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177화. 어둠 속으로 (2)
“그저 어두워진 것인가? 아니면……”
잠깐 멈칫하고, 주변을 더듬었다. 하지만 만져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어둠이지만, 촉감까지 죽진 않았다.
아무래도 어디론가 이동된 모양이다.
“…다행인가?”
회드르는 시그뉘와 판도라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으니…….
아마, 둘은 멀쩡하게 잘 있을 거다. 문제라면 지금, 이 어둠에 휩싸인 이후로 볼바들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걱정하겠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쨌거나 이 어둠이 무한히 펼쳐져 있을 수는 없는 법. 어떻게든 길을 찾아보자.
꼬르륵, 다짐과 함께 배가 울었다.
“제기랄. 날 굶겨 죽일 생각이었다면, 좋은 전략이다. 하지만…….”
나름 신이다.
굶어 죽기야 하겠는가?
배고픔을 참으며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가물가물해지는 상황에서 배고픔만이 점점 커졌다.
얼마나 굶은 거지? 하루, 이틀? 아니, 한 달 정도인가?
어둠 속에서 시간 감각이 흐려졌다.
“졸리진 않으니, 얼마 지나지는 않았을 텐데.”
괜히 혼잣말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새까만 어둠을 무덤덤하게 걷자니, 빛이 있었다.
“…음?”
수상하다.
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빛이라니.
노골적인 함정이리라. 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방랑보다는, 함정이라도 겪어 보는 게 좋겠지.”
히죽 웃으며 그리로 걸었다.
회드르의 말에 따르자면, 어둠에 맞서는 빛인지 행동으로 보이라고 했다. 놈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니.”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많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어둠 속에서 쫄쫄 굶어 죽는 것보다야 화끈하게 함정을 뒤집어쓰고 죽어 버리는 게 낫겠지.
걷고 또 걸었다.
한 줄기 빛은 가까운 듯 멀었고, 한참이나 걸려 도착할 수 있었다.
벽에 걸린 횃불.
돌로 만들어진 음침한 복도가 보였다.
“…허.”
이게 정말 앞을 볼 수 없는 회드르가 만든 환상일까?
아니, 환상 같은 눈속임이 아니다. 나를 속이는 건 로키도 할 수 없던 일. 눈에 힘을 주고 뚫어져라 살폈건만, 이상한 점은 없다.
그렇다면…….
“아누비스와 비슷한 짓을 한 건가?”
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창끝에 달린 날이 횃불 빛에 번뜩인다. 이 녀석이 창촉이 되기 전, 차원을 가르는 낫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비슷한 능력으로 날 집어삼켜 이동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앞에는, 날 이길 수 있을 법한 강적이 있으리라.
“…유피테르?”
회드르가 낼 수 있는 패 중 가장 강력한 패를 떠올렸다.
기대와 떨림이 공존하는 상태로 걸었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을 마주했다.
-…오디슨.
반가운 얼굴은 아니다.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마르스.”
-크흐흐, 그 장님이 보낸 선물이 너인가?
눈을 번뜩이며 말하는 마르스.
회드르가 날 선물했다고? 어이가 없다.
“회드르에게 욕이라도 했나? 서로 안면을 튼 지도 얼마 안 됐을 텐데, 선물로 폭탄을 받다니……. 거, 성격 한번 대단하군.”
-건방진 놈!
그나저나, 마르스와 꼭 닮았지만 어딘가 불안정한 느낌이다.
이전에도 본 적 있는 꼴이다.
패배한 비다르가 저랬고, 유피테르가 저랬다.
눈살을 구겼다.
“타락했나?”
타락. 마르스의 신성은 더는 빛나지 않는다.
오염된 마르스가 흐흐- 웃음 지었다.
-타락이라고? 아니, 이건 타락이 아니다.
“…헛소리를 하려면 그럴듯하게 해야 할 텐데.”
-아버지가 가신 길이다! 그 후계자인 내가 당연히 따라야지!
쯧, 혀를 찼다.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그나저나…….
마르스가 날 보더니 얼굴을 구겼다.
-네가 왜 비너스의 신성을 가지고 있지?
아, 이 쓰레기 같은 작자가 비너스의 남편이었던가? 불쌍한 여자다.
“왜겠나?”
비너스가 줬으니 가지고 있지.
하지만 마르스는 내 말을 오해한 모양이다.
-네가, 네가 아프로디테를! 개 같은 놈! 천박하기 짝이 없는 쓰레기!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아는 것과 좀 다른데.
후원이니 뭐니 개소리를 먼저 한 건 마르스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니다. 개망나니 같은 놈이라 해도, 비너스의 남편이었다. 그렇다면 비너스가 어찌 죽었는지 알 권리는 있다.
“내가 비너스를 죽인 건 아니다. 비너스는 유피테르의 번개에…….”
-닥쳐라! 아버지가 아프로디테를 죽일 이유는 없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겐가?”
올림포스를 홀로 다 박살 내 버리고, 찌꺼기를 이끌고 있는 유피테르가 정말로 비너스를 죽일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건가?
감탄스러울 정도다.
과연, 회드르가 날 여기로 보내며 한 이야기가 이해됐다.
이 미쳐 버린 믿음을 앞에 두고, 내가 어찌 행동할 것인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 나는 수수께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스, 비너스는…….”
-닥쳐라!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마르스는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여기는 널 도와줄 이도, 도망칠 곳도 없다! 내 친히 네놈을 찢어 아프로디테의 넋을 달래리라!
마르스가 내게 달려들었다.
맹호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으나.
“…갇혀 있었다더니, 세상 물정을 모르는군…….”
부우웅!
마르스의 주먹질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마르스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에 대한 대답은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다.
“내가 예전의 나인 줄 아는가?”
쐐애애액!
창을 마르스에게 내질렀다.
* * *
“아…….”
뿜어져 나오던 어둠이 사라진 뒤, 시그니료드는 눈을 떴다.
“오빠?”
그리고 사라진 오디슨을 불렀다.
하지만 오디슨과 회드르에게 그 목소리를 닿지 않았다.
시그니료드가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을 때, 판도라는 아아- 탄식을 흘렸다.
“연결이… 연결이!”
“언니! 갑자기 무슨……!”
“시그니, 오디슨 님과 연결이…….”
판도라의 말에 깜짝 놀란 시그니가 마음속으로 오디슨을 불렀다. 하지만 공허한 외침일 따름이었다.
제대로 된 볼바가 된 뒤, 한시도 끊어진 적 없던 연결고리가 깔끔하게 잘려 나간 느낌.
그건 사지가 잘린 듯한 느낌과 비슷했다. 있어야 하는데 없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연결이었다지만, 그로 인해 얻었던 안도감이 일시에 증발했다.
시그니료드는 덜컥 겁이 났다.
“오, 오빠가…….”
몸이 떨렸다.
신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떠올렸다.
신의 소멸. 불길하기 짝이 없는 어둠에 빨려 들어간 오디슨을 생각하자니, 그 추측이 점점 몸집을 불렸다.
시그니료드는 당황했다. 하지만 판도라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아으, 아아아!”
판도라는 공포에 질린 듯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구 몸을 떨어 댔다.
시그니료드와 판도라는 달랐다. 시그니료드는 오디슨을 영접하기 전에도 볼바 견습생으로서 그럴듯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판도라는?
수백 년간 지독한 학대를 당해 온 기억뿐이었다.
판도라가 가진 ‘좋은 기억’은 삶의 초창기를 제외하면 모두 오디슨을 만난 이후에 쌓인 것들이었다.
공황에 빠진 판도라는 어쩔 줄을 몰랐다.
시그니료드는 그런 판도라를 달랬다.
“언니! 정신 차려!”
“하지만, 하지만…….”
“똑바로 정신 차리란 말이야!”
짜악!
시그니료드가 판도라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판도라는 짜릿한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또렷한 정신에 다가오는 건 걷잡을 수 없는 공허감.
판도라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오디슨, 오디슨 님이 없으면 나는… 나는…….”
“언니, 정말 오빠가 죽었다고 생각해?”
“그, 그건…….”
판도라의 눈동자가 떨렸다.
시그니료드가 또렷한 눈으로 판도라에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확고한 믿음이 담긴 말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말은 판도라의 마음을 감싸던 공허를 한순간에 내쫓았다.
문득, 판도라는 오디슨에게 구원받던 때를 떠올렸다.
-현실을 외면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맞아. 연결은 끊어졌어. 하지만? 오디슨 님이 죽었다는 증거는 안 돼. 회드르의 권능일지도 몰라.’
판도라의 눈물이 멎었다.
시그니료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게다가 오빠가 죽었다면, 회드르가 우리를 놔두고 갈 이유가 있겠어?”
“아!”
판도라가 탄성을 내뱉었다.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회드르가 찌꺼기들과 손잡은 게 틀림없다. 오디슨이 말하기를, 찌꺼기의 목적은 아스가르드로 향하는 신앙의 차단.
그렇다면 회드르가 오디슨을 제압한 뒤에 할 일도 뻔했다.
“그렇구나.”
아스가르드 신앙의 주축이 되는 것은 왕실이다. 그중에서도 여왕인 시그니료드와 궁정 볼바인 판도라. 두 사람이 주축이다.
왕국민 대다수는 옛 제국의 사람들.
두 사람이 죽어 버린다면? 아스가르드의 신들보다는 올림포스의 신들을 찾으리라.
“오디슨 님은 멀쩡하셔.”
“그래, 아마 싸우고 있을 거야.”
시그니료드가 말했다.
오디슨이 싸우고 있다면? 시그니료드도 싸워야 한다.
찌꺼기와의 싸움을 단단히 준비하여, 오디슨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
하지만…….
“…공격이 멈췄다?”
“예, 밤을 틈타 갑자기 나타나던 놈들인데… 이제는 밤에도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그분께서 내려 주신 술과 고기의 효과가 아닐까…….”
전령이 신바람 난 듯 소리쳤지만, 시그니료드는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러운 어둠과 함께 사라진 오디슨.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어둠과 함께 나타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괴물들은 회드르의 힘으로 기습을 하고 있었구나.’
회드르를 오디슨이 잡아두고 있는 거라면…….
“당장! 수도의 시민 모두를 소집하세요!”
“예? 에에, 그게 무슨…….”
“제사를 올릴 거예요! 그분께서 회드르와 싸우고 있기에 괴물들이 어둠에 숨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분께 힘을 보태야 해요!”
시그니료드는 오디슨에게 가장 도움 될 일을 찾아냈다.
판도라가 그 곁에서 고개를 주억였다.
두 볼바의 제사는 이제껏 펼쳐진 적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한편, 아스가르드에서는…….
-발키리! 발키리들을 떨어뜨려라!
-크아아악! 청동 날개를 단 비둘기들! 너희를 찢어 죽이리라!
발키리의 가세에 힘입어 에인헤랴르가 찌꺼기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계의 찌꺼기들이 힘을 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원군! 원군은 멀었나!
-곧, 곧 온다! 하계로 갔던 놈들이 돌아온다!
찌꺼기의 공세가 약화되자, 제우스는 하계에 투입했던 찌꺼기들까지 모아 아스가르드 공략에 힘쓰기로 마음먹었다.
그에 왕 바로 아래, 사령관급 찌꺼기는 우려를 금치 못했다.
-하계에 대한 압박을 날려 버리면 장기전으로 갔을 때 우리가 불리합니다, 제우스 님!
제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 싸움은 장기전으로 갈 수 없다.
-하지만…….
-그리고, 그들을 투입하라!
이어진 말에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가르드에서 발키리가 나왔다면? 이쪽에서도 그에 비견하는 병력을 내보내야 할 것 아닌가?
“찌꺼기답게 죽어 거름이 되어라!”
-끄어어어……!
"크흐흐… 됐다! 목을 베었으니…….“
-그을쎄… 그걸로 내가 죽을 것 같은가?
“뭐?”
서걱!
목을 베었다고 안심하던 에인헤리의 목이 날아갔다. 그 광경을 본 에인헤리들이 마구 달려들어 그 찌꺼기의 몸을 찔렀으나…….
-부족하구나, 부족해! 이 아킬레우스에게 대항할 상대는 없는가!
불사신, 아킬레우스.
바다 님프인 테티스와 영웅 펠레아스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에 어머니인 테티스가 스틱스강에 씻겨 불사의 몸을 얻었다는 속설이 있는 영웅이다.
발목을 잡고 씻긴 탓에 발목이 약점으로 남았지만…….
-네까짓 것들이 영웅이라고? 진짜 영웅은 바로 이 아킬레우스 님을 말하는 것이다!
전투 중에 발목을 노리는 게 쉬울 리가 없다. 게다가 아킬레우스 역시 발목을 보호하기 위해 쇠로 만든 부츠를 신은 상황.
아킬레우스가 미쳐 날뛰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날 패배자라 부르는 자들이여, 죽어라! 죽어!
-크하하하! 벌레같이 기는구나! 폴리테스 같은 놈들!
오디세우스, 네오프톨레모스 등 숱한 올림포스의 영웅들이 타락하여 날뛰었다. 대다수가 올림포스가 망할 때 도주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엘리시움은 발할라와 비슷하지만, 발할라보다 훨씬 진입 요건이 까다로운 곳. 발할라 T100, 혹은 N100에 가까운 실력을 자랑하던 자들이 찌꺼기가 되었으니, 에인헤랴르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발키리들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꺼- 져-!”
콰앙!
괴르의 음파 공격에도 엘리시움의 영웅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크윽!”
이라호드의 창도 그들을 꿰뚫을 수 없었다.
에인헤랴르의 우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티르가 소리쳤다.
“신들, 신들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오딘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제우스에게만 영웅들이 있다 생각하는가?”
오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엘리시움의 영웅? 좋지. 하지만 잊지 마라, 티르.”
오딘의 회색 눈동자는 지독하게 차가웠다.
티르는 그 눈동자를 보며 덜컥 겁을 먹었다. 결투도 담당하는 신답지 않은 태도였으나, 그 누가 지금 오딘을 보고 겁먹지 않을 수 있으랴.
오딘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타락한 영웅은 결국, 올곧은 영웅을 이겨 낼 수 없다는 것을.”
“그게 무슨…….”
티르가 설명을 요구할 때, 전세가 다시 뒤집혔다.
티르의 비서역을 맡은 발키리가 외쳤다.
“피난민들이… 피난 온 영웅들과 올림포스의 신들이 가세했습니다!”
타락을 지독하게 여기는 이들은 타락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오딘은 끌끌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어쩔 테냐, 제우스?”
마치 체스를 두는 듯한 태도에 티르는 입술을 짓씹었다.
‘전쟁은 체스놀이가 아니다!’
스러져 간 목숨들이 오딘에게는 그저 체스 말과 다름없단 말인가?
티르는 지독한 자괴감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딘의 방식이 옳았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은 뒤에 승리의 뿔 나팔을 분다고, 뭐가 달라지긴 할까……?’
티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독한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