대형사고가 터졌을 텐데.
칙! 칙! 칙!
최기석은 타이밍을 봐서 가습 분무기를 뿌리며 수술 시야 확보에 나섰다.
"제법인데?"
장혁필이 최기석을 응시했다.
눈이 웃고 있었다.
"마취의 선생님. 환자 체온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장혁필의 지적에 마취의가 조치에 나섰다.
이어지는 수술.
윤지혜가 심장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고 움직여 시야 확보에 나섰다.
"이제 됐어."
장혁필이 박리한 내흉동맥으로 협착이 있는 좌전하행동맥으로 가는 새로운 우회로를 만들었다.
문합 과정은 평온했다.
박동하는 심장 위에서 문합을 하는 게 아니라 응급실에서 단순 열상 환자에게 봉합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장혁필은 언제나 침착했고 제1보조인 윤지혜의 도움도 칼 같았다.
잠시 후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다들 고생했어. 내려가서 시원한 커피라도 한잔하자고."
수술실에서 나온 장혁필이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었다.
최기석은 장혁필의 뒤를 쫓으며 넓은 등판을 응시했다.
송명진이 고독한 절대자의 느낌이라면 장혁필은 모두를 팀으로 생각하는 리더로 보였다.
대체 왜?
이런 사람이 왜 조지환 밑에 있지?
* * *
그날 저녁.
모처럼 흉부외과 회식이 있었다.
조지환과 송명진, 당직의와 일부 의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이 병원 인근 고깃집에 모였다.
'하필이면······.'
최기석은 맞은편을 보고 혀를 찼다.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장혁필과 윤지혜가 앞에 앉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옆에 민주혁이 있다는 정도랄까.
"이렇게 좋은 식구들과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큰 영광입니다. 의진대 흉부외과를 위하여!"
"위하여!"
채애애앵.
장혁필의 건배사에 흉부외과 스태프들이 잔을 부딪쳤다.
"기석이는 왜 안 마셔?"
장혁필이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해 초에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음주는 삼가고 있습니다."
"심장이식 수술을? 그런데 지금 인턴을 하고 있다고?"
"네."
"대단하네."
장혁필이 혀를 찼다.
심장이식 수술 후에는 오랜 안정이 필요하다.
피로에 찌들어 사는 인턴 생활을 버티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다.
"교수님. 기석이는 관심 인턴입니다."
민주혁이 대화에 껴들었다.
"이 녀석이요. 초턴 때 제멋대로 흉강천자를 했어요."
"······."
"지금도 생각만 하면 아찔하다니까요. 실수라도 했으면 소송 걸릴 뻔했어요."
민주혁의 말에 조용히 있던 윤지혜마저 관심을 보였다.
"들을수록 대단한데?"
"운이 좋았습니다."
최기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과거 레지던트 3년 차까지 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특수한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천자에 성공하기는 한 모양이야?"
"네."
"그럼 됐어."
장혁필이 술잔을 비우며 말을 이었다.
"난 결과를 중요시해. 과정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고 해. 설령 초등학생이 천자를 해도 성공했으면 신경 안 써."
"교수님. 진심이세요?"
"암. 그렇고말고."
장혁필의 발언은 다소 과격했다.
민주혁은 뭐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밉보이기 싫어서 입을 다물었다.
"너 고기 못 굽네."
조용히 있던 윤지혜가 처음으로 한마디 했다.
"이쪽 고기는 너무 탔고. 이쪽 고기는 안 익었어."
"알겠습니다."
최기석이 집게를 집으려는 찰나, 윤지혜가 먼저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기석아. 두 분 앞에서 뭐하냐?"
민주혁이 얼굴을 찌푸리며 최기석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됐어. 지혜는 원래 고기 잘 구워."
장혁필이 미소를 지으며 윤지혜를 응시했다.
과연 장혁필의 말이 옳았다.
윤지혜는 환상적으로 고기를 컨트롤했다. 다 익은 고기는 상추에 위에 올려놓아 타는 것을 막았고 고기가 부족할 때쯤에 새로운 고기를 올렸다.
영양가 없이 고기만 뒤집던 최기석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최기석은 그런 윤지혜를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윤지혜가 고기 굽기에 달인이라니······.
뭔가 낯설면서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곁에 있는 민주혁이 어마어마하게 눈치를 줬기에.
"이거 먹고 싶어?"
윤지혜가 최기석과 고기를 번갈아 응시했다.
고기 집게를 뺏을 기회를 보고 있는데 그것을 고기가 먹고 싶어 하는 것으로 착각한 모습이다.
"자."
윤지혜가 최기석의 접시에 고기 한 점을 올렸다.
"좋겠다. 넌 윤 선생님이 고기도 챙겨 주네."
"너도 먹어."
민주혁의 푸념에 윤지혜가 그에게도 고기를 챙겨 주었다.
민주혁이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건 그렇고 조만간 병원에서 봉합대회를 연다고 하는데 두 사람은 생각 있어?"
장혁필이 화제를 돌렸다.
"봉합대회요? 우리 병원에 그런 게 있었나요?"
"새롭게 추진하는 계획이라고 들었거든? 아마 이번 달 안에 개최될 거야."
장혁필이 설명을 이었다.
대회는 성형외과 과장님의 주최로 열리며 채점 방식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상금이 빵빵할 거라고 했다.
"저야 자신 있죠."
민주혁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답했다.
"오프일 때도 자주 봉합 연습합니다."
"기석이는?"
"저도 자신 있습니다."
최기석이 담담하게 답했다.
사실 그가 대회에 참석하는 것은 반칙에 가까웠다. 외과적 처치가 이미 상당 경지에 올랐으며 지금은 왼손마저도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원래 왼손잡이인가?"
장혁필의 시선이 젓가락을 쥔 최기석의 왼손을 향했다.
"아닙니다. 송 교수님께서 왼손도 자유자재로 써야 한다고 하셔서 연습 중입니다."
"하긴 송 교수님 밑이라면 배우는 건 확실하겠지."
장혁필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회식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었다.
그런데 민주혁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들. 막내 기석이가 노래 한 곡 뽑아 보겠다고 합니다."
"선배. 저 노래 못 불러요."
"너무 자신 있는데 박수가 없어서 못 부르겠다고 하는데. 어쩌죠?"
민주혁의 말에 최기석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