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148화. 파괴 (1)
쾅쾅쾅!
거상의 주먹은 운석 같았다. 그 주먹이 떨어질 때마다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렸다.
내 머리를 쪼갤 듯 울려 퍼지는 소리에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아, 아아… 어째서……?
시그뉘가 멍하니 허공을 날아가는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갑자기 날개가 달린 거라면야, 기뻐할 수 있지만… 아니다.
그들은 거인의 주먹에 뭉개져서 살덩어리가 된 채 하늘을 날고 있었다.
후두둑!
-아…….
혈우(血雨)가 내린다.
피의 비 한가운데서 시그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판도라가 그녀를 이끌었다.
-시그니! 당장 피해야 해!
-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희생이야! 어쩔 수 없단 말이야!
판도라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도주 중에 추격자가 따라붙는 건 어쩔 수 없는 희생이 맞다. 하지만 저 괴물 같은 것이 달라붙는 게 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
-어째서 이런 일이…….
시그뉘가 아득- 이를 악물었다.
거기까지 봤을 때, 지끈거리는 두통이 나를 덮쳤다.
“큭!”
몸이 휘청거렸다.
갑자기 연결이 끊어지다니.
“…메르키.”
“뭐지?”
“잠깐…….”
잠깐 다녀오겠다고 하려는 찰나, 메르키가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것 같닥. 내게도 연락이 들어왔으니까 말이닥.”
메르키가 스마트폰이라는 걸 휘휘 저으며 말했다.
저 기물로 연락을 받은 건가? 하계에 찌꺼기가 나타났다는 걸? 그렇다면…….
“알고 있다면…….”
“오디슨.”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메르키가 내 말을 잘랐고, 나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시그뉘와 판도라, 나를 믿는 무수한 전사들이 죽어 가고 있다.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메르키가 소리쳤다.
“모두가 너만을 의존하게 할 셈이냑!”
그 말에 우뚝 굳었다.
시그뉘료드는 분명 말했다. 나에게만 기대서는 안 된다고. 판도라 역시 고개를 끄덕였었지. 그녀들이 경계한 게 저것인가?
하지만 가만히 있을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인간에게는 인간의 삶이 있닥! 신이 기르는 애완동물이 아니닥!”
메르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꺼내 든 희고 긴 종이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훈련장을 가득 채웠다. 주술사들이 들이켜는 연기 비슷한 것이다. 그것처럼 정신을 나가게 하는 물건은 아니지만.
담배를 입에 문 메르키가 날 노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갈 테면 가라.”
움찔, 내 몸이 떨렸다.
메르키가 덧붙였다.
“하지만 찢어진 깃발을 다시 들 수 없다는 걸 명심해랏!”
…이번에 박차고 나간다면, 다시는 메르키에게 신성 훈련을 받을 수 없다는 소리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메르키가 푸-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선택해라, 오디슨! 당장 닥친 작은 파도를 뚫기 위해 힘을 다 쓸 텐가? 아니면 미래에 닥쳐올 해일을 대비할 텐가!”
까아악!
불길한 까마귀 울음.
나는…….
“…가는 것이냑?”
어딘가 실망한 듯한 메르키의 목소리.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나는 가지 않겠소.”
“…정말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이 들었다. 꾸욱- 조여드는 심장이 아팠다.
그렇기에 필요한 게 있다.
담배를 문 메르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깐, 그것 좀 빌려주시오. 안 그러면 진정이 안 될 것 같군.”
메르키는 알겠노라 대꾸했다.
* * *
수도 공략은 성공적이었다.
신제국이라 자칭하던 놈들의 최후 방어선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최후를 건 성벽은 엉성하게 지어져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았고, 그들을 지켜야 할 병사들은 어둠을 틈타 달아났다.
“제국은 개뿔!”
“죽여! 그분을 위하여!”
전사들은 피를 뒤집어쓴 채 고함을 내질렀다. 그에 반해 남은 신제국군은 겁을 먹고 덜덜 떨 뿐이었다.
승부의 저울추는 불공평하게 시작되었다. 그 위에 신제국군이 더 올릴 것은 없었다.
압도적인 승리.
신제국군의 수뇌라 할 수 있는 4황자와 군단장이 사로잡혔다.
“놔, 놔라! 이 야만스러운 놈들!”
“크으으! 내, 내가 이런 수치를 겪게 되다니!”
4황자와 군단장은 마구 두들겨 맞아 엉망이 된 꼴로 시그니료드 앞에 바쳐졌다. 시그니료드는 패배자의 몰골을 보며 느꼈다.
‘승리.’
달콤하기 그지없는 것이여.
시그니료드는 씰룩이는 입가를 숨기지 않고, 그들에게 물었다.
“제국도 이제는 끝이다.”
4황자가 버럭 소리쳤다.
“아니다, 이 마녀야! 제국은 죽지 않는다!”
“하하하! 벌써 죽어 버린 시체를 껴안고 소리치는 꼴이 가관이구나!”
“크윽! 제국은… 죽지 않는다! 올림포스의 신들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올림포스의 신?
시그니료드가 피식 웃었다.
“네 잘난 신들은 어디에 있지? 이 성전의 승리는 오롯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그분, 전사들의 귀감이 되는 자, 오딘의 늑대께서 누리실 기쁨이다! 너희들의 알량한 신들이 낄 여지는 없다!”
“신성모독이다!”
하- 시그니료드가 웃음을 흘렸다.
신성모독? 없는 신을 모시는 멍청이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시그니료드는 따박따박 그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이 그토록 숭배하는 마르스가 너희들에게 승리를 안겨 줬는가?”
“그, 그렇다!”
“그렇다면 어째서 네가 그 꼴로 여기에 있는 거지? 우리 부족을 침공했을 때, 그분께서는 몸소 강림하시어 너희 군세를 박살 내셨다. 너희들이 사악한 용을 데리고 왔을 때, 그분께서는 그 용의 불길을 견디시고 목을 잘랐다. 너희의 신이 승리한 적이 어딨단 말인가?”
“그, 그건……!”
“기껏해야 옛 제국의 수도를 직접 멸망시킨 작자 아닌가? 그래도 너희들은 그 괴물을 믿느냐?”
4황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신앙이라는 전사가 내미는 사실이라는 창은 너무나 위력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공포가 있었다.
“아, 으…….”
논리 없이 신성모독이라고 버럭 소리치기엔 목숨이 아까웠다.
4황자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제 살길을 찾았다.
“…나, 나도 속은 것이오!”
어이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그니료드가 그를 비웃고, 판도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변에 있던 전사들은 대놓고 껄껄 웃었다.
“속았다니? 크하하하!”
“그래, 속았지! 저깟 놈을 믿고 싸운 것들이 불쌍할 정도다!”
4황자는 치욕을 감수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시그니료드는 그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쯧! 너희의 신도 불쌍하구나!”
“아, 아니오… 그저, 난 소, 속았을 뿐……!”
“여봐라! 저놈을 매달아라!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꼴을 이 땅에 있는 모든 이가 볼 수 있게 하라!”
4황자가 겁에 질렸다. 그를 끌고 가려는 전사들에게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놔, 놔라! 놓으란 말이다!”
“어디 앙탈이야? 개 같은 놈!”
퍽! 주먹질에 4황자가 꺽꺽 숨을 들이켰다.
질질 끌려가는 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성의 꼭대기에 마련된 밧줄을 보는 순간, 오줌을 지렸다.
“아, 아아…….”
“형제는 형제구만? 3황잔가 하는 놈도 오줌싸개더니… 쯧쯧.”
“아으, 아아……! 마, 마르스시여! 비너스시여! 저를, 저를 구하소서!”
“속았다며?”
전사가 이죽거렸지만, 4황자는 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중얼중얼, 신을 찾을 뿐. 하지만 밧줄이 제 목을 옭아맸을 때, 4황자는 마구 몸서리쳤다. 의미 없는 저항일 뿐이었다.
“놔, 놔라! 마르스께서 너희를 벌하시리라!”
“흥! 그깟 마르스, 그분께 얻어터진 놈이 아니더냐?”
“아, 아아…….”
밧줄이 목에 걸렸고, 4황자의 몸이 점점 난간으로 밀쳐졌다.
이곳에서 떨어지는 순간, 목이 매달리리라.
4황자는 절규했다.
“마르스시여! 비너스시여! 유피테르시여어어어!”
그 처절한 절규에도 신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아레스는 신계 연맹의 처벌을 받는 중이었고, 비너스는 사랑의 묘약으로 인해 자신이 한 짓을 돌이키며 침실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제우스? 신왕, 제우스가 다 죽어 가는 이를 위해서 번개를 떨어트릴 이유는 없다. 제우스가 아끼는 것은 하늘, 그리고 왕이었다.
하지만 4황자는 하늘의 뜻을 저버리고 형제들과 골육상잔을 펼쳤으며, 왕이라 할 수도 없는 자였다.
올림포스는 침묵했다.
“아, 안 돼…….”
이제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4황자는 신들이 자신을 버렸다고 믿기보다는, 애초부터 신이 없다고 믿기 시작했다. 잘못된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그렇게 믿어야 마음이 덜 아팠다.
“개 같은 자식들! 네깟 놈들이 신이었더냐! 신은 없다! 신은 없어!”
피를 토하며 소리쳤지만, 오디슨을 믿는 이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오디슨이 몇 번이나 강림했던가? 그런 이가 없다는 게 말이나 되나?
4황자는 결국 난간에서 밀쳐졌다.
“아, 아아아! 저주할 테다! 저주할 테다! 신들이여! 신의 탈을 쓴 괴물이여! 어어억!”
컥컥- 4황자가 발버둥 쳤다.
신제국 최후의 도시는 고요했다. 믿고 따르던 4황자의 비참한 꼴에 시민들은 외면했다. 전사들 역시 미친놈이라며 혀를 찼다.
오직 한 사람.
거적때기를 푹 눌러쓴 한 사내만이 저벅저벅 걸어, 4황자가 바로 보이는 광장에 나섰다.
전사들은 흠칫했지만, 이 상황에서 저항은 멍청한 짓이다. 저항할 리가 없었다. 무기 하나 들지 않은 저항군이라는 건, 그들의 상상 밖에 있는 존재였으니까.
거적때기를 눌러쓴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여보시오, 4황자. 신은 없고, 신의 탈을 쓴 괴물만이 있다면…….”
“케흑, 켁켁켁!”
“괴물을 믿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소?”
4황자는 죽음의 문턱에 걸쳐진 상태, 대꾸는 없었다. 그저 켁켁거리는 발버둥이 전부였다.
사내는 그 발버둥에 히죽 웃었다.
전사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어이, 괜한 소리 하지 말고 꺼져!”
“신성모독을 하지 마라.”
전사들이 사내를 노려볼 때, 사내가 히죽 웃었다.
“신성모독이라니, 거참……. 야박한 분들이군. 나는 그저…….”
사내가 거적을 벗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돌덩어리가 있었다. 마치 웃는 사람의 얼굴 같은 돌덩이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시대를 보여 주려는 것뿐이오.”
사내가 덧붙였다.
신이 없는 시대 말이오.
* * *
과정을 돌이켜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시그니료드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등장한 콜로소스가 모든 것을 망쳤다. 신제국의 마지막 도시는…….
-신을 믿는 자들에게 죽음을!
쾅쾅쾅!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 와중에 최대한의 병력을 이끌고 도주를 명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절반이 넘는 전사가 저 괴물의 손에 죽었다.
인간은 괴물을 이길 수 없다. 괴물을 잡을 수 있는 건 영웅뿐.
하지만…….
-도망칠 수 있다 생각하느냐!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
시그니료드는 영웅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왕이다.
“…할 수 있어.”
“시그니? 잠깐, 시그니!”
판도라가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시그니료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오디슨이 선물한 방패, 앙킬레. 상대의 공격을 반사하는 그 방패가 있다면, 저 괴물의 공격도 튕겨 낼 수 있지 않을까?
시그니료드는 왕관의 무게를 짊어졌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목숨까지도 어깨에 올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시그니!”
“언니.”
“시그니, 마음은 알겠지만… 그런다고…….”
시그니료드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야 해요.”
“…시그니.”
시그니료드가 눈을 감고 후우-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정리했다. 다시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망설임은 없다. 그 자리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자애와 용기.
판도라는 덜컥 굳었다.
‘아…….’
말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시그니료드는 빙그레 웃음 지어 보이고, 방패를 치켜들었다.
“내가 시간을 끌겠다! 가라, 모두 가!”
“하, 하지만 시그니료드 님! 저 괴물은…….”
“어명이다, 어명! 당장 꺼져!”
시그니료드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전사들은 무력감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게다가 시그니료드는 전사들처럼 강인하지도 못하다. 그런 그녀가 나선다는데, 전사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들의 눈가에 무력감이 듬뿍 담긴 눈물이 글썽였다.
“내 희생을 쓰레기로 만들 셈이더냐! 당장 꺼지라 하지 않느냐!”
평소 시그니료드가 쓰지 않는 거친 말이 터져 나왔다.
전사들은 고개를 툭 떨구고, 그녀의 마지막 명령을 이행했다.
판도라를 이끌고 서둘러 달린 것이다.
시그니료드와 그녀의 백성들이 엇갈렸다.
-허! 작은 여자 뒤에 숨는 것이냐? 한심한 것들!
“나는 여왕이다! 내가 작다고? 덩치의 크기로 왕을 뽑는 게 아니다. 왕은 가장 넓은 가슴을 지닌 자가 하는 것이다!”
시그니료드가 버럭 소리쳤다.
그에 콜로소스가 껄껄 웃었지만, 시그니료드는 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흘렀고,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외쳤다.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놈아! 네깟 놈이 왕관의 무게에 대해 알 거라 생각지 않았다! 무식하게 힘을 쓸 줄밖에 모르는 놈!”
-뭐라?
“네 역겨운 꼴을 봐라, 괴물! 신 대신 네깟 놈을 믿으라고? 웃기고 있군!”
-조막만 한 것이 입이 사납구나!
콜로소스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 앞에서 시그니료드는 이를 악물었다.
-죽어라, 신의 암캐야!
“내, 내가 죽어도, 너는 승리하지 못한다! 이기지 못한다! 우리 오빠가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약간 그 나이 때에 맞는 말투가 튀어나왔지만, 뭐 어떤가?
시그니료드는 피식 웃었다.
‘…오빠.’
오디슨과 연결되어 있는 시그니료드는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오디슨은 오지 않는다.
‘…내가 죽으면 오빠가 있는 발할라로 갈 수 있을까?’
잠깐, 오디슨과 함께 사는 광경을 떠올렸다.
언제나 든든하던 외사촌 오빠는 발할라에서 어떻게 지낼까? 신이니까 발키리들의 시중을 받으며 방탕하게 지내는 게 아닐까?
시그니료드는 그 광경을 떠올리고 키득거렸다.
“너의 패배다, 괴물!”
그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은 시그니료드의 죽음이리라.
시그니료드는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부우우우웅!
주먹이 운석처럼 떨어진다.
앙킬레를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모든 것을 튕겨 내는 방패라 한들, 저 묵직한 공격을 튕겨 낼 수 있을까?
시그니료드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먼지가 되어라!
주먹이 떨어졌다.
시그니료드는 눈을 꾹 감았고, 누군가가 그녀를 도와준다는 걸 느꼈다.
오디슨? 아니다.
-아아아악!
콜로소스의 비명이 울렸다.
시그니료드의 몸이 덜컥 흔들렸지만, 생각처럼 큰 충격은 없었다. 역시 앙킬레의 덕인가? 시그니료드가 무심코 눈을 떴을 때, 자신의 곁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여자가 있었다.
“어……?”
시그니료드가 눈을 깜빡였다.
그 여자가 피식 웃었다.
“네가 오디슨 외사촌 동생이라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뉘신지……?”
“어머, 나 잊은 거야? 네 방패술, 누가 가르쳐 줬지?”
“아슬라 아줌마……?”
시그니료드가 눈을 끔뻑였다.
오디슨의 옆집에 살던 아슬라 아줌마. 오디슨의 어머니이자 시그니료드의 이모가 돌아가신 뒤, 오디슨을 돌봐 준 사람이다. 지금 곁에 있는 여자에게서 언뜻 그 모습이 비쳤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인다고? 엄마랑 헷갈릴 정도로……?”
“어! 라, 라드게리타 언니?”
“그래, 그래. 언니란다.”
시그니료드가 눈을 끔뻑였다.
물푸레나무 부족에 갔을 때, 아슬라 아줌마에게 간단한 방패술을 배웠다. 그리고 그 곁에는 오디슨의 소꿉친구인 라드게리타가 함께했다.
시그니료드가 알기로 그녀는…….
“…죽었다고 들었는데…….”
“오디슨이 발할라로 불러 줬지.”
“아! 오빠는… 지금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피식, 라드게리타가 웃었다.
그리고 품에서 시그니료드가 알 수 없는 물건을 꺼냈다. 새까만 판석 같은 것이다.
“오디슨도 이제야 문명의 이기를 쓸 줄 알게 된 모양이야.”
주먹을 쥔 채 새끼손가락과 엄지를 펼쳐 흔드는 라드게리타.
시그니료드는 그 손짓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