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
265. 정면대결(2)
‘설마 플레이어 주제에 용을 부리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다.
애초에 용이 지구에 남아 있다는 것부터 이해되지 않았다.
‘신화시대가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생존해 있는 용이 있다고?’
정말 까마득히도 긴 시간이 흘렀다.
타리온이 기억하는 것만 해도 족히 수천 년.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살아남은 용이 있다는 것도 놀랐거늘, 심지어 그걸 플레이어가 부릴 줄이야.
‘신들도 쉽사리 굴복시키지 못하는 것이 용 아니었나?’
신화를 보자면 거인이나 신을 삼킨 용도 심심치 않게 나올 정도다.
그건 과장된 게 아니라, 용이라는 존재가 그 정도로 대단한 괴수이기 때문이다.
신격은 낮을지언정 용들이 육체는 물리적으로 가질 수 있는 최대수치를 지닌다.
용의 비늘, 용의 뼈. 용의 눈. 용의 심장.
어떤 것이라고 해도 최강급 소재가 되는 물건들이다.
그걸 모두 갖춘 용이라는 괴물은 설령 타리온이라고 해도 굴복시키기 힘들다.
“……설마 센티넬로 등록되어 있던 몬스터인가?”
게임의 운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용에게서 느껴지는 기척은 센티넬과 같았다.
신화시대의 괴물을 시스템이 하나의 몬스터로 간주하여 센티넬의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저 용은 그것을 무시하고 플레이어의 편에 붙었다.
“이해할 수 없어.”
타리온은 용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용의 머리 위에 서 있는 남자를.
팬드래건의 길드장 아서. 제법 강한 플레이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용을 부릴 수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거기다.
“요정이라니.”
주변에는 금색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얽히고 얽혀 둥글고 거대한 결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 결계는 타리온과 아서, 그리고 용을 격리시켜 이곳에서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분명 지구는 신화시대가 끝난 지 오래 전이 아니었나?’
단순한 엘프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요정은 간단히 말해서 살아 있는 정령. 사용할 수 있는 힘의 크기나 규격도 다르다.
거기다 지금 느껴지는 힘을 보자면 상당히 긴 세월을 살아온 요정인 게 분명했다.
신화시대가 끝나고 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대체 어떻게 살아왔던 것일까.
“확실히 나를 격리시킨 행동은 잘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나?!”
타리온은 아서를 향해 외쳤다.
“설령 나를 쓰러트린다고 해도 그때쯤이면 나의 형제들이 네놈이 이룬 모든 걸 파괴시킬 것이다. 아무리 요정을 아군으로 두고 있다고 한들, 우리의 상대는 아니지.”
분명 지금 아서를 습격한 거인들 중에서 가장 강한 건 타리온이다.
하지만 다른 거인들이 결코 약한 건 아니다. 애초에 거인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들로 구성된 친위대가 아닌가?
“우리가 이곳에 날뛰는 사이 본대가 도착할 거다. 그때가 되면 지구의 종말이 되리라.”
“그건 알고 있다.”
친위대가 주요 인물들을 습격한 사이, 퍼블리셔의 본대가 도착하여 별을 유린한다.
이미 세한을 통해 들은 이야기다.
하지만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기습을 가할 걸 알고 대비를 한다고 한들, 막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니까.
그러니 대처 방법은 심플하게 정면에서 쓰러트리는 것뿐이었다.
‘드라이그 고흐가 딱 맞게 설득돼서 다행이군.’
아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신을 인정한 붉은 용을 응시했다.
만약 이 용이 아니었다면 타리온이라는 거인과 홀로 맞선다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밖은…… 모르간이 알아서 해주겠지.’
아서는 천천히 엑스칼리버를 들어 올려 타리온을 향해 가리켰다.
동시에 용이 크게 포효하며 타리온을 향해 덤벼들었다.
[캬아아아!!]
“젠장!”
거대한 입을 들이밀며 덤벼드는 용의 모습에 타리온의 이마에 박혀 있는 보석이 빛났다.
‘본체로 돌아가 단숨에 끝장을 봐야 한다.’
반고 정도가 되는 거인이 아니면, 대부분의 거인들은 작은 인간의 형태에서 본래 힘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다만 커다란 몸이 되면 은밀하게 움직이기도 힘들고, 작은 인간을 상대할 때 여러모로 귀찮은 터라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신격이 부풀어 오르며 2미터 정도의 크기이던 거인의 육신이 단번에 용과 동등할 정도로 거대해진다. 그의 몸에 새겨진 문양이 빛을 발하자 막대한 신격에 아서는 숨이 턱 막혔다.
‘정말 신을 눈앞에 둔 기분이군.’
그런 감상으로 타리온을 바라보던 아서를 향해 거대한 도끼가 떨어졌다.
아서와 함께, 그 아래에 있는 용의 머리까지 한 번에 동강내려는 것이다.
“드라이그 고흐. 도끼는 내가 해결할 테니, 앞으로 달려들어!”
마주 부딪치기 직전, 아서의 검에 새하얀 휘광이 감겼다.
거인의 도끼에 비하면 이쑤시개와 같은 크기였지만 아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신념의 응집.’
아서가 가진 최강의 능력.
그의 의지가 닿는 한, 계속해서 힘을 축적시켜 강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어찌 보면 아자젤이 가진 능력과도 비슷한 능력.
그것만으로 신념의 응집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발전가능성을 지녔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고오오오!!
백색으로 빛나는 엑스칼리버를 쥐고 아서는 용의 머리 위에서 뛰었다.
그리곤 수직으로 떨어지는 도끼를 향해 엑스칼리버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서걱!
“……!!”
신격이 담긴 도끼다.
중상급의 신격을 지닌 타리온이 한껏 힘을 집중시켜 휘두른 도끼가 반토막으로 잘려나갔다.
겨우겨우 자른 것도 아니다.
마치 말랑말랑한 두부를 자른 것처럼 도끼가 반으로 갈라졌고, 아서의 몸은 타리온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저 검, 보통 무기가 아니었어!’
타리온은 몰랐다.
지금 아서가 쥐고 있는 검이 지구에서 존재하는 검 중 가장 강력한 엑스칼리버라는 사실을.
그리고 완전히 해방된 엑스칼리버에는 신격의 힘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아무리 신격을 담아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마력을 담았다면 달랐을 지도 모른다.
신격을 가득 담아봐야 엑스칼리버에겐 그저 거대하고 단단한 도끼일 뿐이다.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건 정보에 없었다! 여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건가?!’
사용하지 않았다.
애초에 신격을 꺼내는 상대도 없었고, 알데바란 때는 아직 엑스칼리버의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을 때였다.
‘후에 한번 사용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 되도록 사용하면 안 된다.’
세한은 그렇게 말했고, 아서는 그것을 충실히 지켰다.
그 결과, 거인들은 누구도 엑스칼리버의 힘을 알지 못했다.
“젠자아아앙!!”
목을 물어뜯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는 드라이그 고흐의 공격을 왼손 팔뚝을 내밀어 막았다.
용의 이빨이 타리온의 피부를 꿰뚫지 못하고 카드득 소리를 내며 긁혀 떨어졌다.
‘그래도 내 피부는 무적이다. 절대 뚫지 못해!’
그것이 타리온의 능력이었다.
강한 육신, 그리고 신격을 몸에 퍼트리면 전신에 새겨진 문양을 통해 피부가 강화됐다.
어떤 물질보다 단단한 그의 피부는 타리온의 자랑이었다.
그가 친위대 서열 5위에 있게 해준 능력이었으니까.
‘도끼를 어떻게 자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부는 베지 못할 거다.’
코앞에 보이는 작은 인간, 아서를 본 타리온은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도끼를 그토록 간단히 베었던 인간이니 자랑인 피부조차 벨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는 피부에 검이 튕겨나가는 순간을 노려 공격하려했지만, 혹시 모르니 피하는 게 좋겠어.’
인간의 공격을 피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그의 본능은 저 검에 맞아선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미.”
황급히 목을 옆으로 젖혀 아서의 검을 피하려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늦었어.”
“뭣……!”
가깝긴 했지만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거리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속도다.
하지만 타리온의 눈에는 보였다. 아서의 입가에 맺힌 회심의 미소를.
“거대한 놈을 상대하는 건 이미 한번 해봤거든.”
처음 도끼를 휘두를 때 타리온이 움직일 수 있는 속도는 대충 계산하고 있었다.
혹여 다른 능력이나,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까봐 간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쿠웅!
아서의 발이 허공을 박찼다.
마력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발판을 만들어 신념의 응집을 사용했다.
그러자 아직 여유가 있었던 타리온과 아서의 거리가 단번에 좁혀졌다.
‘피할 수 없다.’
거기다 아서가 노리는 건 타리온의 목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부피가 작은 목보다 거대한 몸을 노린 것이다.
백색으로 맺힌 엑스칼리버가 타리온의 가슴팍에 꽂혔다.
푸우욱!!
“큭!!”
아찔한 통증이 가슴에서 밀려왔다.
정말로 신격이 둘러싼 자신의 피부를 뚫고 검이 박힌 것이다.
‘신격을 무효화시키는 능력을 지녔었구나!’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도끼도, 피부도 간단히 꿰뚫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엑스칼리버가 몸에 박힌 순간, 전신에 가득 찼던 신격이 모두 흩어져버린 게 그 증거다.
‘능력을 알았다면 대처는 간단하지.’
가슴팍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거대한 타리온의 육신에 비하면 검의 길이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신념의 응집의 힘으로 불어난 아서의 검기 때문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심장까지는 닿지 않았다. 치명상이 아니라면 저 작은 인간 놈을 죽이는 정도는 전혀 문제없었다.
‘신격이 아닌 마력을 이용하면…… 응?’
신격을 무효화시킨다면 마력을 운용해 죽인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을 모았지만 어째서인지 마력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어딘가로 주변의 마력이 모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뭐야.”
타리온의 앞에는 용이 있었다.
브리튼을 수호하던 적룡.
용의 입에 맺혀있는 새빨간 기운이 결계 안을 붉게 물들였다.
타리온의 가슴에는 이미 아서의 모습은 없었다.
그곳에 박혀 있는 건 오직 신격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엑스칼리버뿐.
신격이 없다면 최강의 생물은 무엇인가.
바로 마력을 자유자제로 다룰 수 있는 용이다.
[───!!]
드라이그 고흐의 입에서 새빨간 빛줄기가 쏘아졌다.
어떤 마법보다도 강력한, 용의 권능.
드래곤 브레스가 엑스칼리버가 꽂혀 있는 타리온의 가슴팍에 명중했다.
신격으로 방어하려고 해도 엑스칼리버가 꽂혀 있는 탓에 불가능했고, 마력은 애초에 용의 먹이였다.
“이, 이미르 님.”
그것이 타리온의 마지막 말이었다.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
‘생각보다 잘 싸우고 있네.’
퍼블리셔의 중앙통제실.
민아는 현재 지구의 상황을 지켜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선발대가 지구로 향했다는 사실을 방금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혹시나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사망자가 있을까 노심초사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큰 인명피해는 없었다.
“요루엠. 현재 선발대 중에 죽은 자가 있나?”
“현재는 타리온 한 명입니다.”
“과연 대처는 해뒀다는 건가.”
민아는 능숙하게 거인 요루엠인 척 말하며 옆에 서있는 존재의 눈치를 살폈다.
하필 그녀의 곁에는 이미르가 서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에이 씨, 좀 가면 안 되나? 겁나 무섭네.’
이미르는 지금까지처럼 태연히 중앙통제실의 업무를 처리하며 슬그머니 곁눈질로 이미르를 살폈다.
‘힉!’
어째서인지 이미르는 민아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살피는 것처럼.
‘드, 들켰나? 나 죽었나?’
그는 말없이 민아를 응시했다,
민아는 곁눈질했던 시선을 돌리며 평소와 같은 태도로 평소와 같이 업무를 처리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미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유능하군.”
“예?”
“이곳에 배속된 지 몇 달 안 됐다고 들었는데 무척 능숙해. 요루엠, 자네가 제법 눈치가 있는 건 알았다만 이렇게 업무를 잘할 줄은 몰랐어.”
“가, 감사합니다.”
설마 칭찬받을 줄이야.
혹시 떠보는 건가 싶어 이미르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이미르는 다행스럽게도 요루엠의 정체가 민아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미르는 민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중앙통제실에 있던 거인들을 향해 말했다.
“디어사이드의 플레이어 중에서는 로키의 아바타가 있다. 변신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지.”
‘…….’
민아는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거기다 요즘 로키의 행방도 묘연하다고 하더군. 혹시 퍼블리셔에 수상한 행동을 하는 거인을 본 적이 있나?”
“흠, 퍼블리셔 내의 보안을 강화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회사 내부로 들어오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기껏해야 초상계에 잠입한 정도이리라 생각합니다.”
이미르의 말을 받은 건 이 중앙통제실에서 가장 오랜 시간동안 근무한 거인이었다.
‘이미 여기에 있는데요.’
민아는 떨떠름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다행스럽게도 이미르를 비롯한 거인들은 정말로 퍼블리셔 내부에 누군가 숨어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