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275화 (275/332)

# 275

275. 종말의 유토피아(2)

“이미르 님이 오셨다.”

신자운과 싸우던 백양궁, 하말은 희열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하늘에 뚫려있는 검은 구멍에서 무수한 병력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신자운조차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저것이…….’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퍼블리셔가 지닌 힘은 어마어마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하나하나가 얕볼 수 없는 수준의 강자들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별들이 어째서 반항할 생각조차 안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검은 구멍에서 나온 병력들은 세계전역으로 퍼졌으며 신자운이 있는 부산으로 떨어져내리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 뒤로 물러서!”

“칫, 이제 거의 끝이었는데 어쩔 수 없네요.”

자운의 말에 성녀 신유화가 재빨리 반응하며 각종 방벽을 플레이어들이 있는 장소에 설치했다.

플레이어들도 이제 전투에는 이골이 난 배태랑들이었기에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재빨리 뒤로 빠지며 똘똘 뭉쳤다.

“도시가…….”

몇몇 플레이어들은 멍한 얼굴로 부서져 내리는 도시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떨어진 무수한 병력들이 부산의 빌딩과 각종 건물들을 짓밟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콰콰쾅!!

그중 가장 거대한 흑색의 유성이 하말과 신자운 사이에 떨어졌다.

검은색 피부를 가진 거인의 등장에 신유화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선발대의 거인보다 강하잖아?’

선발대의 거인은 엘리트라고 했기에 그보다 강한 거인은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어디로 봐도 저 거인은 선발대의 거인보다 강했다.

대략 하말과 비슷한 수준일까.

“아주 꼴이 말이 아니군, 하말.”

“……이번엔 변명할 수 없겠어.”

흑색의 거인은 쓰러져있는 하말을 보며 빈정거렸다.

그의 말처럼 하말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각종 버프로 떡칠한 신자운과의 싸움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몸 이곳저곳에 상당한 상흔이 남아 있었고, 보유한 신격도 상당히 소실된 상태였다.

만약 흑색의 거인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당하고 말았으리라.

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신자운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호오.”

수많은 거인과 강적들의 앞에서도 표정이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흑색의 거인은 내심 감탄했다.

“새로운 분노의 악마라던 녀석이군. 나는 바르겔미르. 이미르를 모시는 위대한 거인 중 하나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시건방진 놈이로구나. 하긴, 7대 악마가 되었으니 그 정도 기백은 있어야겠지.”

7대 악마는 외신과 동급.

비록 분노의 악마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이거 좋은 기회로구나. 7대 악마를 쳐죽였다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겠어.”

비록 약하더라도 7대 악마를 쓰러트렸다는 타이틀은 매력적이었다.

현재 비어 있는 반고의 자리를 노리는 거인들이 많았기에 바르겔미르는 그런 타이틀을 수집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부사장의 자리에 오른다.’

기나긴 세월 동안 반고는 퍼블리셔의 부사장으로 존재했다.

당연히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부사장의 자리를 노리는 거인은 많았지만 누구도 반고를 이길 수 없었기에 그저 입맛만 다시던 상황이 지속됐다.

‘그런데 반고를 죽인 자가 나타났지.’

퍼블리셔에겐 재앙이었지만 반고의 바로 아래에 깔려 있던 거인들에겐 기회였다.

최상급 신격을 얻고 더 이상 퍼블리셔에서 올라갈 곳이 없는 거인들에겐 희소식이었고, 그건 바르겔미르도 마찬가지였다.

‘크크크, 딱 좋아. 분노의 악마를 제외하면 그다지 위협적인 것도 없어. 하말에게 잔챙이를 맡긴 후, 난 저놈을 죽인다.’

정말로 자신은 운이 좋지 않은가.

서울에 떨어지지 못한 게 좀 아쉬웠지만 이곳도 나쁘지 않았다.

“자, 나의 군대여. 이곳을 유린하라.”

바르겔미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산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떨어진 퍼블리셔의 군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이곳에 모여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보다는 조금 적었지만 질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별자리의 군세도 겨우겨우 막았는데 거기에 세 배는 되는 병력이 충원된 것이다.

절망으로 물들어가는 플레이어들을 살핀 윤현균은 신자운에게 조용히 말했다.

“부상당한 하말과 다른 병력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자운님은 저 거인을 상대해 주십시오.”

“할 수 있겠나?”

“못하면 죽음뿐이죠.”

“시간 벌이밖에 되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윤현균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전 믿습니다. 그가 이 상황을 잠자코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걸요.”

“……그라면 김세한?”

“예.”

김세한은 이미 몇 번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전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분명 자신들은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이 상황을 타파할 것이다.

‘존재 자체가 희망이 되어버린 건가.’

뭐, 나쁘지는 않다고 자운은 생각했다.

절망하며 좌절하는 것보단 지푸라기라도 잡고 버티는 게 낫지 않은가.

‘지푸라기를 잡는 이들에 나도 포함된다만…….’

자운은 호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꺼내고 싶었지만 애써 참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괴물들이 그런 여유를 기다려줄 것 같지 않았으니까.

***

서울 몽상의 신전.

이미르가 지상에 강림한 이후, 이드라는 초조한 얼굴로 신전 내부를 초조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있어도 괜찮나?’

‘아무리 민수아라고 해도 인간, 잘못된 판단을 했을 지도 모른다.’

‘세한은 괜찮은가?’

불안한 마음에 이드라는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만약 세한이 본다면 그런 이드라의 모습이 참으로 인간답다 했을 것이다.

확실히 이드라는 스스로 외신보다는 인간에 가까워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의 마녀’라면 이런 사사로운 감정에 결코 정신이 흔들리지 않았을 테니.

“커뮤니티의 반응도 점점 안 좋은 쪽으로 흐르고 있구나.”

이드라는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영상과 채팅을 통해 현재 세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대략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플레이어들의 피해가 커지는 중이다.

이미 커뮤니티에서는 지구는 이제 끝났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ㅋㅋㅋㅋ이제 다섯 시간 안에 지구 멸망한다 ㅋㅋㅋ 내가 그렇게 퍼블리셔한테 개기면 안 된다고 했는데, 깝치더니 꼴좋다.]

“신고.”

이드라는 영상에 달리는 악플에 바로 신고를 때렸다.

물론 신 하나가 신고를 때린다고 악플이 지워지는 일은 없었다.

거기다 문제는 그런 악플에 공감하며 추천이 달리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현재 지구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외신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드라는 세계 곳곳에 뿌려둔 옵저버를 통해 현재 지구에 있는 외신들을 확인했다.

아자토스의 모습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지만, 현재 지구에 강림한 외신의 숫자는 총 셋.

‘슈브 니구라스, 노스 이디크, 디엔드라.’

거기다 이들이 데려온 그레이트 올드원까지 생각하면 실로 절망적인 상황이다.

아우터갓이 직접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레이트 올드원들이 움직인 것만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판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른 신들의 도움만 구할 수 있었어도.’

적어도 올림포스나 아스가르드에서는 도움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못한 건 당연히 퍼블리셔 때문이다.

이미르가 지구에 강림하는 신격의 제한을 해제했기에 어떤 신이 등장하던 시스템의 제재는 없다.

‘하지만 그건 이곳에 강림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

초상계의 각종 구역을 연결하는 통로를 통제하는 게 퍼블리셔의 중앙통제실이다.

퍼블리셔의 승인이 없다면 신들은 함부로 다른 별에 간섭조차 할 수 없다.

‘이민아.’

현재 중앙 통제실에 있는 그녀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과연 그녀가 움직일 기회가 오긴 하려나?

이드라는 초조해진 마음에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콰아아앙!!

“윽!”

먼 장소에서 서울 전체를 흔드는 것 같은 충격이 울렸다.

세한과 이미르가 싸우기 시작하며 몽상의 신전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세한…….’

이드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세한과 이미르의 싸움을 외면했다.

서울의 하늘에 보내둔 옵저버를 통해 언제든 상황을 알 수 있음에도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길 수 없다.’

이드라는 알았다.

현재의 세한은 이미르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단순히 신격의 크기나 강함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다.

그건 이미르가 열쇠를 보유한 거인왕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에게 귀속되는, 그리고 열쇠의 힘을 벗어날 수 없는 플레이어는 결코 이미르를 이길 수 없다.’

현재 지구에서 이미르에게 저항이 가능한 건 마찬가지로 열쇠의 반쪽을 지닌 린 테일러뿐.

하지만 린 테일러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었다.

‘제발.’

이드라는 양손을 꽉 쥐고 이마에 댔다.

이것이 기도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기원의 대상은 누구인 것인가.

자신은 외신.

신중에 신이라 불리는 그녀가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참 어리석고 인간답게도.

그렇게 이드라는 계속해서 기원했다.

한 장의 쪽지가 그녀에게 도착하는 순간까지.

***

서울의 플레이어들은 필사적으로 괴물들을 상대하며 맞섰다.

방금 전보다 배는 많아진 퍼블리셔의 군세. 신격을 지닌 별자리와 거인들.

애초에 승산이 있는 싸움은 아니었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당장 죽여!!”

악에 받친 욕설이 오가며 덤벼드는 인간들의 모습에 퍼블리셔의 군세는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저항이 거센 별이 여태 있었던가?

퍼블리셔가 공격해오면 대부분 체념하며 멸망을 기다릴 뿐이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기에 굳이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

‘저 남자 때문인가?’

잿빛 피부를 지닌 거인, 티아마트는 현재 이미르와 싸우고 있는 한 플레이어를 보았다.

다양한 권능을 사용하는 이미르를 상대로 세한이라 불린 남자는 비록 방어 위주이긴 하지만 분명 버티고 있었다.

‘외신의 힘을 얻은 인간이라더니 소문보다 훨씬 대단한 녀석이었군.’

그렇다 해도 플레이어. 티아마트는 이미르에 대한 걱정을 접었다.

그는 그의 역할만 수행하면 그만이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죽어라!!”

티아마트는 옆에서 덤벼드는 플레이어에게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러자 덤벼들던 플레이어는 한줌의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시, 시발. 대체 저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야?”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놈들도 비슷한 거 아냐?”

팔짱을 낀 채 덤벼드는 플레이어들만을 적당히 처리하는 티아마트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저건 아마 외신이겠군.’

상처투성이가 된 박성혁은 숨을 헐떡이며 아직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외신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아닌 거대한 고깃덩어리와 같은 괴물.

눈조차 보이지 않는 그것은 가만히 공중에 떠 있었다.

마치 필사적으로 싸우는 자신들을 비웃는 것처럼.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무너질 것 같다.’

박성혁은 ‘그것’에게서 애써 시선을 옮겼다.

계속 보고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정신력이 강한 플레이어가 이 정도라면 평범한 인간이 저것을 볼 때 필시 실성하고 말리라.

“왔군.”

그때, 팔짱을 끼고 있던 티아마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근처에서 견제를 하던 박성혁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왔다고?’

여기서 올 게 더 있단 말인가?

설마, 설마 그럴 리가.

박성혁은 초조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건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티아마트의 중얼거림을 들은 다른 인간들도 저마다 떨리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으니까.

붉은 하늘에 뚫려있는 구멍.

그것을 바라보던 서울의 플레이어들은 잠시 후 벌어진 상황에 넋을 잃었다.

거대한 구멍의 주위로 제각각 크기가 다른 수많은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박성혁은 세한이 이번 전투에서 이야기했던 또 하나의 세력을 떠올렸다.

콜라보 퀘스트를 부여받은 다른 별의 플레이어들.

열다섯 개의 차원 게이트가 열리며 수만 명에 이르는 이성(異星)의 플레이어들이 쏟아졌다.

“오, 신이시여.”

박성혁은 무심코 중얼거리며 손에 쥔 무기를 떨어트렸다.

이제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는 곧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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