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176화. 어둠 속으로 (1)
전쟁은 언제나 똑같다.
돌멩이를 들고 싸울 때나, 칼을 들고 싸울 때나. 사람과 맹수의 전쟁이나, 사람과 사람의 전쟁이나.
신에게 선택받은 전사들과 신에게 버림받은 찌꺼기들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죽어라!”
언제나처럼 우악스럽고.
-크아아아! 신의 개들!
언제나처럼 야만스러우며.
“으아아아아악! 오, 오딘이시여!”
-크으으으! 이, 이대로 끝인 건가……! 이대로? 으윽……!
언제나처럼 끔찍하다.
특히나 지금의 전세는 에인헤랴르에게 더욱 지독했다.
“젠장할! 지원, 지원이 필요하다!”
“뭣들 하고 있어? 여기 뚫린다고! 으아아악!”
에인헤랴르 전부가 신의 축복을 받진 못했다. 그에 비해 찌꺼기들은 원망으로 응축된 제각기 특수 능력을 지닌 상황이다. 모두가 그 특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이들만을 비교하면 찌꺼기 측이 우세하다.
수준 높은 찌꺼기가 수준 높은 에인헤리를 죽이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찌꺼기의 군세가 시간이 지날수록 에인헤랴르를 몰아붙인다는 의미다.
개중에서 축복을 지닌 에인헤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크흐흐! 네가 모시는 그 잘난 신께 빌어라! 어리석은 자여!
“허윽, 흐으… 씨벌, 이 괴물 딱지 같은 새끼…….”
-죽어라!
온몸이 나무로 이뤄진 찌꺼기가 제 몸에 붙은 불을 끄지 않은 채 주먹을 휘둘렀다. 그 앞에서 에인헤리는 죽음을 직감했다.
나무로 이뤄진 찌꺼기의 특수능력은 재생. 한순간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이지 못한다면 금세 다시 자라 덤벼온다.
그 탓에 길어진 싸움. 결국 패배는 에인헤리의 몫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찌꺼기들에게 죽으면 부활도 안 되는데!’
오딘의 전사.
에인헤리답지 않게 그는 공포를 느꼈다.
절망하며 눈을 감았다. 이어질 소리는 뻔했다.
제 머리가 박살 나며, 생의 마지막 소리를 듣게 되리라.
하지만…….
-뭣?
퍼억!
둔탁한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전장의 소음이 끊어지진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죽음 앞에서 덜덜 떨던 에인헤리는 생각했다.
‘죽음의 순간, 귀가 가장 늦게 먼다더니…….’
도대체 누가 한 소린지 모를 소리다. 정확한 근거가 있는 소리도 아닌데, 이상하게 유명한 말.
하지만 이어진 목소리에 에인헤리가 눈을 번쩍 떴다.
“거, 따끈따끈하구만!”
-어, 어떻게……?
“흐흐, 내 친구 놈이 좋은 걸 걸어 줬거든.”
에인헤리가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전사답지 않게 두툼한 체구를 지닌 거한이었다.
“퉷, 하필이면 이 이그나르 님의 상대가 나무쪼가리라니……. 재수도 없구나!”
-허! 맷집은 쓸 만하나, 날 박살 낼 수 있겠느냐! 나는 무한히 재생하는…….
“거, 나무토막이 말이 너무 많군!”
퍼걱!
-끄아아악!
사내의 도끼질에 찌꺼기가 쩍 갈라졌다.
그의 등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에인헤리의 입도 쩍 벌어졌다.
“어, 어떻게……?”
이그나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 나무는 도끼로 패면 한 방이지.”
“하지만 보통 힘으로는 절대…….”
“내가 고깃집을 하거든. 술이랑 고기는 엄청 먹었지.”
큭큭, 이그나르가 웃었다.
에인헤리는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린다.
“형님! 이쪽 좀 도와줘요!”
“어이쿠, 토르손, 저 새끼 저거……. 난 가 봐야겠소. 댁도 얼른 추스르고 다시 싸웁시다.”
그럼- 이그나르가 인사를 남기고 싸움이 한창인 곳으로 달렸다.
이그나르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에인헤리는 눈을 끔뻑였다.
‘…술과 고기.’
질린다고 세흐림니르 말고 다른 고기를 먹었다. 질린다고 헤이드룬 미드 말고 맥주나 다른 술을 마셨다.
심지어는 가끔 산뜻한 맛이 당긴다고, 샐러드로 끼니를 때우기까지!
“크윽……!”
에인헤리는 다짐했다.
앞으로 절대 풀은 입에도 대지 않겠노라고!
그런 다짐을 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모두 이그나르의 교묘한 홍보 때문이었다. 전쟁 후 가게가 미어터지는 걸 상상하며 흐흐- 웃음을 흘려야 할 이그나르였지만…….
“커억!”
그럴 여유는 없었다.
“형님!”
-크흐, 아무리 빠르게 회복한다지만, 회복한 틈을 안 주면 어떨까?
찌꺼기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몇이나 되는 찌꺼기가 이그나르에게 공격을 날리고도 당하자, 이그나르에 대해 파악한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이그나르의 전략. 그 전략이 파훼되었다.
“이, 이 비겁한 새끼들……!”
이그나르가 피를 토하며 욕했다.
그에 찌꺼기가 쯧쯧 혀를 찼다.
-이제껏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 빈틈을 노려놓고, 뭐? 비겁? 웃기는 작자로군! 신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그랬다! 제 편한 대로 말을 맞추기에 급급했지!
“크, 크으… 아무리 그래도, 젠장……!”
-허! 이건 결투가 아니다. 멍청한 놈아! 이건 전쟁이다! 죽어라!
찌꺼기들이 이그나르를 덮쳤다.
아무리 회복력이 좋다 한들,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
“여보……!”
이그나르가 니플헤임에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아내와 아들을 떠올렸다. 이 전쟁이 끝나면 곧장 둘을 데리고 올 수 있건만!
찌꺼기들이 마구 덤볐고, 이그나르의 몸에는 치명상이 점점 늘어갔다.
다른 이였다면 진작 죽었을 상처들.
이그나르는 어마어마한 회복력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끝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온몸이 칼로 이뤄진 찌꺼기가 팔을 휘둘렀다.
서걱!
“크윽!”
서늘한 소리와 함께, 팔이 떨어져 갔다.
-이럴 때 방해라니!
“흐, 형님을 죽게 내버려 둘 수야 없지! <그람>, 피의 복수를!”
팔이 잘린 토르손이었지만, 그람의 손잡이 부분을 재가공한 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게 구명절초가 되었다.
다시 팔을 휘두르려는 칼날 찌꺼기의 목이 뚝- 잘려 나갔다.
-뭐?
제 목이 떨어졌다는 것도 모른 채 당황한 목소리를 내뱉은 찌꺼기.
그의 유언이었다.
“쿨럭, 쿨럭… 이 멍청한 새끼……. 네, 팔이…….”
“크흐흐, 형님을 죽게 놔둘 수 있겠소?”
“젠장할… 우린 둘 다 죽었어, 임마.”
이그나르가 투덜대자, 토르손이 낄낄 웃었다.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이그나르, 그리고 팔이 잘려 허덕이는 토르손. 둘은 찌꺼기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리라.
-우리 동지를 몇이나 죽인 놈들이다.
-최대한 끔찍한 죽음을 선사해 주지!
-신의 개, 너희 신을 불러라! 너희의 신앙을 비명으로 증명하라!
찌꺼기들이 다가왔다.
찌꺼기들의 군세가 에인헤리를 점점 압도했다.
방어선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젠장, 끝인가… 너네 대장은 뭐한다냐?”
“크흐, 대장은 하계에서 아주 바쁜 모양입니다.”
“하계, 하계도 중요하지… 그래.”
이그나르와 토르손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생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거라는 걸 둘 다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발- 키- 리, 나- 가- 신- 다!”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고함.
에인헤랴르는 모두 깜짝 놀라는 정도로 그쳤지만, 발키리의 적들에게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크아아악!
펑펑펑!
찌꺼기들은 음파 공격에 나동그라졌다.
이그나르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괴성을 내지른 발키리는 그도 몇 번 본 적 있는 귀여운 인상의 발키리였다.
아가씨보다는 소녀라는 말이 어울리는 발키리.
투기장 매표소에서 일하며, 싸움의 법칙에도 얼굴을 드러내는 괴르. 귀여운 외모로 특수한 부류에게 인기를 끄는 발키리였다.
“바, 발키리다!”
“발키리들이 가세한다!”
와아아아아아!
에인헤랴르가 고함을 내질렀다.
이그나르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거, 아직 죽을 때는 아닌가 보군.”
“크흐흐… 잘됐소.”
“오디슨 그 새끼, 하계도 중요하지만 여기도 중요하다는 걸 알아야지! 망할 놈.”
“대장은 언제나 그렇소. 큭큭.”
죽음을 직감했을 때는 오디슨의 선택을 존중하던 둘이지만, 살았다는 걸 알아차리자 곧장 오디슨의 뒷담을 시작했다.
남을 욕하는 건 산 자의 특권이니까.
“괴르! 노래를!”
“오! 알았어!”
이라호드가 괴르에게 노래를 지시하고, 쏜살같이 날았다.
괴르의 노래는 에인헤랴르에게 힘을 주고, 찌꺼기들의 움직임을 둔하게 할 터. 괴르는 직접 전투 능력보다 그 목청 하나로 발키리가 된 특이한 케이스였다.
“하아앗!”
이라호드는 하늘을 종횡무진하며 창을 마구 던졌다.
한 번에 대여섯을 꿰뚫는 투창 공격. 본래라면 이라호드의 투창에 적합한 창이 비싸 여러 자루를 마련할 수 없지만…….
지금처럼 비상사태에서는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만들어 내야만 했다.
게다가…….
‘오디슨 덕도 봤고.’
오디슨이 로키의 사위가 될 거라는 말에 질색한 드베르그를 보고, 이라호드가 슬그머니 주문 사이에 제 창을 끼워 넣었다.
수십 자루로 늘어난 이라호드의 창은 전장에서 진가를 보였다.
“빌어먹을……!”
-어리석은 것들, 진정한 진리를… 커억!
최후의 일격을 먹이려던 찌꺼기의 목이 창에 꿰뚫렸다.
궁지에 몰린 에인헤리가 신묘한 창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차, 창이……! 크아아악!
-나, 날 쫓아온다!
-궁니르, 궁니르인가!
퍽퍽퍽!
이라호드의 창은 자비가 없었다.
순식간에 찌꺼기 수십을 해치우는 발키리들이 수백.
밀리던 전세가 다시 뒤집혔다.
이라호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잠깐 숨돌릴 여유가 생겼다.
그녀는 전장을 주시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오디슨을 떠올렸다.
‘…하계에는 별일 없으려나?’
당장 날아가고 싶지만, 갈 수 없다.
이라호드는 최대한 많은 찌꺼기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이쪽의 싸움이 격해지면, 하계로 찌꺼기를 보내 분탕 치는 것도 부담스러워질 터. 그녀는 오디슨의 부담을 줄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라호드가 생각지 못한 게 있다.
제우스 측에서 오디슨에게 신을 보냈을 것이라는 점이다.
* * *
발두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움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 믿음은 고작 그런 ‘추측’에 휘둘릴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발두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뭐. 오딘께서 후계자를 보호하고 계실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회드르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다인가?”
“흐, 흐흐흐흐… 그럴 줄 알았지. 믿음이라는 놈은 언제나, 보기 싫은 걸 외면하기 마련.”
“글쎄, 나는 네가 어째서 가만히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회드르가 눈썹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었다고? 그럴 생각이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아는가?”
말? 고작?
“말은 진심을 파악하기 어렵지. 네가 정말 억울했다면, 행동했어야 했다. 눈먼 자여. 보이지 않는 진심보다 보이는 행동이 명확한 것은 당연한 일. 모두가 너처럼 눈먼 것은 아니니까.”
“허! 행동에 다른 의미를 담았다고 한들, 그걸 어찌 알지? 내가 눈이 멀었다고 생각마저 못 한다 여기는 건가!”
고개를 저었다.
“눈이 멀었기에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네 생각은 틀렸다.”
창을 들어 올렸다.
“확실한 행동. 의심을 받더라도 계속해서 움직인다면? 그 의심도 누그러질 것이다. 로키를 보라, 스스로 우트가르다-로키를 연기하며 몇십 년을 잠입하여 제 뜻을 밝혔다. 펜리르를 보라, 스스로 아스가르드를 지키는 일에 나서 제 뜻을 밝혔다. 그런데, 너는?”
회드르가 입을 다물었다.
“홀로 한탄만 하며 남들이 알아주길 바랐구나. 이렇게…….”
창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쭉- 내뻗었다.
“행동하라.”
창이 쏜살처럼 회드르를 노렸다.
확실한 행동, 그것처럼 진심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사랑한다고 말만 하기보다, 주변의 인정을 받고 제 모든 것을 맡기는 자가 더 믿음직하기 마련이다.
말만 번드르르한 작자에게 속아 넘어갈 수야 있지만…….
“말로는 모든 것을 담아 낼 수 없다!”
철퍽!
확고한 의지로 회드르를 찔렀다.
“…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푹- 이 아니라 철퍽? 눈살을 찌푸렸다.
회드르는 내 창에 찔린 채 킬킬 웃었다.
“그래? 그렇다면, 너 역시 행동으로 보여라.”
회드르의 몸에서 어둠이 흘러나왔다.
창을 뽑아 내려 했지만, 뽑히질 않았다.
“네가 진정으로 어둠에 맞서는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콰과과과!
어둠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크윽!”
당황해 신성으로 몸을 감쌌으나, 이미 나는 어둠 속에 삼켜진 채였다.
끈적하고 음울한 어둠.
“여긴……?”
나는 그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