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256. 다시 마계로(3)
“어서 오십시오, 크리스 브라이트 님.”
분노의 영역에 들어가자 마족들이 나와 크리스를 맞이하는 게 보였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악마 한 명이 다가와 크리스를 비롯해 우리를 살폈다.
아마 치안을 지키는 마족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마라 파피야스 님은 오신다는 이야기가 있었느냐?”
크리스는 색욕의 계약자였지만, 어쨌든 플레이어.
거기다 특별히 신격도 없으니 악마보다 서열이 높지는 않았다.
아무리 급이 낮은 악마라고 해도 엄연히 악마.
거기다 저 악마는 급이 낮은 악마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크리스를 얕보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건, 7대 악마의 계약자가 얼마나 특별한 위치에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아마 이틀 후에 오실 거예요.”
“그렇군. 근데 너는 왜 먼저 왔지?”
“조금 일이 있어서…….”
크리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다행히 악마는 그런 크리스의 태도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차에는 누가 타고 있나?”
“그, 그게. 노예입니다. 지구에서 잡아온 인간 플레이어인데 꽤 튼튼하고 능력치도 좋아서 신자운 님이 좋아하실 것 같았거든요.”
“호오, 지구? 용케 손에 넣었군.”
“조금 운이 좋았어요.”
이미 크리스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지구의 플레이어는 마계에서 상당히 진귀한 취급이었다. 린 테일러가 지키는 지구는 마계의 악마들로서도 쉽게 침범하기 힘든 장소인 터라, 플레이어에 손을 뻗기 힘들기 때문이다.
‘애초에 마계로 플레이어가 대량으로 이주해 온 것부터가 대사건이지.’
마계에 악마나 마족이 아닌 이들이 대량으로 몰려온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들었다.
보통은 마계에 발을 디디는 것도 허락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 지구에서 도망친 악마의 계약자와 하수인들을 이끌고 온 것이 아자젤이기 때문이다.
강자지존의 마계에서 아자젤의 행동을 확실하게 막을 수 있는 건 단 하나.
바로 마왕뿐.
루시퍼조차 그런 사소한 일로 아자젤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마왕인 나는 애초에 신경도 쓰지 못했을 테니 사실상 무혈입성에 가까웠다.
“좋다. 들어가도록.”
악마는 내가 탄 마차를 비롯해, 크리스가 끌고 온 여러 대의 마차를 일일이 확인했지만, 별 문제없이 통과시켰다.
내가 신격을 숨긴 건 물론, 이드라의 환상으로 덮어씌워 약해빠진 플레이어를 연기한 탓이다.
“저기 이제 도시에 들어왔는데…….”
축제가 열린다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자 크리스가 슬그머니 물었다.
“왜, 그만 꺼지라고?”
“아, 아뇨. 이대로 쭉 가면 되나 싶어서요.”
“신자운에게 가봐. 아자젤도 상관없어.”
“네에.”
크리스는 시무룩한 얼굴로 물러갔고,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유만 있다면 조금 구경을 하고 싶구나.”
“그건 우리 쪽에서 해도 상관없잖아.”
“30년을 기다려야 하지 않느냐.”
하긴 돌잔치를 할 악마가 중간에 나올 리가 없으니.
‘근데 예상보다 크리스의 인맥이 꽤 넓은걸.’
아까 입구에서 만났던 악마도 그렇고, 마차로 이동하며 크리스에게 인사하는 마족이나 악마가 상당했다. 얼굴이 제법 예쁘긴 했지만, 그렇다 쳐도 인기가 상당히 좋았다.
“언니!”
대략 1시간 정도 이동했을 때 제법 괜찮은 저택의 앞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누군가가 달려 나와 크리스를 맞이하는 게 보였다.
‘시리스인가.’
시리스의 모습도 별로 달라진 건 없어보였다.
악마의 계약자라는 건 쉽사리 나이를 먹지 않는 건가?
“근데 언니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 뭔가 일이 있었다고 했잖아.”
“아, 그게 일이 잘 풀렸거든. 혹시 신자운 님을 만나뵐 수 있을까?”
“신자운 님?”
시리스는 아리송한 얼굴로 크리스를 응시했다.
“언니, 자운 님 싫어하지 않았나?”
“그, 그게 말할 게 있어서…….”
“흐음.”
말을 더듬는 크리스가 신경 쓰이는지 시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딱 보기에도 수상한 모습인지라 의심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결국 나는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신자운을 보고자 한 건 나다.”
“……당신은?”
태연히 말을 거는 내 모습에 녀석은 단번에 경계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나마 크리스가 곁에 있어서인지 적대적인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자, 이러면 누군지 알겠지?”
“!!”
이곳에 오며 신분을 숨기기 위해 덮어씌웠던 환상을 지우자 시리스의 눈이 단번에 동그랗게 변했다. 그야 당연하지. 내 모습은 마왕인 나와 판박이었으니까.
분명 이곳의 나도 나이를 먹지는 않았을 테니 지금 모습 그대로일 가능성이 컸다.
시리스는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 마왕님을 뵙습니다.”“난 마왕이 아니야.”
“네?”
“말하자면 조금 긴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다른 평행우주에서 넘어온 김세한이라고 말하면 되나?
일일이 설명하기도 복잡할뿐더러, 그 설명을 하려면 지금 내 옆에 잠자코 서있는 이드라에 대해서도 말해야 된다.
하지만 이드라를 인식하지 못하는 녀석들에게 백날 설명해 봐야 납득하기 힘들 게 분명했다.
“신자운이나 아자젤이라면 아마 내가 왔다고 하면 알 거다.”
“아,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시리스는 내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했다. 나를 보자마자 안색이 하얗게 변한 걸보면 마왕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게 분명했다.
‘광기의 마왕이라는 이름값 하네.’
뭔 만나는 녀석마다 얼굴만보면 벌벌 떨어?
“원래 인상이 더러운 놈이 나쁜 짓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느냐.”
“인상이 더러운 게 아니라 좀 어두운 거다.”
“근데 이대로 따라가도 되겠느냐? 혹여 우리를 위험한 장소에 안내할지도 모르는데.”
“설마 그렇게 멍청하진 않겠지.”
만약 그렇다면 조금 난리를 펴주면 된다.
신자운 정도가 아니면 나를 막을 수 있는 악마는 이곳에 없을 테니.
다행히 시리스는 허튼 생각을 품은 건 아닌 것 같았다.
꽤나 고풍스런 장식이 된 문의 앞에 도착한 시리스는 살짝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똑똑.
“신자운 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시리스의 태도는 무척이나 정중했다.
미국에서 보았던 신자운과 시리스의 모습은 비교적 친근했던 기억이지만, 아마 시간이 흐르며 시리스와 신자운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시리스는 신자운의 곁에 있기를 바랐다고 했었지.“
크리스가 말하길 시리스는 스스로 자처해서 분노의 악마와 색욕의 악마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녀석이 숨기는 것 없이 털어놓은 말들이 사실이라면 분명 시리스는 신자운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했다.
뭐, 이런 상황에서 그런 티를 낼 수는 없겠지만.
“손님? 오늘 나와 만나기로 한 손님은 없을 텐데.”
“그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시리스의 태도가 이상했던 건지, 신자운은 얼마지나지 않아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안색을 굳혔다.
이 녀석도 나를 마왕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신자운이 괜히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전에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마왕이…….”
“알고 있다.”
“뭐?”
“너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왔군.”
신자운의 모습은 확실히 이전과 달랐다.
내가 아는 신자운은 고독한 늑대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눈앞의 신자운은 그런 분위기는 비슷했지만 많은 게 달라졌다.
강자의 품격이라고 해야 되나.
이전과는 달리 지배하는 자의 오오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엄청나게 강해졌잖아?’
분명 신자운은 강하고 재능도 있었다. 하지만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다.
녀석의 재능은 딱 나 정도. 그러니 강해질 수 있는 한계도 명확했고, 특별한 점이라면 아자젤의 전승 스킬을 지녔다는 것뿐이었다.
근데 눈앞의 신자운은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최상급 신격을 얻었어.’
아자젤의 전승스킬을 지녀 신격이 딱히 필요 없는 신자운이다.
그런데 지난 30년간 최상급 신격까지 습득했을 줄은 몰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시리스, 나는 마왕님에게 다녀올 테니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도록.”
“아자젤 님께는 어떻게 말씀드릴까요?”
“그가 왔다고 전하면 알 거다.”
“그? 마왕님이 아닌 건가요?”
“같지만 다르지.”
신자운은 내가 누군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마왕이 아닌 다른 세계의 김세한.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마왕인 내가 말한 거냐?”
“그래. 그리고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만 곁에 ‘잊혀진 자’가 있나?”
“있어.”
“그럼 됐다. 바로 성으로 가도록 하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신자운은 성큼성큼 걸어가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뒤뜰로 가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멋들어진 마차가 있었다.
“아자젤의 허락도 받아야 되는 거 아냐?”
“내가 직접 데려가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
확실히 그건 그러네.
***
“아자젤 님!”
시리스는 신자운과 세한이 떠나자마자 곧바로 아자젤이 있는 나태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로 봐도 마왕님이었어.’
문제는 분위기가 달랐다.
최근 신자운이 마왕과 자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시리스로선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마왕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게 아니면…….
“쉿, 방금 잠들었어.”
나태의 영역은 분노의 영역과 밀접해 있기에 도착하는데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침소의 문을 두드리며 외치자, 아자젤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문을 열었다.
“들어와.”
“네, 네에.”
살근살근 웃으며 말하는 아자젤의 모습에 시리스는 조금 기가 죽으며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갔다. 방금 아자젤이 말했던 것처럼 화려한 침대 위에는 작은 아기가 잠들어있었다.
“귀엽지? 벌써 엄마라고 했어.”
“그, 그러네요.”
다만 시리스의 입장에선 조금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신자운과 아자젤이 결혼하리라고는 그녀도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뭣보다 나태의 악마라는 이명을 듣는 것치고 아자젤은 아기가 태어난 후 상당히 부지런해졌다. 적어도 아기에게 반면교사가 될 수는 없다던가.
“근데 우리 침착한 시리스가 무슨 일이실까. 이렇게 급하게 뛰어오고?”
“아, 그게 마왕님과 꼭 닮은 분이 신자운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마왕님과 꼭 닮은 분?”
“네, 언니를 통해서 분노의 영역에 오셨더군요. 혹시 마왕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서…….”
“왜, 또 전쟁날까 봐?”
싱긋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아자젤의 말에 시리스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요즘 잠잠한 마왕이 또 나서기 시작하면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사실이니까.
“그 사람은 마왕이 아니야.”
“네?”
“그러네. 이제 때가 됐다는 건가.”
시리스는 영특한 여성이었지만 아자젤의 말은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잦았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에 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에도 자신이 모르는 어떤 미래를 본 건지도 모른다.
“이번 일은 내가 예측한 게 아니야. 마왕님이 말해준 거지.”
“마왕님이요?”
“그래. 뭐라더라, DLC? 그걸 통해서 올 수도 있다고 했거든.”
“DLC라니…….”
그렇게 말해도 시리스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그녀는 게임과는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쉽지만 돌잔치는 조금 미뤄야겠어.”
“네? 앞으로 2주 후면 열릴 텐데요?”
“어쩔 수 없지. 다 끝나고 더 성대하게 하면 되지 뭐.”
아자젤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아기를 안아들었다.
“영역 내의 악마들에게 전해. 병력을 집결시키라고.”
“대체 왜…….”
“음, 마왕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지만 전쟁이 일어나긴 할 거야. 다른 영역의 악마들에겐 내가 전달하도록 할게.”
“아, 알겠습니다.”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시리스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아자젤은 허튼 소리를 하는 악마가 아니었다.
“우리 딸. 엄마는 조금 일하고 올게.”
쪽, 아기의 이마에 입맞춤을 한 아자젤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기를 꽉 감싸 안았다.
***
“보통은 성에 마법진 같은 게 있어서 그런 걸로 순식간에 이동하거나 하지 않냐?”
“그런 거 없다.”
“불편하게도 산다.”
신자운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곧바로 마왕의 성이 있다는 오만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분노의 영역에 올 때 타고 왔던 마차보다도 배는 빠른 마차를 타고 있었기에 주변의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이곳의 나는 정말로 미친 거지?”
“지금은 좀 나아지셨다. 정확히는 낮에 문제가 생기고 저녁에는 이성이 돌아온다고 하시더군.”
“너도 모르는 건가?”
“나도 최근에 알게 됐다. 그분을 통해서.”
그분?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마왕인 나를 지칭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분이 누군…….”
“잠깐.”
“엉?”
“숙여.”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묻는 것보다 빠르게 나는 앉아있던 자세에서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흐약!”
물론 내 옆에 앉아있던 이드라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드라가 괴상한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시원한 바람이 머리 위를 스쳐지나갔다.
싱──!
물론 마차 안에서 바람이 불 리가 없다.
말하자면 이건, 이제부터 일어날 일에 대한 전조였다.
콰아아아아!!
마차가 가로로 갈라지며 달리던 속도 그대로 고꾸라졌다.
땅에 쳐 박히기 직전, 나는 이드라를 안고 재빨리 밖으로 뛰어내리며 기습을 가해온 상대를 찾았다.
‘단순히 벤 게 아니야.’
특별히 신격이 느껴진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마력을 이용한 공격도 아니었다.
그것은 제3의 힘.
하지만 내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가장 먼저 온 것 같군요.”
마차가 쓰러지며 일어난 흙먼지의 틈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얼굴에 제법 주름이 잡힌 중년의 남성.
몸에서 느껴지는 기도는 마치 한 자루의 칼과도 같았다.
그자는 공교롭게도 내가 아주 잘 아는 얼굴이었다.
“……송창우.”
그의 손에는 바르자이의 언월도가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