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
276. 종말의 유토피아(3)
초상계 퍼블리셔.
지구로 향한 이미르를 지켜보며 대부분의 거인들을 퍼블리셔의 위대한 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가끔씩 이래줘야 건방진 놈들이 기어오르지 않는단 말이야.”
“근데 이번 전투에 지구에 가담하길 바란 신도 있다며?”
“그거야 지구 측 신이잖아. 정이라도 들었나보지.”
“과연 그렇구만.”
“지구의 신들은 참 이상하단 말이야. 올림포스만이 아니라 다 그래. 아직 어린 신들이라 그런 가 주제 파악을 못한다니까.”
이번 퍼블리셔의 침략에 올림포스측은 지구의 편에서 싸우길 희망한다고 퍼블리셔에 탄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당연히 이미르가 그런 올림포스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었고, 올림포스는 그저 지구가 멸망해가는 꼴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오늘따라 회사 내부가 소란스러운데 뭔 일이라도 있나?”
“지구의 일 때문에 그렇겠지.”
“아니…… 단지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대화를 나누던 거인이 묘하게 소란스러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중앙통제실 방향?’
퍼블리셔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한 장소다.
소란스러운 일 따위는 생길 리가 없기에 거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는 퍼블리셔의 정문을 지키는 경비일을 상당히 오랫동안 해왔기에 굉장히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봐, 위에 한번 올라가봐야…….”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한 거인이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동료에게 황급히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가슴에 날카로운 칼날이 박혀 있었으니까.
“컥! 왜, 왜?”
“그냥 기분이 더러워서.”
방금 전까지 즐겁게 나누던 얼굴에는 서늘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어린 신들이라 주제파악을 못해?”
“너, 너는……!”
“조금 더 살려둘까 했는데 이제 그만 죽어라.”
담담한 사형선고에 거인은 황급히 주변의 병력을 부르는 신호를 사용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상대의 동작이 더 빨랐다.
‘펴, 평범한 놈이 아니다. 최소한 최상급 신격을 지닌……!“
파각!
이마에 박혀 있던 보석이 부서지며 거인은 단번에 절명했다.
느릿느릿 쓰러지는 거인을 보고 있던 상대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자, 그럼 슬슬 통제를 해볼까나.”
차가운 얼굴의 미남자.
남성으로 변한 로키가 성큼성큼 퍼블리셔의 정문을 잠갔다.
평소라면 둘 말고도 거신병을 비롯한 다른 병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력은 지금 지구로 향한 상태였고, 거신병은 현재 중앙통제실에 있었다.
이미르로부터 거신병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을 얻은 이민아가 이미르가 지구에 가기 무섭게 중앙통제실로 끌고 올라간 것이다.
말하자면 바로 오늘이 퍼블리셔 역사상 가장 보안이 취약한 날이라는 거다.
“그럼 나머지는 맡길 게 이민아. 분명 너라면 잘 해낼 테지.”
지난 한 달 간 입고 있던 경비복을 갈아입으며 로키는 지면에 마법진을 그렸다.
촉매는 방금 전에 죽인 거인의 핵이다.
거인은 엄연히 시스템으로부터 탄생하는 존재. 날 때부터 신격을 지닌 괴물이니 이보다 좋은 촉매는 없었다.
‘퍼블리셔의 방화벽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초상계에서 지구로 이동할 수 없을 거야.’
분명 이제 사건이 터진다.
로키는 한번 라그나로크라는 대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었고, 지금은 분명 그때와 비슷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이 더 한가.’
그때는 고작 하나의 신화를 무너트린 사건이었지만, 지금은 우주를 아우르는 괴물을 몰락하는 것이다. 이런 대사건이 과연 두 번 다시 일어날 일이 있을까.
‘분명 넌 할 수 있을 거야. 여태 내게 즐거움을 알려준 너라면.’
로키는 지금쯤 지구에서 이미르와 싸우고 있을 세한을 떠올렸다.
지금 지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로키는 아주 잘 알았다. 이 상황을 뒤집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로키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릿광대’가 생각하는 건 달랐다.
***
하늘에서 불의 비가 쏟아진다.
세한은 그것을 손을 뻗어 투명한 장벽으로 모조리 막아냈다.
저 중 하나만 떨어져도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방어선이 단번에 무너질 게 분명했다.
“큭!!”
벌써 얼마나 이런 것을 반복했을까.
세한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이미 서울은 아비규환이었다.
방어선은 무너진 지 오래였으며, 수만 명에 이르는 플레이어들과 퍼블리셔 군세의 공격에 지구의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조금씩 줄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지구의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다른 별의 플레이어보다 월등히 높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성처럼 단숨에 모두 죽었으리라.
짝짝.
“……?”
“훌륭해, 훌륭해. 까마귀.”
이미르는 그런 세한을 향해 가볍게 박수를 쳤다.
숨을 헐떡이는 세한과 달리 이미르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반쪽자리 열쇠라도 열쇠는 열쇠인가.’
이미르가 강한 것도 있었지만, 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금색의 왕관이 문제였다.
열쇠의 반쪽.
우주를 지배하는 시스템을 통제할 수 있는 물건.
저것이 있다면 가뜩이나 거대한 신격을 지닌 이미르가 누구보다 전능에 가까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병력을 끌고 왔는데도 버티고 있다니 놀라워. 지구의 플레이어들은 정말 대단해.”
쉬이익!!
긴장감 없는 어조로 말하는 그의 등 뒤로 날카로운 검이 날아들었다.
세한이 허수공간을 열어 프라가라흐를 이미르의 등에 사출한 것이다.
“물론 가장 대단한 건 너야.”
어떤 검보다 빠르게 날아가며 신격을 지닌 존재도 베어낼 수 있는 프라가라흐가 공중에서 우뚝 멈췄다. 마치 시간이라도 정지된 것처럼 이미르의 등에서 딱 1센티미터 떨어진 장소에 고정되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다.’
세한이 프라가라흐를 움직이려고 해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르는 그런 세한의 상태를 아는지 싱긋 웃었다.
“나의 마법을 상대로 동등한 싸움을 이끌며 플레이어를 지킨 너의 실력 참으로 대단하고말고. 하지만 말이다…….”
이미르의 보라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그 정도로는 니알라토텝을 이길 수 없을 텐데?”
“…….”
“강한 건 안다만, 뭔가 이상하군.”
아무래도 이미르도 ‘잊혀진 자’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았다.
기억을 잃어 약해진 세한이 이상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흠, 그건 별로 상관없나.”
이미르는 엄지로 턱을 쓸며 천천히 세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마법인가 싶어 긴장하던 세한은 어째서인지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무슨…….”
“이제 실력은 다 본 것 같아서 끝을 낼 생각이다.”
세한은 이미르에게 있어서 불쾌한 존재였다.
퍼블리셔를 두려워하지 않고 대항했으며, 오랜 세월동안 이미르와 함께했던 반고마저 죽였다.
끝내 자신이 열쇠의 힘을 사용하며 직접 지구에 오게 만들었으니 어찌 불쾌하지 않겠는가.
“플레이어 따위가 한 일 치고는 대단하지만 더 보기 괴롭군.”
“이, 미르……!!”
세한이 비명처럼 외치는 순간, 뻗었던 이미르의 손이 지면을 가리켰다.
그러자 공중에 멈춰있던 세한의 몸이 지상으로 떨어져내렸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교전하고 있던 한 가운데에.
“커어억!!”
몸도 신격도 움직이지 않았기에 세한은 제대로 방어도 못하고 지면에 처박혔다.
그 충격으로 주변에서 싸우던 플레이어들은 혼비백산하며 넓게 퍼져 지면에 쓰러진 세한을 둥글게 에워쌌다.
“힉, 히이익!!”
조심스럽게 세한을 바라보던 플레이어들은 쓰러진 세한의 앞에 천천히 이미르가 공중에서 내려오자 시선을 마주치는 것도 두려웠는지 도망쳤다.
자칫하면 지금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세한과 같은 꼴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콰직!
“컥!”
엎드려 겨우겨우 고개를 들려던 세한의 뒤통수를 이미르가 짓밟았다.
바닥에 얼굴을 박고 피를 흘리는 세한에게 이미르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어째서 섭리를 어기는 것이냐. 그렇게 멸망하는 것이 싫었는가? 어째서 시스템을 거역하는 거지? 시스템을 거부하고, 지성체들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우주에게 해를 끼칠 뿐이라는 걸 모르나?”
우주는 유한하다.
무한한 것 같지만 분명 끝은 존재한다.
시스템은 그런 우주를 영구적으로 지속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문명이 발전하고 별과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면 그만큼 에너지가 순환되지 않는다.
시스템은 그 멈춰버린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고로 별의 멸망을 정한다면 그에 걸맞은 이유가 반드시 존재한다.
다른 별처럼 지구도 마찬가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 봤자 우주의 미래를 위협하는 적일뿐이다.
“시스템을, 그리고 우주를 적으로 돌리고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결국 시스템으로부터 얻은 힘을 사용했을 뿐이면서.”
이미르는 세한의 머리에서 천천히 발을 때며 손바닥을 펼쳐 세한의 검은 머리칼을 잡고 그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자색의 눈동자가 흑색의 눈동자가 마주친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눈이군.”
세한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절망 따윈 한줌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르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너에게 현실을 알려줘야겠구나.”
이미르는 오른손으로 세한의 머리를 고정시킨 채 왼손의 검지를 세한의 이마에 가볍게 댔다.
그런 이미르의 행동에 세한은 저항하고자 했지만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퀘스트를 깨고, 포인트를 얻고. 그런 것을 반복하며 플레이어로서의 능력을 올린다. 나름의 노력이 들어가지만 결국 그건 시스템을 이용했을 뿐이다. 시스템의 적이 된 네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툭.
이미르는 천천히 손을 때며 자리에서 물러섰다.
마치 다시 일어나려면 일어나보라는 듯이.
‘움직인다.’
세한은 그제야 몸이 자유로워진 신체를 느꼈다.
“윽……?!”
천천히 일어나던 세한이 작게 신음을 흘리며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에는 방금 전의 충격 때문인 것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몸이 무겁나 보군, 김세한.”
“무, 슨 짓을 한 거냐.”
“뭘 했냐고? 그야 간단하잖나.”
이미르의 검지가 움직이며 네모난 직사각형을 그렸다.
그건 플레이어의 ‘상태창’을 묘사하는 것 같았다.
“능력치를 떨어트렸다. 네가 막 플레이어가 됐을 무렵의 인간의 능력치로.”
“……뭐.”
무거워진 신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지가 그런 이미르의 말을 뒷받침했다.
“확인해도 좋다.”
혼란스러워하는 세한에게 이미르는 관대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발악하고자 한다면 뭐든 해보라는 것처럼.
세한은 이를 악물고 겨우겨우 일어나 상태창을 확인했다.
‘정말이야. 모든 능력치가 바닥으로 떨어졌어.’
이미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세한의 모든 능력치는 처음 플레이어가 되었을 무렵과 비슷하게 떨어져 있었다.
게임 폐인이던 세한의 몸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랜만에 인간이 된 기분이 어떠한가.”
비웃는 이미르의 모습은 세한에게 어서 절망하라는 듯 부추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한은 침착하게 주먹을 천천히 쥐락펴락하며 현재 몸 상태를 점검했다.
‘인간은, 확실히 약하구나.’
오랜만에 예전의 몸이 되니 얼마나 자신이 나약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여태 힘들게 익혔던 스킬도 시스템으로부터 얻은 건 전부 사라져 있었다.
남은 건 오직 DLC를 통해 공유되거나 익힌 스킬들뿐.
‘신념의 일격. 그리고 심안.’
거기에 혈천수라공이나 1회차에서 가져온 스킬도 다수 있었지만, 사실 그건 있으나 마나였다.
인간의 몸으로 스킬을 사용해봐야 이미르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신격도 사실상 사용할 수 없겠어.’
이런 약해빠진 몸으로 신격을 사용했다간 그대로 몸이 터져 버리리라.
말하자면 세한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는 막힌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가진 건 이게 전부인가?’
DLC는 ‘광기의 마왕’인 내가 만든 것이기에 사용이 가능했다.
시스템을 통해 사용하던 모든 건 사라졌다.
‘열쇠 개사기네. 썩을.’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미르가 세한의 능력치를 조절한 건 녀석의 힘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열쇠의 힘.
열쇠는 시스템에게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전능의 편린.
그것을 사용해 ‘플레이어’로 지정된 세한의 능력치에 간섭해 바닥으로 떨어트린 거다.
플레이어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한으로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미르가 마음먹으면 자신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러니 저렇게 느긋하게 세한을 지켜볼 수 있는 거리라.
세한은 그런 이미르를 흘깃 한번 본 뒤에 재차 상태창을 보았다.
DLC를 통해 얻은 것 말고 혹시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없나 확인했다.
‘아, 하나 더 있었구나.’
상태창을 확인하던 세한의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
바로 특성란에 남아 있는 하나의 글귀.
‘아픈 소녀의 사랑이라.’
분명 내가 잊어버린 누군가와 관련이 있는 특성.
이건 시스템을 통해 익힌 게 아닌가?
‘그럴 리가 없어.’
DLC로 특성을 구매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건 분명 내가 시스템을 통해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라지지 않은 거지?
잠시 고민하던 세한의 눈동자가 커졌다.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하나의 가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세한은 웃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답을 얻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