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
264. 정면대결(1)
‘살아서 도망칠 수 있을까?’
유엔은 눈앞의 거인을 보며 주변이 기척을 살폈다.
눈앞에 있는 거인 하나이길 바랐지만, 그녀의 감각에는 눈앞의 거인을 포함하여 족히 세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네.’
그녀는 몸을 반듯하게 세우며 인벤토리에서 한 자루의 창을 꺼냈다.
최근 사용하는 일이 드물었던 창이지만 그녀의 실력이 녹슨 건 결코 아니었다.
문제는 유엔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고 하더라도 눈앞의 거인 하나 상대하는 정도가 한계라는 것이다.
천천히 다가오는 다른 거인들의 기척에 유엔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공포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본거지로 쳐들어와서 다행이야.’
송시우가 있는 장소에서 습격당했다면 그곳에서 만들고 있던 ‘검’도 들켰을지도 모른다.
“그래, 너무 빨리 포기하면 안 되지. 얼굴도 제법 반반한 게 죽일 맛이 있겠어.”
“…….”
거인의 양팔을 마치 갈퀴와도 같았다.
섣불리 간격으로 접근했다면 단번에 반토막날 것 같은 모양새였다.
“방금 건물을 부순 건 당신이 아니죠?”
“킬킬킬. 그걸 왜 내가 대답해? 뭐, 그래도 난 친절한 거인이니까 특별히 말해주자면 난 아니다.”
“역시.”
“역시면 어쩔 거냐? 우리가 만약을 대비해 셋이 오긴 했다만 너를 상대하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다.”
그 말대로였다.
유엔의 피부에 와닿는 그의 신격은 상급.
육체능력도 상당하니 어지간한 신보다 강할지 모른다.
권능과 같은 전승스킬이 없을 뿐, 존재 자체는 초월자에 이른 거인이니까.
태초부터 신과 거인은 동등한 적수였다.
태생부터 인간과는 급이 다른 존재들. 유엔은 설마 자신이 그런 신화 속 괴물들과 싸우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세한이 말했을 때도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졌을 뿐이다.
실제로 이렇게 맞닥뜨리게 되니 무기를 쥐는 것조차 쉽사리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 피어오른 공포가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한 씨는 언제나 이런 상대와 싸워왔다는 걸까?’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심지어 그가 싸운 상대 중에는 상급도 아닌 최상급. 그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외신도 섞여 있었다.
“자, 열심히 발버둥쳐 봐라.”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셈이에요.”
“크크크! 내가 이래서 인간을 좋아해. 인간은 쉽게 포기하지 않거든. 마치 벌레처럼.”
생긴 건 자기가 벌레 같으면서.
유엔은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가만히 죽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죽이기 전에 말해주마. 나의 이름은 케톤. 친위대의 제10석에 앉아 있는 자. 지옥에 가게 되면 명왕에게 안부라도 전해라.”
쿵쿵쿵!
족히 2미터가 넘는 육신이었지만 그의 본체는 그보다 수십 배는 컸다.
질량은 그대로인 탓에 그가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대지가 울렸다.
‘누가 도와주러 올 리는 없겠지.’
아마 같이 왔다는 나머지 둘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으리라.
최소 눈앞의 거인과 동등한 괴물들을 뚫고 자신을 구하러 올 수 있는 플레이어가 있을까?
있더라도 중국에는 없으리라.
카앙!!
“읏!!”
“캬하하하! 그래도 한번은 버티는구나!”
케톤이 팔을 휘두르자 수 미터 내에 있던 사물들이 모조리 반절로 잘려나갔다.
유엔은 그것을 가까스로 받아낼 수 있었지만 그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
기형인 팔의 움직임을 읽기 힘들뿐더러 그 속도와 위력이 무시무시했다.
“나는 다른 형님들처럼 특별한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형제 중에 가장 튼튼하고 강한 육신을 지녔지. 너와 같은 평범한 플레이어들을 상대로는 무적이라 이 말이야!”
캉캉캉!!
머리, 어깨, 허리.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공격을 유엔은 창을 계속해서 휘둘러 튕겨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가 한계였다.
이대로 버티다가 체력이 고갈되면 죽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제법이야. 인간 주제에 내 공격을 이렇게 막을 수 있다니. 이미르 님이 지구를 신경 쓰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네년. 혹시 신격을 지닌 존재와 싸운 적이 있냐?”
이를 악물고 공격을 쳐내는 유엔은 행동에 케톤은 조금 의아해졌다.
꽤 강하다고 듣기는 했다만 한낱 플레이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여태 꽤 공격을 했지만 아직 유엔이 입은 피해는 전무했다.
기껏해야 처음 기습에 받았던 피해가 전부. 그것도 육신을 상하게 하지는 못했다.
계속 공격한다면 당연히 자신이 이기겠지만, 초월자인 케톤의 입장에서는 그런 ‘막는다’라는 행위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신격은 마력과는 전혀 다른 힘이다.
초월적인 기적을 일으키게 만들어주는 에너지. 그러니 그것에서 발생하는 힘을 필멸자는 가늠하기 힘들다.
그런데 유엔은 이미 몇 번이나 신격이 담긴 자신의 공격을 막았다.
마치 신격의 양에 따라 어느 정도의 마력을 담으면 막을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걸…… 내가 왜 말해야 하죠?”
“크크큭! 건방진 계집!”
유엔은 알데바란과도 한번 마주한 적 있었다.
신격만 따지면 눈앞의 케톤이 더 높았지만 상대하는 건 알데바란 쪽이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이유는 모른다.
단순히 자신이 강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알데바란과의 싸움이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다.
거기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세한과 몇 번 대련을 했던 덕이 컸다.
카가가강!!
“꺄악!!”
“제법 버티긴 했다만, 이제 끝이다!”
수십 번 케톤의 공격을 버틴 유엔이었지만 그것도 곧 한계에 이르렀다.
손아귀가 찢어지며 그녀가 쥐고 있던 창이 옆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텅 비어 있는 그녀의 목을 향해 케톤의 손이 낫처럼 꺾이며 휘둘러졌다.
이건 피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
투콰앙!!
폭탄이 터진 것 같은 폭음이 울려 퍼지며 유엔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꺄아악?!”
결코 케톤이 휘두른 공격 때문에 일어난 충격파는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유엔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방금 폭음이 울려퍼졌던 장소로 시선을 옮겼다.
“커, 커어억!!”
유엔의 눈에 들어온 건 놀랍게도 몸이 기억자로 꺾여 있는 케톤의 모습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케톤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은 것이다.
‘설마 주먹질에 방금 그런 폭음이 들린 건가?’
만약 그렇다면 어찌 된 신체능력이란 말인가.
“괜찮나?”
“네. 네. 괜찮습니다만…….”
사내의 말에 유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누,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케톤의 육신에 타격을 줄 만큼 강한 신체를 가진 플레이어라면 유엔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악마인가?
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의 전신에 타고 흐르는 힘은 신성함 그 자체였다.
“궁금한가?”
“네?”
“내가 누군지.”
상당히 말이 짧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귀에는 어러 개의 피어싱이 달려있어 마치 양아치와 같은 인상이었지만 말투는 단답이었다.
“나는, 아가트람의 김태훈이다.”
마치 이 정도면 말하면 됐지 않냐고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유엔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까 누구냐고.’
정말로 들은 적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녀가 알 수 있는 건 그가 아가트람 소속의 길드원이며 아군이라는 것뿐이었다.
***
“현재 지구를 습격한 친위대의 수는 대략 서른이라는 건가. 목표는 주요 플레이어들이고.”
“이, 이거 큰일 난 것 아닙니까?!”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박동권이 급히 끼어들었다.
그의 시선은 방금 전에 먼지로 변해 사라진 거인이 있던 장소에 고정되어 있었다.
친절하게도 꿈속에서 주요 정보를 상당히 알려줬던 거인은 그의 노력을 봐서 고통없이 보내줬다. 잠자다 죽었으니 녀석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
“큰일? 왜?”
“그야 이렇게 암살을 보낼 줄은 몰랐잖습니까! 심지어 상위 열 명은 죄다 상급 신격을 지녔다면서요!”
“너 목소리가 크다?”
“허, 험험.”
박동권은 내 지적에 바로 자세를 고치며 헛기침을 했다.
녀석도 자신이 조금 흥분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뭐, 그래도 녀석이 이해되긴 했다.
선발대의 질이 워낙 좋아야지.
강한 녀석들은 상급 신격을 지녔고, 아닌 놈들도 최소 중하급 신격을 지녔으니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은 비벼볼 수도 없다.
“아, 아무튼 지금 저와 같은 주요 플레이어들이 습격당하면 퍼블리셔가 본대를 이끌고 왔을 때 대처가 힘들 겁니다. 머리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싸웁니까?”
“그건 그렇지.”
“그러니 당장 무슨 수를 써야……!”
“이제 와서 쓴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 그건 그렇지만.”
이미 습격은 시작됐다.
이제 와 내가 대처를 한다고 해도 너무 늦었다.
“현, 현균 형님은 전투력이 약하단 말입니다.”
“의외네.”
“예?”
“네가 설마 그런 걸 신경 쓸 줄은 몰랐거든.”
내 기억속의 1회차 박동권은 남을 이용해 먹으며 타인에게 정을 붙이지 않는 개새끼였다.
그런데 지금 녀석의 모습을 보면 진심으로 현균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걱정 마라. 이제 와서 손을 쓰는 건 늦었다고 했지. 내가 대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야.”
“디어사이드 길드원들이라도 워낙 수가 적으니 대처가 힘들 것 같은데요.”
“누가 디어사이드 길드원들로 대처한다고 했어? 이럴 때를 대비해서 따로 육성시켜 둔 길드가 있다 이거야.”
“예? 그런 곳이 있었습니까?”
박동권은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하긴 최근 가장 유명한 길드라고 하면 디어사이드다.
그리고 그 휘하에 있는 창천과 팬드래건이 워낙 거대한 탓에 다른 길드들이 눈에 띄지 않는 편이었다.
“아가트람.”
“아! 그런 곳이 있었죠!”
“거기가 지금 랭킹은 1위인데. 그런 곳이라고 말하다니, 너 블루에일의 부길드장이 맞긴 하냐?”
“하지만 거기 워낙 수도 적고 눈에 띄지 않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
아가트람은 내가 지원을 아끼지 않은 탓에 길드 랭킹 1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값에 비해 아는 사람이 상당히 적었다.
누가 있는지.
또한 얼마나 강한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건 내 탓이라기보단 아가트람 길드원들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
민수호와 강준식은 아직 나이가 어린 탓에 표면으로 나오지 않았고.
이수린은 연구에 몰두해 길드에 틀어박혀 있으며.
김태훈도 남에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고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에만 즐거움을 느끼는 변태 같은 놈이다.
그리고 그건 천상환도 크게 다르지 않지.
“분명 아가트람은 눈에 띄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강하거든.”
내가 왜 아가트람을 아낌없이 지원했는데.
커다란 문제가 생겼을 때 이수린의 도움을 한번 받았던 걸 제외하면 성장할 때까지 되도록 건드리지도 않았다.
이때를 위해서.
“꿈속의 정보를 읽은 그대로 이미 아가트람에는 전달해 둔 상태였다. 주요 습격 위치는 많지 않으니 아마 그곳을 중심으로 아가트람이 움직였을 거야.”
특히 중국은 셋이었다.
유엔이 이것저것 맡은 역할이 큰 만큼 습격자를 많이 구성하여 반드시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확실히 예전이었다면 절망적인 상황이었겠지.’
유효한 전력이 적고 내가 인류의 희망이었던 1회차.
그때였다면 이런 여유는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물며 거인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아가트람만이 아니었다.
지구의 플레이어들은 이미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으니까.
***
국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길드의 형태를 취한 나라가 있다.
바로 영국.
한 길드를 중심으로 수많은 길드가 뭉쳤고.
그것은 하나의 국가로 변해 어떤 길드보다 거대한 길드가 만들어졌다.
그 길드의 이름은 바로 팬드래건이다.
비밀이 많은 아가트람, 그리고 중국 최대의 길드인 창천 길드와 함께 인류 최강의 길드로 손꼽히는 길드.
당연히 퍼블리셔에서도 주시하고 있던 길드 중 하나였으며, 그곳의 길드장인 아서를 죽이기 위해 파견된 거인들의 숫자도 무려 셋이나 됐다.
주요 길드의 인원들은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아가트람의 위치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으니 그만큼 창천과 팬드래건에 습격자의 숫자가 몰릴 수박에 없었다.
‘고작 인간 플레이어 하나를 죽이기 위해 우리를 셋이나 보내다니.’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서라는 플레이어를 간단히 죽이고, 나아가 팬드래건이라는 길드까지 뿌리째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깨닫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건 듣지 못했다고.’
선발대 서열 5위의 거인. 타리온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에 쥔 도끼를 움켜쥐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머리를 쪼갰던 자신의 도끼이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크아아아아!!]
하늘을 울리는 포효가 타리온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그곳에 있는 건 하늘을 가릴 것처럼 거대한 용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