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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투 플레이어-311화 (완결) (311/332)

# 311

311. 불완전한 미래를 향해(4)

“…….”

지수는 비어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본래라면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할 자리.

그리 오래 끼고 다닌 것도 아니었건만 허전하게만 느껴졌다.

“……언니?”

그때 품에 안겨있던 린이 눈을 떴다.

워낙 큰 힘을 사용했던 탓인지, 이미 린의 몸은 다시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여긴…….”

“지구예요, 린.”

“지구?”

흐릿한 눈을 하던 린의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그 눈동자에 담겨 있는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아자토스를 쓰러트린 건가요?!”

“네.”

“그럼 저, 저희가 이긴 거죠?”

지수의 옷깃을 꽉 부여잡으며 말하는 린에게 지수는 답하지 못했다.

그저 파란 지구의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런 지수의 모습에 린은 묘한 불안함을 느꼈다.

혹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일까.

린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린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깨달았다.

함께 외우주에 다녀왔던 악마들을 중심으로 민아나 창우와 같은 디어사이드의 길드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지수 언니.”

린은 주변의 광경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가장 먼저 눈에 띄어야 할 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한…… 아저씨는요?”

망설임이 담겨 있는 린의 말에 하늘을 향했던 지수의 눈이 린에게 향했다.

“조금.”

린은 이토록 여린 지수의 음성을 처음 들었다.

마치 우는 것 같은 물기 어린 목소리.

하지만 지수는 울지 않았다.

“……오래 기다려야 할 거 같아요.”

그렇게 말한 후, 다시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파란 하늘 저편에 있는, 세상의 끝을 향해.

린은 지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건 조금 후였다.

***

본디 새하얗던 무명의 방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

새하얀 빛의 파편들과 뒤섞여 끊임없이 요동치는 혼돈의 구현.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하, 하하하.”

출렁이는 혼돈의 물결 위에 떠 있는 대지의 파편.

겨우 사람 하나가 누울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을 지닌 그곳에 한 인영이 쓰러져 있었다.

거인왕 이미르.

녀석은 허망한 얼굴로 계속해서 웃어재꼈다.

“설마, 그런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남겨둔 수가 있을 줄이야…….”

이미르는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떨리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이미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회복되었던 신격들도 새어나가며 흩어져가고 있었다.

불멸의 존재이던 거인왕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최종병기라는 거지.”

나는 그에게 태연히 답했다.

녀석은 무너지는 자신의 몸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최종병기라기엔 그다지 대단한 존재는 아니다만…….”

그 말에 내 뒤에 잠자코 서 있던 백설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미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백설이는 신수와 린의 피로 태어난 기린아였지만 신격을 지니지 못했다.

만약 이미르가 허를 찔리지 않았다면 쉽게 마법을 해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뭐, 마법 실력만큼은 백설이가 크게 달리는 건 아니다만 신격이 문제지.

“얼마냐 강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지 아닌지가 중요한 거다. 너라면 알 텐데?”

“그래, 그 말이 맞다.”

이미르는 부서져 흩어진 자신의 손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올려보았다.

그의 마법을 돌파하며 생긴 상처로 나 역시 그다지 멀쩡하진 못했다.

이마의 핵이 부서진 걸 제외하면 멀쩡하던 이미르와 비하면 오히려 내쪽이 상처가 컸다.

솔직히 말해서 서 있는 것도 상당히 힘겨웠다.

“후회할 거다, 김세한.”

이미르는 말했다.

“우리는 완전한 세계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것을 너는 스스로의 손으로 파괴시킨 거다.”

시스템과 퍼블리셔에게 통제되는 세계.

비록 자유에 제한을 받을지 몰라도, 우주는 영원히 존재하며 에너지는 끝없이 순환되었을 것이다.

영원불멸한 평화.

이미르는 그런 미래를 바랐다.

하지만 이젠 그런 미래는 오지 않는다.

내가 시스템을 파괴할 테니까.

그럼 이제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통제할 존재는 사라지게 된다.

무질서한 우주에 어떤 미래가 닥쳐올지는 이제 누구도 알지 못한다.

“완전한 세계는 없어.”

분명 시스템의 통제를 받는다면 문명이 발전된 별간의 전쟁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서로 힘을 모아 싸웠던 신들도 서로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이 일어나게 될 테지.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절대적인 존재는 없어졌으니까.

“아마 너도 알겠지만, 시스템이 없는 세계는 불완전해.”

불합리하며 올바르지 못한 이 세계.

불완전하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

“하지만 그건 다르게 말하면,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거지.”

모든 게 정해진 세상은 재미가 없다.

꿈도 없고, 희망도 존재할 필요 없다.

그것이 올바른 것인가?

수많은 가능성을 희생하면서도 유지되는 영구불멸적인 평화가 옳은가?

“뭐, 어쩌면 네가 옳을지도 몰라.”

미래에 시스템이 존재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희생이 있을지 모른다.

우주의 끝이 찾아와 모든 게 사라질지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긴 건 나다.”

내가 틀렸다면, 언젠가 그것을 수정할 이도 나타나게 될 테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잘 가라, 이미르. 너도 꽤 대단한 놈이었어.”

내 가벼운 어조에 이미르는 낮게 웃었다.

“……크크크.”

녀석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계속해서 웃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보석이 부서진 그의 이마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그의 전신이 자색의 빛으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녀석은 웃던 걸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아니.”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눈으로.

“이 싸움에 승자는 없을 거다.”

그것이 이미르의 마지막 말이었다.

부서져 내리는 그의 육체는 자색의 빛무리로 화에 점차 동글게 뭉쳤다.

마치 수많은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빛의 입자들은 나의 손짓에 따라 조금씩 형태를 변하기 시작했다.

이미르가 가지고 있던 열쇠의 반쪽.

그리고 시스템의 반쪽.

그것을 분리시켜 한곳에 뭉친다.

이제 내가 가진 시스템의 반쪽과 함께 파괴시키면 된다.

지수가 준 약혼반지를 사용하면 가능하겠지.

우선 시간이 없으니 지구로 가는 문을 연 뒤에 파괴를 하면…….

‘응?’

문득 나는 이미르에게 얻은 시스템의 핵에서 묘한 기운을 느꼈다.

동시에 이미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이 싸움에 승자는 없을 거라는 말.

“세한.”

그때, 내 어깨 위에 떠 있던 이드라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마무리는 내가 하마, 지금 몸이 성치 못한 그대보다는 내가 하는 게 날 터이니.”

시스템의 핵과 열쇠를 다루는 건 확실히 나보다 이드라가 뛰어났다.

뭣보다 지구로 향하는 문을 열기 위해선 이드라의 도움이 필요했다.

본래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그럴 수 없어.”

“무슨 말을 하는 게냐. 혹시 그대가 하려고? 허나 지금 그 몸 상태론…….”

“이드라.”

태연하게 떠드는 이드라의 말을 나는 단호하게 끊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1회차의 나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드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읏?!”

나는 시스템의 힘을 이용해 이드라의 몸을 속박시켰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줄에 꽁꽁 묶여 버린 이드라는 제대로 하늘을 날지 못하고 툭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가, 갑자기 뭐 하는 짓이냐?!”

당황해서 소리치는 녀석을 나는 천천히 내 왼손 위에 올렸다.

그리곤 당돌하게 올려다보는 녀석의 이마를 가볍게 검지로 쿡 찔렀다.

“핵에 생긴 문제를 안 거지?”

“앗, 아니. 그건…….”

“다 알아. 임마.”

이제 와 이드라가 시스템의 핵을 부수겠다고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이드라 역시 시스템에 핵에 가해진 이미르의 마지막 발악을 눈치챈 것이다.

‘핵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지 못하게 이 공간에 고정시켰어.’

시스템의 핵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 해도 이미르가 사라졌던 장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핵을 가지고 지구로 귀환하지 못하도록 수를 쓴 게 분명했다.

물론, 그것이 유지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몇 분 동안은 무슨 짓을 해도 이동시킬 수 없다.

고작 몇 분.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무명의 방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이드라는 그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핵은 반드시 이곳에 부숴야만 한다는 걸.”

하지만 핵이 파괴되면 우리는 지구로 귀환할 수단이 전무해진다.

열쇠의 반쪽만으로는 지구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없었으니까.

이드라는 내 말에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대를 속이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구나.”

“네가 너무 정직한 거다.”

꿈과 환상을 다루는 마녀답지 않은 정직함이다.

이드라는 입을 오물거리다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역시 내가 남는 게 옳다. 나는 외신. 이곳에 남는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아.”

“단지 공간과 혼돈의 틈 사이에 끼어 영원히 방랑하게 될 뿐이겠지.”

“…….”

아무리 이드라라고 해도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나와 힘을 나누어, 인간에 가까워진 이드라는 혼자 힘으로 결코 귀환할 수 없다.

둘이 남는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컸다.

아자토스의 힘을 손에 넣었던 이미르가 아닌 한,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건 무리였다.

“하, 하지만!”

이드라는 뭔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을 살며시 눌러 막았다. 이드라가 무슨 말을 할지는 전부 알고 있었다.

나를 지구로 보내고 자신이 이곳에 남아 핵을 부순다는 거겠지.

당연히 나는 그것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언제나 나는 지켜지는 쪽이었어.”

최초는 지수였다.

지수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나를 지켰다.

두 번째는 루크.

그는 린을 내게 맡기고 세상을 구했다.

마지막은 이드라.

자신을 믿지 않았던 나를 끝까지 쫓아왔고, 끝내 지금의 내게까지 도달했다.

“그러니 이번엔 내 차례다.”

흔들리는 이드라의 동공이 보였다.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 같은 눈동자를 나는 애써 외면했다.

녀석이 뭐라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빛의 띠가 이드라의 입을 막았다.

“백설아.”

“네.”

“네게는 면목이 없다만…….”

“그래도 이번에는 부르기 전에 미리 언질을 주셨잖아요.”

“조금 일찍 주기는 했지만 말이야.”

지구를 떠나기 전, 나는 백설이에게 부를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미리 언질을 해두었다.

그때를 기다리며 모르간에게 되도록 좋은 장비를 받아 대기하라고 했었다.

설마 네크로노미콘까지 가져올 줄은 몰랐지만.

“마지막으로, 내가 무슨 말을 할지는 알고 있겠지?”

“네.”

나는 손 위에 있던 이드라를 조심스럽게 백설이에게 건넸다.

이드라는 보라색으로 빛나는 빛의 띠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미 아무런 힘이 없는 그녀가 빠져나올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제 문을 열 거야. 그 녀석을 부탁해.”

“알겠습니다.”

딱딱한 어조로 답하는 백설이의 백금발을 나는 살살 쓰다듬었다.

“돌아가면 린과 같이 놀아. 이제 싸울 일은 없을 테니까.”

“네.”

백설이는 그렇게 답하며 입을 꾹 닫았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게 꼭 울 것 같은 모습이다.

나는 그런 백설이의 머리에서 천천히 손을 떼고, 양손을 펼쳤다.

하늘에서 날아다니던 까마귀는 오른손에 앉았고, 왼손에는 이미르가 가진 시스템의 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 머리 위에는 이미르에게서 빼앗은 열쇠의 반쪽, 금색의 왕관이 밝게 빛났다.

“고마워.”

“……혹시, 또 도움이 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백설이의 등 뒤로 사람 한 명이 빠듯하게 지날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만들어졌다.

바로 지구로 향하는 통로였다. 백설이는 통로의 앞에 서서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녀석의 품에 안겨 있는 이드라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백설이는 통로의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번에는 갑자기 불러도 화내지 않을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백설이는 사라졌다.

동시에 지구로 연결되어 있던 통로도 닫혔다.

나는 방금 전까지 백설이가 있던 장소를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지금의 내게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 그럼.”

나는 오른손에 들려있는 시스템의 핵을 바라보았다.

마지막까지 이런 치졸한 짓을 한 이미르를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나였어도 비슷한 짓을 했겠지.

설령 패배하더라도 상대방을 엿 먹일 방법만을 궁리했을 것이다.

놈과 나는 정말 닮아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할 틈 따위는 없으니.”

이미 무명의 방은 쿵쿵 맥동하고 있었다.

마치 심장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길어야 2분 안에 핵을 파괴시켜야만 했다.

“후우.”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열쇠의 힘을 사용했다.

이미 내게 남은 신격은 없으니 열쇠의 힘으로 시스템의 핵을 조작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라면 시스템을 파괴하기 위해선 완전한 열쇠가 두 개가 모두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르의 열쇠를 제외하면 다른 열쇠는 전부 지구에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까마귀의 모습을 하고 있던 시스템의 핵이 빛으로 화하며 거대한 빛의 덩어리로 변했다.

나는 그것을 이미르의 핵과 서서히 겹쳤다.

웅웅웅!!

당장이라도 시스템이 되살아날 것 같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힘이 점차 서로를 탐하며 합쳐지려는 찰나.

나는 오른손을 그 빛 속에 찔러 넣었다.

“큭!!”

내 오른손에는 지수가 건네준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불멸자를 죽이는 힘이 담긴 이드라의 파편.

그리고 하나 더, 아주 특별한 힘이 내 오른손에 깃들어있었다.

이전에 지수를 구하기 위해 시스템 창을 부쉈을 때.

나는 다른 세계의 지수가 건네준 손도끼를 휘둘렀다.

그 도끼는 시스템 창을 부수는 동시에 수많은 파편으로 쪼개졌고, 그 파편은 내 오른손에 박혀 들어갔다.

그리고 그 파편은 지금도 내 오른손에 박혀 있었다.

광기의 마왕이 시스템을 부수기 위해 만들었던 지수의 도끼

그리고 1회차의 이드라가 건네준 불멸자를 죽이는 말뚝.

두 가지 힘이라면 시스템을 완전히 부수는 것도 충분할 터.

“크으으으아아아!!”

내 머리 위에 있는 왕관이 빛나며, 모든 힘을 오른손에 집중시켰다.

이 손에 깃든 힘을 해방시켜 시스템을 내부에서부터 폭파시키기 위함이었다.

‘할 수 있어.’

쿠구구궁!! 쿠쿵!!

아직 시스템은 건제하건만, 무명의 방은 이미 붕괴직전이었다.

분명 완전히 파괴되기까지 1분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방은 백색과 흑색이 섞이며 공간 자체가 분해되고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오른팔이 덜덜 떨렸다.

당장이라도 팔이 뽑혀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분명.’

최후의 힘을 쏟아 넣으며 나는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1회차의 나는, 날개를 잃은 까마귀였다.

다른 새들처럼 높이 날지도 못하고, 빠르게 날지도 못하는.

그저 조금 영악한 게 전부인 날개 없는 까마귀.

까마귀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다른 새들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그들처럼 되기를 선망하며 늘 지켜보았다.

허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날개 없는 까마귀에게 하늘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하늘은 무너졌다.

하늘을 날던 새들은 모두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며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건, 운 좋게도 날지 못해 땅에 있던 까마귀였다.

몇 번이나 생각했다.

왜 하필 내가 살아남은 거냐고.

하지만 그런 까마귀에게 모든 걸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졌다.

날개를 잃지 않을 기회가 주어졌다.

날개를 되찾은 까마귀는 하늘을 날았다.

다른 새들과 함께 날개를 퍼덕여 힘차게.

하늘의 저편까지.

세상의, 끝까지.

“드디어 도달했다.”

균열이 일어나며 순백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시스템의 핵을 바라보며 나는 웃었다.

1회차에는 결코 올 수 없었던.

“해피엔딩에.”

내 오른손을 중심으로 시스템이 산산조각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색으로 빛나는 빛무리가 새까맣고 새하얀 공간을 밝혔다.

아름답게 퍼져나가는 빛의 파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무명의 방 전체가 백색으로 물드는 걸 느꼈다.

맥동하던 공간이 멈추며 급격히 팽창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였네.’

산산이 부서지는 공간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너덜너덜한 오른손에 끼워진 약혼반지를 꽉 움켜쥐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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