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화. 영웅은 공백 없다 (2)
치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드베르그의 지하 왕국, 니다벨리르(Niðavellir). 땅을 파고 그곳에 도시를 세웠다는 이야기에 감탄했었다.
인제 와서는 이런 곳에 온다는 걸로 하나하나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발할라에 익숙해진 탓이겠지.
하지만 놀랐다.
“으음, 생각과는 많이 다른데?”
땅굴 속의 도시라고 하면 횃불이 잔뜩 걸린, 답답하고 어두컴컴하면서 퀴퀴한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황금과 불꽃의 도시, 니다벨리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드베르그 장인들이 만든 침대에서 피로를 확 푸시고, 장인들의 솜씨를 살펴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니면 단번에 부자가 되는 건 어떠세요? 니다벨리르 카지노는 ‘이쪽’입니다!
총천연색 조명들이 도시를 수놓고 있었다. 발할라 번화가를 크게 넓혀 두면 이런 모습일까?
눈을 찌르는 빛이 따갑다. 눈꺼풀 위로 눈을 꾹꾹 눌렀다.
“…원래 이런 곳인가?”
“뭐, 세스룸니르가 가족 단위 여행객이 자주 찾는 곳이라면, 니다벨리르는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오는 곳이긴 하죠.”
이라호드가 대꾸했다.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자, 무슨 공연 포스터 같은 게 보였다. 실용성 없는 갑옷을 걸친 헐벗은 여자아이 그림이 있었다.
눈이 너무 커서 무서운 그림이다.
[프리키리 콜라보레이션! 프리키리 한정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무슨 소린지 모를 글귀를 무시하고 슬쩍 토르손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어색해하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니다벨리르! TV에서 보고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는데!”
오히려 희희낙락 기뻐하는 모습이다.
어수룩하던 예전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발할라에 숱하게 있는 여느 젊은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심장을 찌르라는 건지, 심장 어림에 떡하니 늑대 자수가 놓여 있다.
토르손이 내 시선을 눈치채고 히죽 웃었다.
“이번에 니다벨리르로 간대서 월급을 털어서 샀지. 어때?”
“…으음, 적에게 심장 위치를 대놓고 알려 주는 건 위험한 거 아닌가?”
“대장은 정말 변한 게 없구나? 이거 로키스 패밀리 명품 라인이라고. 펜리!”
펜리? 펜리르가 관여한 건가?
선글라스를 끼고 경박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 곁으로 시선을 옮기자, 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크레네가 보였다.
“오디슨, 저 이렇게 화려한 도시는 처음이에요.”
“그런가? 올림포스는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군.”
“올림포스는 화려하긴 한데… 이쪽이랑은 좀 느낌이 다르죠. 그쪽은 정통성이나 역사를 중시해서 그냥 건물색만 알록달록한 정도? 통일감은 확실히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네온사인을 잔뜩 달고 번쩍번쩍하진 않죠.”
상상이 안 된다.
어깨를 으쓱였다. 가장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라드게리타.”
라드게리타였다.
그녀는 막 상경한 촌놈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목소리에 라드게리타가 깜짝 놀라며 허둥댔다.
“으, 응?”
“괜찮나? 이렇게 시끄러운 곳은 안 좋아하지 않았나.”
주변이 아주 시끌벅적하다.
내 말에 토르손이 응?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라드게리타가 움찔 몸을 떨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라드게리타의 손목을 잡았다.
“축젯날만 되면 시끄러운 게 싫다고 집에 가자고 했지.”
“…어, 응… 그게…….”
라드게리타가 볼을 붉히며 몸을 꼬았다.
옛날 기억에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이라호드와 크레네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민원 처리하러 온 거잖아요? 얼른 가요!”
“…네, 오디슨. 어서 가죠.”
힐끔힐끔 라드게리타를 살피는 게, 그래도 신경 쓰는 모양이다. 고마운 일이다.
나는 씩 웃었다.
“아슬라 아줌마가 말하기를 스캴드메르(skjaldmær, 방패의 처녀) 기술을 꽤 익혔다니까… 짐이 될까 걱정하진 않아도 괜찮다.”
스캴드메르는 방패술을 중점적으로 익힌 여전사다.
다른 부족은 정식 싸움에도 여자들이 끼어드는 모양이지만, 우리 부족은 스캴드메르에게 부족 방어를 맡기고 원정을 다녔다.
개중 아슬라 아줌마는 노련한 스캴드메르였다. 라드게리타는 한창 아슬라 아줌마에게서 그 기술들을 배우는 중이었고.
그러니 짐이 되지는 않으리라.
“잘 부탁한다, 라드게리타.”
“맡겨 둬!”
라드게리타가 폴짝 뛰어 내 등에 매달렸다.
얘도 참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껄껄 웃으며 화려한 거리를 걸었다.
* * *
철광산은 니다벨리르 중심부에 있었다. 니다벨리르 자체가 온갖 광산들이 모인 곳에 세워진 곳이다. 그 덕에 위에서 보자면 치즈처럼 구멍이 뻥뻥 뚫린 모습을 하고 있다.
그 구멍마다 광산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금광, 은광, 철광, 구리광 등등. 개중에서도 니다벨리르 중앙의 철광산은 꽤 역사 깊은 곳이다.
분명, 오디슨은 그런 설명을 들었다.
“…폐광된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오디슨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널브러진 곡괭이들, 그리고 인적 없는 철광산. 폐광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침음을 삼켰다.
‘대체 얼마나 된 거지?’
그가 눈살을 구기자, 이라호드가 말한다.
“겨우 한 달 만에 이 꼴이 되다니.”
“…한 달인가.”
드베르그들은 힘이 좋다. 그런데 트롤에게 쫓겨 광산을 빼앗겼다.
오디슨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많거나, 아니면 세거나.”
오디슨은 트롤이라는 놈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해 준 이야기에서 대충이나마 그 모습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이라호드가 설명했다.
“트롤들은 그리 세진 않아요. 드베르그 전사라면 두엇 정도는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걸요?”
“그런가?”
“네, 다만… 기괴한 짓을 많이 하는 데다가 무리를 이루기 시작하면 굉장히 커지는 경향이 있어요.”
굉장히 커진다?
어릴 적 오디슨이 들은 많은 트롤 이야기에는 트롤이 하나 아니면 둘만 나왔다. 많아 봐야 한 가족 정도.
오디슨이 그에 관해 물었다.
이라호드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트롤들 행동이 어땠는지 기억해요?”
“음… 사람을 납치하거나, 아니면 사람을 잡아먹거나 한다고 들었는데.”
“네, 그래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거예요. 아니, 그들이 무리를 못 견딘 거죠.”
이상한 설명에 크레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식인괴물 아니었어요?”
크레네도 트롤이라는 놈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
이라호드를 제외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사나운 식인괴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장을 단단히 갖췄고 말이다.
“맞아요, 식인괴물. 그런데 아마… 보면 알 거예요. 그렇게 무리에서 빠져나온 트롤들이 왜 못 견뎠다고 했는지. 그리고 그 녀석들이 왜 트롤 사이에서 ‘비정상적’인지.”
터벅터벅, 이라호드의 목소리가 갱도에 울렸다.
토르손이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저기… 죄송한데, 트롤들이 엄청 많다면, 이렇게 대놓고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그야 대장이 세단 것도 알고, 발키리님이 대단한 것도 알지만…….”
오디슨이 흠-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라호드는 쓰게 웃었다.
“상대가 트롤이니까요. 아마 규모가 꽤 있는 무리라면, 우리가 온 것도 이미 알아챘을걸요?”
“…알아챘다고? 그렇다면… 기습을 노리는 건가!”
오디슨이 흠칫 놀라며 창을 고쳐 쥐었다.
모두가 그랬다. 이라호드만을 빼고 말이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트롤은 기습을 할 수가 없어요.”
“…뭐?”
이라호드가 삿대질했다.
“저거 봐요.”
삐죽 튀어나온 엉덩이. 그 피부 질감은 꼭 단단한 돌덩어리 같았지만, 돌덩어리일 수가 없었다. 누런 살빛이 선명했으니 말이다.
갱도에서 어떻게 색을 구분하는가? 그야 뻔했다.
저쪽에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오디슨이 눈살을 구겼다.
“…트롤들은 바보인가?”
“어… 네, 그거랑 비슷해요. 충동을 참질 못하는 놈들이거든요.”
그제야 모두가 이라호드가 이제까지 한 말을 이해했다.
전래동화 속의 트롤들은 무서웠다. 사람을 습격하고 사람을 납치하며, 식인을 일삼았다. 그래서 말 안 듣는 아이에게는 트롤을 들먹였다.
“…어릴 적에는 말 안 들으면 트롤이 숨어 있는 동굴에 가둔대서 벌벌 떨었는데… 트롤이 저런 바보라니.”
오디슨도 착잡한 기분이었다.
그에게도 남자 여자가 손잡고 뽀뽀하면 황새가 아기를 물어다 준다 여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하지(夏至)에 여름 축제가 열리지.’
오디슨은 그 충격적인 진실을 떠올렸다.
하지에는 달이 머리 꼭대기에 뜰 때쯤이 되어서야 해가 진다. 그리고 겨우 몇 시간만 있으면 다시 뜬다.
그러니 모두가 그 짧은 밤을 축제로 지새운다.
밤이 되었을 때, 청춘 남녀는 서로 짝을 이뤄 숲으로 들어간다. 고사리 꽃을 찾기 위함이다.
참고로, 고사리는 꽃이 피지 않는다.
이후 9개월쯤 지나면, 봄이 온다.
황새는 봄이 되면 남쪽에서 날아 올라왔다.
아이를 황새가 물어다 주는 이유였다.
“…트롤이 저런 바보라니이이…….”
토르손이 다시 중얼거렸다.
어지간히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그 목소리가 약간 컸고, 삐죽 튀어나온 엉덩이가 씰룩인다.
엉덩이 위로 상체가 불쑥 튀어나온다. 끔찍하게 못생긴 괴물이다.
트롤이 소리쳤다.
“아니다아! 바보 아니다!”
“트롤! 한판 해 볼까!”
오디슨이 한숨을 푹 쉬었다.
“바보군.”
그 중얼거림에 트롤들이 광분했다.
“아니다 했다! 바보!”
“크아아아앙! 너 죽인다!”
트롤들이 덤벼들었고, 오디슨이 씩 웃었다.
겨우 다섯 마리 정도인가? 다른 이들이 나설 여지도 없다.
오디슨이 창으로 한 마리를 찔렀다.
푸욱!
“어, 어어……? 아, 아프다!”
“내 친구! 괴롭히지 마! 크아아앙!”
엄니가 툭 튀어나온 트롤이 소리쳤다.
엄니 트롤이 몽둥이를 번쩍 들었다.
“그냥 막무가내인가?”
“막무가새 아니다! 트롤 새 아니다!”
오디슨은 트롤을 상대할 때 규칙을 하나 깨달았다.
‘…말을 섞으니 굉장히 짜증이 나는군.’
오디슨은 짜증을 가득 담아 녀석을 밀어 찼다.
엄니 트롤이 뒷걸음질 치고, 몽둥이가 허공을 갈랐다.
“오잉?”
녀석이 깜짝 놀랐고, 오디슨은 창을 뽑았다.
그리고 다시 찌른다.
“같이 싸운다!”
트롤 한 마리가 더 끼어들었다.
머리카락이 마치 늘어진 덩굴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지독한 악취가 나는 녀석.
덩굴 트롤이 오디슨을 노리고 몽둥이를 휘두를 때…….
“살려 줘라!”
“띠용?”
엄니 트롤이 덩굴 트롤을 확 잡아당겼다.
겹쳐진 두 녀석의 가슴에 창이 박혔다.
푸우욱!
오디슨은 어이가 없었다.
“…친구를 괴롭히지 말라더니?”
“나, 트롤 친구 아니다… 이 트롤 모른다…….”
덩굴 트롤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일행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이면 금방 끝나겠는데요?”
라드게리타가 움츠리고 있던 몸을 풀었다. 방패를 내리고 툭 내던진 말에 이라호드가 고개를 저었다.
“말했죠. 녀석들은 그리 안 세다고. 긴장해요, 지금부터가 트롤과의 싸움이니까.”
“오디슨 혼자서도 다 해치울 수 있을 거 같은데…….”
크레네가 떨떠름하게 말할 때, 우아아아- 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오디슨이 꿀꺽 침을 삼켰다. 뻥 뚫린 갱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트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침입자다! 침입자!”
“맛있겠다!”
오디슨 혼자서도 다 해치울 수 있다고?
그 소리를 했던 크레네가 침을 꼴깍 삼켰다.
“저건…….”
이라호드가 창을 들어 올렸다.
“모두 준비해요!”
갱도 저편에서 셀 수 없을 만치 많은 트롤들이 고함과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마치 물소 떼가 이동하는 듯한 발소리가 났다.
토르손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젠장. 그냥 뛰어만 와도 깔려 죽겠네.”
“발키리 본부에서 트롤 관련 민원을 연맹 쪽으로 떠넘긴 이유를 알겠죠?”
이라호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모두가 공감했다. 저 정도 숫자의 트롤이라니!
보통 손이 가는 일이 아니다.
그게 바로 트롤의 무서운 점이었다.
공권력이 아무리 신고를 받고 박멸하려고 해도, 트롤들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번식해 낸다. 결국, 행정 비용의 문제로 트롤을 박멸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발키리 본부는 트롤을 상대하는 방법을 널리 퍼트리려 애썼다.
“트롤을 박멸하는 원칙은 하나예요.”
“그게 뭔가요?”
창백하게 질린 크레네가 물었다.
바글바글한 트롤들을 보자니, 평화주의자에 가까운 크레네도 소름이 돋았다.
이라호드가 말했다.
“트먹금.”
트롤 먹이 금지.
지금 이 광산을 폐쇄한 것도 그런 원칙을 따른 바다. 하지만 지독한 적응력을 가진 트롤들은, 때때로 돌을 파먹고 살기도 한다.
그에 관한 끔찍한 일화도 있다.
-트롤공듀: 아! 이 동굴 먹을 거 없다! 먹이가 부족하다!
-트롤할배: 너 바보다! 망한 동굴이 다 그렇다!
-트롤공듀: 어! 나 바보 아니다! 그런데 너 맛있겠다!
트롤이 동족포식을 거듭하며 개체를 유지한 이야기다.
트롤은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