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100화 (100/332)

# 100

100. 불러오기(1)

세한은 자신이 오만했음을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싸웠다면 백이면 백, 자신이 이겼을 거다.

그래서 내심 얕잡아 봤던 건지도 모른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방심은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왔다.

자신의 양다리는 깔끔하게 절단되었고, 파일벙커는 파괴됐다.

“아아아,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오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걸 부수려면…….”

지수는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세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양다리가 잘린 세한을 보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부서진 파일벙커의 잔해를 보며 웃었다.

현재 세한이 가진 무기 중 오직 파일벙커만이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니 지수는 눈을 뜨자마자 그것을 파괴시켰다.

다만 무기를 던진 궤도에 세한의 다리가 있었던 건 실책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좋네요. 사실 조금은 바라던 거예요.”

“한지수, 너.”

세한은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으며 지수를 보았다.

지수의 입에는 기쁨 가득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오빠는 너무 강하니까요. 만약 제가 싫어지면 도망쳐도 잡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솔직히 조마조마했답니다.”

그런 지수의 말에 세한은 내심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아까 전 카페에서의 고백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 감정이 이 정도로 맹목적일 줄은 몰랐다.

지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세한만이 비치고 있었다.

광애(狂愛)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성을 찾았지만, 이성을 찾지 못한 것인가.’

모순적인 말이었지만 현재 지수는 그랬다.

충격을 받아 이지를 상실한 괴물이 되었고, 몸이 한번 파괴되고 재생하며 본래의 이성을 찾았다.

하지만 정상인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평소의 지수라면 짓지 않을 미소, 시선. 그리고 말이 그 증거였다.

지금의 지수는 그녀가 꾹꾹 눌러서 참고 있던 그녀의 이면.

사실 그것은 그다지 놀라운 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참고 자신의 본심을 숨긴다.

지수는 그것이 지나쳤을 뿐이다.

거기에 천살성의 광기가 그녀를 삼켜 지금의 모습을 만든 거겠지.

‘이거, 좋지 않은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세한은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양다리가 잘린 시점에서 그가 가진 패는 많지 않았다.

허수공간을 이용한 공격은 이성이 잃은 지수에게도 그다지 통하지 않았다.

지수의 몸을 찢고 재생능력을 상회할 장비도 존재하지 않았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긴 했지만 위험부담이 컸다.

“걱정 마세요, 오빠. 제가 계속 곁에 있어줄게요. 다리 같은 거 없어도……, 아니다. 다리가 없는 게 좋아요. 제가 오빠의 다리가 되어주면 되잖아요? 언제나 이 게임 때문에 고생하실 필요도 없어요. 제가…… 끝내 버릴 테니까.”

지수는 그리 말하며 세한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정말로 사랑스럽다는 듯.

잘린 다리를 볼 때면 눈물을 흘렸지만, 그럼에도 얼굴에는 기쁨이 만연했다.

‘해냈어.’

지수는 가슴에 차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언제나 생각으로만 그쳤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양다리를 잘랐으니 그도 도망치지 못할 거다. 언제나 자신의 곁에 두고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다.

‘세상이 변해서 다행이야.’

게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생각하던 막연한 망상이 현실이 되었다.

아버지도 죽었고, 어머니도 죽었지만 세한이 남아 있었다.

세한만큼은 절대 둘처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세한 오빠…….”

황홀한 얼굴로 세한의 귀에 속삭이던 지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파일벙커에 맞을 때 떨어트렸던 흉성의 학살자를 집어 들기 위해서다.

“……응?”

흉성의 학살자가 있는 장소로 걸어가던 지수는 문득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죽던가, 이미 도망쳤을 텐데 분명 무언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천살성 스킬 덕에 인간이라면 눈을 감고도 위치를 알 수 있는 지수였지만 지금은 뭔가 불확실했다.

“쥐?”

주변을 샅샅이 뒤지던 지수는 그제야 계속 느껴지던 기척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기척의 주인은 바로 쥐였다. 새하얀 생쥐.

딱히 쥐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설마.”

지수의 눈이 번쩍였다. 왼손을 뻗자 땅에 박혀있던 손도끼가 날아와 손에 잡혔다.

도끼를 쥔 왼팔을 뒤로 젖히며 그것을 다시 던지려는 순간, 자신의 주변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면 자신이 있는 주변에 미세한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일을 벌인 이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민아──!!”

비명처럼 소리치며, 도끼가 지수의 손을 떠나는 동시에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날아간 도끼는 뽈뽈뽈 돌아다니던 생쥐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꿰뚫으며 박혔다.

콰쾅!!

“……찍.”

도끼가 스쳐지나간 것에 놀랐는지, 생쥐는 자신의 머리를 짧은 발로 매만지다가 이내 엉덩방아를 툭, 찧었다.

“주, 죽는 줄 알았다.”

생쥐가 반짝 빛나자, 그곳에 교복을 입고 있는 단발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길드에 있을 이민아가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등장에 세한도 당황했다.

민아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너 왜 여기 있냐?”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으며 세한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민아는 아직도 도끼가 지나갔던 머리 부분을 손바닥으로 만지며 말했다.

“난 오기 싫었는데…….”

민아가 검지를 펴서 하늘을 가리켰다.

시선의 끝에는 둥실둥실 떠있는 하나의 옵저버가 있었다.

바로 어릿광대의 옵저버다.

“오빠가 위험하다고 어릿광대가 말해서 왔어. 나는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었지 뭐야. 흐아. 진짜 죽는 줄 알았어어어.”

이제는 신님이 아니라 어릿광대를 아이디로 부르는 모양이었다.

세한은 민아의 말에 내심 안도했다.

확실히 이번 일을 보기 위해 신들의 옵저버가 와 있긴 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다.

신은 신이니 본능적으로 세한이 위기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둥실 날아온 어릿광대의 옵저버가 세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치 ‘나 잘했지?’라고 말하는 눈치였다.

“네, 정말 감사합…… 큭.”

감사의 인사를 말하던 세한은 다리에서 몰려오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민아도 그제야 잘린 다리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마, 맞다! 이거 어떡해! 다, 다리 잘렸는데 이거 치료할 수 있어?”

“호들갑떨지 말고 다리나 주워줘. 이, 이 정도는 괜찮으니까.”

“허세는! 얼굴이 창백한데 뭐가 괜찮아?”

민아는 쫑알거리며 세한의 다리를 주워 그에게 내밀었다.

세한은 그것을 아까 지수가 손목을 붙일 때처럼 자신의 다리에 가져다대었다.

지수처럼 빠르게 붙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회복되고 있었다.

워낙 깔끔하게 잘린 덕이다.

‘진짜 재생하고 천살성 스킬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지수만큼 등급이 높지는 않지만 잘린 다리를 붙일 정도는 된다.

만약 스킬이 없었다면 길드로 돌아가 백설이에게 치유마법을 부탁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은 과다출혈로 생사의 경계에서 줄넘기를 했으리라.

“근데.”

조금 시간이 흐르고 다리가 붙은 걸 확인한 세한은 붙은 다리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민아에게 물었다.

“지수는 어떻게 한 거야?”

“응? 아, 지수 언니는 공간박리(空間剝離)로 가둬놨어.”

“파일벙커 만들 때 썼던 거?”

“맞아. 오빠 기억력 좋네!”

그렇다면 확실히 안심할 수 있었다.

“얼마나 오래 유지가 되냐?”

“내 마력이 버티는 한 지속되니까…… 한 이틀? 그때처럼 계속 보수할 수도 없어. 보수하려면 잠깐잠깐 해제해야 되니까.”

“그렇군.”

생각보다 시간이 짧았다.

그동안 지수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찾아야했다.

죽이는 방법도 있겠지만 역시 급한 상황이 아니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지수를 잃는 건 1회차의 빚을 떠나서도 내게 큰 손해다.

당장 나를 이렇게 몰아붙일 수 있는 플레이어는 없다고 봐도 될 정도니까.

‘문제는 딱히 해결방법이 없다는 건데.’

DLC 상점도 아까 둘러보았지만, 저런 상태에 도움이 될 건 딱히 보이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지수의 이성을 유지시키던 ‘특성’으로 추측되는 게 제대로 구실을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단순한 폭주라기엔 패턴이 이상했다.

이성적이었다가, 이성을 잃었다가, 다시 이성을 되찾는 지수의 모습은 여러모로 이상했다.

아마 특성 자체에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높았다.

“넌 혹시 좋은 스킬 없냐?”

“없는뎅.”

가볍게 말했지만 정말로 없는 모양인지 민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민아가 모른다면 다른 플레이어에게도 기대해 보기가 힘들어.’

아서와 공유한 정신약체 내성이 그리워지는 판이다.

애초에 그때는 그 스킬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이번만큼은 정말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근본적인 원인은 지수의 어머니가 죽은 것이다.

그렇다고 죽은 지수의 어머니를 살릴 수도 없으니 사실상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를 어떻게 죽일지는 고민을 한 적이 많았지만 정신을 치료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건 처음이었다.

“고민이 많은 얼굴이로구나.”

“당연히 고민할 수밖에…….”

무심코 대답하던 세한은 말을 멈췄다.

왜냐면 이 상황에 결코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순간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하늘에 떠 있던 옵저버들이 요동을 치고, 바람에 흔들리는 검붉은 옷자락을 본 순간 그것이 제대로 들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런 복장을 하고 있는 존재는 자신이 알기로 단 한 명뿐이니까.

“네가 왜 여기에…….”

“그대가 신에게 기도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어서 말이야.”

그녀, 이드라는 주변에 도망치는 옵저버들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며 민아의 곁에서 둥실둥실 떠있는 어릿광대에게 윙크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만약 다른 신에게 기도라도 할까봐 이렇게 급히 와버렸도다.”

그렇게 말한 이드라는 마치 악동처럼 웃어보였다.

***

녀석의 등장은 꽤나 갑작스러웠다.

설마 이렇게 태평히 모습을 드러내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수많은 옵저버들이 있었고, 신의 강림은 본디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무엇이 궁금한지는 알지. 말하자면 이 모습은 환상인 거다.”

“……뭐?”

“이쪽 세계의 말로 하자면 VPN으로 우회하고 더미 파일을 이 세계에 심어뒀다고 하는 편이 옳겠군. 뭐, 그래서 힘 같은 걸 사용하려면 절차가 조금 복잡하다만.”

절차가 복잡하다는 건, 어쨌든 사용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나는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건가?”

“그러니까 신인 것이지. 악마들이 하는 것처럼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신들은 굳이 그렇게까지 게임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뿐이야. 뭐, 당연히 한계는 있다. 플레이어에게 마땅한 보상을 받는 한에서 도움을 줄 수 있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나를 버그로 간주하고 지워 버리려 할 것이야.”

“보상이라면?”

“플레이어가 신에게 줄 수 있는 게 포인트말고 다른 게 있겠느냐.”

“하…….”

솔직히 너무 황당해서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나뿐이 아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민아가 어릿광대에게 물었다.

“저거, 정말 허용되는 일이야?”

당연히 어릿광대의 옵저버가 좌우로 흔들렸다.

말도 안 된다는 건지 붕 날아간 옵저버가 이드라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와하하하, 억울하면 그대도 하던가! 신의 질투란 언제나 추한법이지. 참고로 나도 신으로서 나름 규칙은 지키고 있다. 지금도 방송으로 송출중이지. 퍼블리셔도 아마 알고 있을 거다.”

“……방송?”

“그래. 요즘 영상 업로드에 재미를 붙여서 갓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있지.”

갓튜브는 또 뭐야.

커뮤니티에서 영상을 올리는 사이트인가?

나중에 한번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확인을 해봐야할 것 같았다.

이드라는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있는 옵저버들을 향해 외쳤다.

“갓튜버 드림위치로다. 나중에 검색해서 구독 부탁한다!”

어릿광대의 옵저버가 펄쩍 뛰었다.

아마 아는 유튜…… 아니 갓튜버였던 모양이다.

‘뭔가 전생이랑 다른 기분이 드는데.’

전생의 이드라가 커뮤니티에 영상을 올렸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아니, 따지면 애초에 이렇게 다가온 것부터가 이상했다.

영상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것도 있었고.

뭔가 느낌이 쎄했다.

설마…… 아니겠지.

생각해 보면 내게 스킬을 준 것도 있고 수상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튼.”

대충 옵저버들과 인사를 나눴는지 이드라가 말했다.

“상황을 계속 영상으로 찍고 있었으니 알고 있다. 방금 결계에 가둬둔 아이를 구하려는 게지?”

“그래, 맞아.”

말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이드라가 워낙 태연하게 말을 걸어오므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 말처럼 지금 중요한 건 지수다.

“정신이나, 꿈. 환상을 다루는 이로서 말하자면 가장 빠른 방법은 이 아이의 어머니를 이곳에 데려오는 게 제일이지. 그럼 본인의 특성도 다시 발현될 것이며 정신을 차리는 것도 금방일 게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만약 가능하다면?”

“뭐?”

“가능하다면 어쩔 텐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드라의 표정이 워낙 자신만만해서 진짜인가 싶을 정도다.

“요는 이 아이와 어머니와 재회만 시키면 된다.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과거로 가지 않는다면 결코…….”

“그대는 이미 한번, 과거에 다녀오지 않았나. 그곳이 비록 꿈이었지만 말이야.”

이드라의 말에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녀석은 알고 있다.

내가 몽상의 던전에 다녀왔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거다.

어쩌면 몽상의 던전 안에서 있었던 일도 알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건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이거 구독자를 많이 늘릴 수 있겠구나.”

흐흐흐, 거리며 웃는 이드라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