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95화. 영웅은 공백 없다 (3)
“크아아아앙!”
트롤들은 사나웠다.
멍청하고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한다고 할지라도 천에 가까운 숫자. 일행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일행이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었다.
“지겨워 죽겠네, 정말!”
이라호드가 창을 휘둘렀다.
트롤이 깜짝 놀라 몽둥이를 들어 올린다. 하지만 이라호드의 창은 살아 있는 뱀처럼 휘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유연한 궤적이었다.
트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엇?”
푸욱!
이라호드의 창이 가슴을 가린 몽둥이를 피해 심장을 꿰뚫었다.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오는 세밀한 공격이었다. 단순히 궤적을 자유자재로 휠 수 있다는 것에 놀랄 일이 아니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상대의 방어를 파악하고, 그 빈틈을 노리는 기술.
발키리 중에서도 제대로 그걸 구사할 수 있는 이는 소수였다.
“후우.”
이라호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처리한 트롤이 이미 50마리를 넘겼다. 아무리 체력 좋은 이라호드라 해도 땀이 줄줄 흘렀다.
크레네가 그녀에게 수통을 내밀었다.
“축복을 내린 물이에요. 체력을 회복해 줄 거예요.”
“…으음, 고마워요.”
“뭘요. 저 지켜 준다고 앞에 나서서 싸우는 거잖아요.”
크레네가 배시시 웃자, 이라호드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라호드는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시원한 냉수가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느낌. 몸에 활력이 솟았다.
“어우, 시원하다! 잘 마셨어요.”
“부끄러워하면서도 인사는 다 하네요.”
“…흥, 안 부끄럽거든요? 그냥 그쪽이 다치면 오디슨이 걱정하니까…….”
이라호드가 투덜댔다.
크레네가 킥킥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오디슨에게로 향했다.
크레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까지 신경 쓸 거 같은 모습은 아닌데…….”
“…그거야 그렇지만, 은근히 정이 많으니까요.”
크레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모습만 봐서는 정이라곤 없을 것 같지만, 오디슨은 꽤 정이 많았다.
“그런 것치고는 참 신나 보이는데요.”
이라호드가 쓰게 웃었다.
오디슨은 그야말로 날뛰고 있었다.
“크하하하! 덤벼라, 멍청한 놈들아!”
창 한 자루를 들고 트롤들을 도륙 냈다. 창을 찌르고, 창을 휘둘렀다. 창 자루로 때리고, 발차기로 상대를 밀어냈다.
그때마다 트롤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 트롤 너무 아프다!”
“무섭다! 무섭다!”
“나, 나는 도망칠 거다!”
한 트롤의 외침에 다른 트롤들이 귀를 쫑긋했다.
도망? 달콤한 말이었다. 하지만 도망치던 트롤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그르릉- 낮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도오마앙? 트롤! 도망치지 않는다아아! 도망치지 마라! 싸워라! 싸워!”
“으어, 트롤 왕이다! 몽둥이가 너무 크다!”
트롤들은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맞서 싸우자니, 미쳐 날뛰는 오디슨이 겁났다. 그렇다고 도망치자니, 이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 빈틈을 놓칠 오디슨이 아니었다.
“흐아앗!”
오디슨이 기합을 내지르며 트롤들을 학살했다.
사이에 낀 트롤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어 나자빠졌다. 그리고 트롤 왕과 정면으로 마주친 오디슨.
이마의 땀을 닦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크흠…….”
트롤 왕은 팔짱을 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팔에 끼고 있는 몽둥이가 엄청나게 커다랗다. 다른 트롤들의 두 배는 될 법한 길이와 두께.
‘…제대로 싸워 볼 수 있겠군.’
벌레 떼가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느낌은 이제 없다.
멀쩡한 상태로 강자와 부딪히는 것. 그것이 오디슨의 취미다.
트롤 왕이 팔짱을 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한 전사.”
“그래, 네가 왕이라지? 한번 싸워 볼 텐가?”
트롤 왕이 천천히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주변의 트롤들이 그 광경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트롤 왕, 강하다.”
“트롤 왕, 용감하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디슨의 일행도 둘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크레네가 슬그머니 이라호드에게 물었다.
“…저, 안 도와줘요?”
이라호드가 피식 웃었다.
“도와줘요? 오디슨을요? 방해한다고 투덜댈걸요?”
“…음, 확실히.”
“그리고 오디슨 혼자서도 충분한 상대니까요.”
크레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싸운 토르손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라드게리타가 학을 뗐다.
“더럽게!”
토르손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라드게리타가 방패를 들고 함께 싸워 준 덕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친 건 어쩔 수 없다.
위생을 따지기보다는 체력을 모으는 게 중요하다.
‘대장이 트롤 왕을 이기고 나면, 트롤들이 날뛸 테니까.’
토르손이 칼을 닦았다.
그람 손잡이 쪽을 재가공한 칼이다. 그람이 워낙 좋은 무기였던지라, 그걸 녹여 만든 토르손의 검도 명품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롤의 두꺼운 피부를 가르고, 뭉클거리는 지방을 썰어 내고, 끈적한 피를 쏟게 한 탓에 상태가 좋지 못했다.
‘숫돌이 있으면 좋으련만.’
토르손이 그런 생각을 할 때, 트롤 왕이 괴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아앙!”
그 목소리가 갱도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오디슨이 흠칫 몸을 떨며, 자세를 잡았다. 트롤이 덤벼드는 순간, 창의 길이를 앞세워 공격할 셈이었다.
허나…….
“으음?”
“비켜라! 난 살아야 한다!”
부우우웅! 퍽!
트롤 왕이 오디슨의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며 달리는 트롤 왕. 제 앞을 가로막은 트롤들에게 몽둥이질을 해 댔다.
트롤들이 난리를 피웠다.
“끄악!”
“도망친다! 트롤 왕! 도망친다!”
“트롤! 도망친다! 산다! 안 도망친다! 죽는다!”
여전히 엄청난 숫자가 남았지만, 트롤들은 싸움을 포기했다.
크레네가 눈을 끔뻑였다.
“어, 음… 트롤들이 도망치는데요?”
“말했잖아요. 이상한 선택을 하는 놈들이라고. 어쨌거나 민원은 놈들을 쫓아내는 것까지니까… 이제 보고하러 가죠. 으응? 오디슨?”
이라호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트롤들이 도망치는 광경을 보고 나니, 오디슨이 없었다.
토르손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대장은 트롤 왕을 쫓아갔는데요?”
트롤들의 비명 사이로 오디슨의 고함이 들렸다.
“이 비겁한 놈! 그러고도 네놈이 왕이더냐! 싸워라! 왕관의 무게를 짊어지고 나와 싸워라아아아!”
갱도 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
이라호드가 이마를 짚었다.
“…대체 왜…….”
저런다고 트롤들을 박멸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새끼 트롤들이 갱도의 틈 같은 곳에 숨어 버렸다면, 어떻게 끄집어낼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헛고생이다.
분명, 이라호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디슨을 쫓아 트롤들이 도망친 곳으로 가기 전까지 말이다.
“…오디슨? 트롤들은요?”
이라호드의 질문에 오디슨이 흐음- 침음을 뱉었다.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구멍?”
오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게 깊어서 끝이 보이지도 않는 구멍이다. 트롤들은 모조리 여기로 뛰어내렸지.”
막무가내인 오디슨이라도, 차마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에 뛰어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고민하고 있었다.
“…뛰어내려도 되려나?”
오디슨의 말에 이라호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곧장 발키리 본부에 연락해야겠어요.”
“음? 어째서지? 발키리 본부에서 처리하지 못하기에 연맹 쪽으로 넘긴 민원 아니던가?”
이라호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처리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어요. 시간과 비용이 지나치게 들어갈 뿐이지. 그리고 이런 구멍은 반드시 보고해야 하는 사항이에요.”
“반드시?”
오디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라호드는 그의 이해를 돕고자 질문 하나를 던졌다.
“지하 왕국, 니다벨리르. 그 아래로 뚫고 내려가면 뭐가 있을 거 같아요?”
니다벨리르의 아래에 있는 것.
니플헤임. 그리고 그 니플헤임에는 찌꺼기들이 있다.
* * *
세스룸니르.
미의 여신, 프레이야의 궁전이다. 발할라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전사들이 싸움을 위해 기량을 갈고닦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의 가장 높은 방, 프레이야의 침실.
프레이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세스룸니르가 정상화되기까지는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
꽁꽁 얼었던 얼음은 금방 녹았지만, 놀이기구가 침수되었다. 그걸 수리하는 것도 일이지만, 일단 바닥에 흥건한 물을 닦아 내는 것도 일이었다. 게다가 얼룩덜룩해진 기구들을 새로 칠하기도 해야 했다.
전사들도 마찬가지다.
얼음 동상이 되었던 그들이다.
헬이 사정을 봐준 덕에 죽은 전사는 없었다. 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감기에 걸렸다.
까드득!
그리고 황금도 굉장히 깨졌다.
그때 쓴 황금을 생각하면 속에서 짜증이 치밀었다.
“무식한 년! 그 재수 없는 년 눈에서 눈물을 쏙 뺄 방법은…….”
프레이야의 목소리가 점점 줄었다.
말미에는 아주 작은 소리만이 남았다.
“역시 하나뿐인데. 후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프레이야가 생각하는 방법? 그녀의 욕망과 직접 닿아 있었다.
그날 밤, 그가 보인 눈빛과 그가 내뱉은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고, 제 정체를 밝히는 걸로 사랑받을 거라 믿었나?’
싸늘하기 그지없던 눈빛.
‘꺼져라, 프레이야! 네 음탕한 몸뚱이를 달래 줄 바보는 여기에 없다!’
그리고 단호하던 호통.
지금도 그 호통이 귓가에 웅웅거리는 느낌이었다.
“아으…….”
프레이야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몸을 꼬았다.
그렇게나 선명하게 자신을 거부한 남자는 오디슨이 처음이었다.
그의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흐응…….”
프레이야가 제 다리를 쓰다듬으며 콧소리를 냈다.
그때, 프레이야를 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프레이야 님!”
“어, 어? 뭐야… 있었어?”
“아까부터 계속 불렀습니다만…….”
고양이 집사의 말에, 프레이야는 귓가를 울리던 게 기억 속 호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집사의 부름이었다.
프레이야가 쓰게 웃으며 집사를 들어 올렸다.
“미안미안. 내가 잠깐 딴생각하느라고.”
“아으응… 쓰, 쓰다듬을 시간은 아닌데…….”
“뭐 어때.”
프레이야가 어깨를 으쓱이며 집사를 쓰다듬었다.
집사는 일을 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절로 눈을 감았다.
‘…아니, 내가 프레이야 님을 곁에서 모시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집사는 초인, 아니 초묘(-猫)적인 인내심으로 충언을 입에 담았다.
“무,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으십니까?”
“고민거리라… 그래.”
프레이야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 작은 움직임이 세상 모두의 심장을 두들겨 팰 만큼 매력적이었다.
프레이야가 도톰한 입술을 열어 불평을 토했다.
“파고들 틈이 없어.”
“네?”
입술을 살짝 깨문 프레이야가 한탄했다.
“오디슨 말이야, 오디슨. 파고들 틈이 정말 하나도 없어. 헬이 아니면, 발키리… 그도 아니면 님프가 같이 있단 말이지. 그 발키리와 님프가 아마 헬의 사주를 받은 녀석들인 거 같은데…….”
그녀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오디슨은 늘 바삐 움직였다. 잠깐 홀로 쉬거나, 아니면 혼자서 어딜 다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어야 파고들 여지가 있을 텐데.
프레이야는 가슴이 답답했다.
“어쩜 그리 파고들 여지가 없는지.”
그런 점이 싸늘하고 단호한 면모에 딱 어울린다.
느슨하게 살았더라면, 네가 독설할 처지냐고 말만 번지르르한 놈이라고 욕하고 치워 버렸겠지만…….
“냉철하고, 바쁜 남자. 나쁘지 않아.”
사실 좋다.
하지만 프레이야는 집사 앞에서 말을 조심했다.
집사는 프레이야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 그리 그가 일 때문에 바쁘다면… 차라리, 일을 빌미로 빈틈을 만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일을 빌미로?”
프레이야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고양이 집사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리 바쁘다 한들, 그의 본업은 투사. 모든 투사들이 끌릴 수밖에 없는 이벤트를 열어 버리는 겁니다. 프레이야 님께서도 에인헤랴르를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까?”
프레이야가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그녀의 세스룸니르에는 투사들이 잔뜩이었다. 발할라의 T100 수준으로 뛰어난 투사는 없지만… 적어도 발할라의 2군, N100에 해당하는 이들은 있었다.
프레이야의 눈이 테이블 위의 신문으로 향했다.
[오디슨, 200S를 건너뛰고 바로 N100으로 가나?]
[새로이 도입되는 승격 시험!]
프레이야가 침을 꼴깍 삼켰다.
‘…에인헤랴르 세력전.’
전통적인 대회다.
발할라와 세스룸니르로 나뉜 에인헤랴르들이 서로 실력을 겨루는 이벤트. 세스룸니르의 투기장 사업이 하락세가 되면서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언제든지 개최될 수 있는 대회였다.
“아! 집사, 너는 정말 대단해! 대단해!”
“끄으응, 그, 그만… 그만! 너, 너무 기분이 좋아서…….”
“정말 대단한 아이디어야! 에인헤랴르 세력전을 연다면 당연히 오디슨도 참가하겠지! 그러면? 대회 주최측인 내가 오디슨을 만날 빌미가 되는 거야!”
흐흐흐- 프레이야가 어울리지 않게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헬, 고 건방진 년에게서 오디슨을 빼앗아 주지!”
음흉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그 계획의 이름은 ‘그를 뺏겠습니다’였다.
머릿속에서 계획의 이름까지 거창하게 달아 놓은 프레이야는 집사를 열렬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집사는…….
‘아, 안 돼! 더, 더는 참을 수가…….’
초월적인 인내심으로 참을 수 없는 손길에 굴복하고 말았다.
“냐아으앙!”
매일같이 스스로 털을 빗고, 냥냥거리는 어조를 교정했다. 좋아하는 청어도 비린내 때문에 멀리한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엘리트 집사를 꿈꾸던 고양이는 한 마리 짐승이 되어 몸서리쳤다.
* * *
머리가 복잡했다.
절대 삐친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랬다.
크레네가 툭, 팔을 쳤다.
“왜?”
“오디슨, 혹시 삐쳤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삐치기나 하는 쪼잔한 놈이 아니다. 토르께서 그 구멍에 대한 건 자신에게 맡기라 하시고, 날 조사대에서 빼 버린 것 때문에 삐칠 리가 없지.”
절대로 아니다.
그 구멍을 발견한 덕에 니다벨리르의 왕에게 감사 인사를 받았다.
‘과연! 잘만 하면, 트롤을 아예 박멸할 수도 있겠군요! 어쩐지, 트롤이 자주 서식하는 곳이 아닌데, 몇 년에 한 번씩은 꼭 이런 일이 생긴다 했습니다!’
니다벨리르 왕의 호의로 이런 좋은 여관(호텔이라는 이름이다)에서 묵게 되었고, 이 도박장(카지노라는 이름이다) 구경도 왔으니 이득이다. 이득.
이라호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삐친 거 같은데요?”
“난 정말로 안 삐쳤다!”
버럭 소리를 지르자, 도박장 내의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괜스레 멋쩍어져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라드게리타가 킥킥 웃었다.
“오디슨은 삐쳤다고 하면 삐쳤는데도 절대로 안 삐쳤다고 해요.”
“맞아, 대장은 은근히 잘 삐치지.”
토르손까지!
나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일행에게 서운했다.
크레네가 슬그머니 내 팔을 쓰다듬으며 팔짱을 꼈다.
“기분 풀어요. 그냥 저기 게임이나 해 봐요. 와! 잭팟이 터지면 무려 7억 7천 7백 크로나래요!”
7억 7천 7백 크로나?
상당한 금액에 흥미가 생겼다. 뭔가가 핑핑 돌아가는 와중, 단추를 누르면 하나씩 멈춘다. 그렇게 해서 똑같은 그림을 맞추는 건가?
마법 물품 앞에 앉아 있던 사내가 흠칫 몸을 떨고 외쳤다.
“오! 됐다!”
[축하합니다!]
촤르르륵!
체리 셋을 맞춘 사내에게 상자가 축하하며 진짜 금화와 교환할 수 있는 가짜 금화를 쏟아 냈다.
말하는 상자라니. 익숙해진 마법 물품이지만, 여전히 신기한 광경이다.
토르손이 내게 말을 걸었다.
“대장, 대장은 운이 좋은 편이니까 한번 해 보는 건 어때?”
한번 해 보라?
그 말에 이라호드도 내게 권했다.
“맞아요, 한번 해 봐요.”
“오디슨, 해 봐!”
라드게리타까지?
크흠, 그렇게 말한다면야 뭐……. 슬쩍 빈 의자에 앉았다.
뒤에서 여자 셋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봤죠? 오디슨은 이렇게…….”
“오… 대단하네요. 소꿉친구라 그런가?”
“헤헤헤…….”
뭘 어쨌단 거지?
어깨를 으쓱이고 가짜 금화를 넣는 곳에 가짜 금화 하나를 넣었다.
니다벨리르 왕에게서 두둑하게 받은 가짜 금화였다. 이라호드는 니다벨리르 왕이 쪼잔하다며 투덜댔다. 하지만 난 여관을 제공하고 도박장에서 놀 가짜 금화를 쥐여 줬다는 것에 만족했다.
본래 민원 해결에 대한 대가는 없는 게 정상 아니던가?
이걸로 거액의 금화를 딸 수도 있다.
“…흠.”
파르르르륵!
그림이 빠르게 바뀐다.
하지만 메르키가 말했고, 나도 이제는 아는 게 있다.
“…눈이 좋다.”
평범하게 다들 보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만일 내가 평범하다면, 이런 거금을 건 도박이 생겨날 수가 없다.
빠르게 흘러가는 그림이다. 하지만 내게는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
삑! 삑삑! 단추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