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88화 (88/208)

# 88

88화. 영웅은 들이받는다 (2)

“폐, 폐하께서……!”

“뭐, 뭣들 하느냐아아! 당장 저 샹들리에를 치워라!”

깨진 샹들리에.

황제가 주문한 대로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기에 그 무게도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유리로 된 물건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이럴 수가.’

재상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황제와 황태자 위로 떨어질 게 무어란 말인가? 제국의 현재와 미래가 한순간에 짓뭉개졌다.

모두가 정신이 없었다.

충격과 공포가 연회장을 뒤덮었다. 손가락에 유리 조각이 박히는 걸 신경 쓰지 않고, 마구 헤집었다.

그리고…….

“으, 으으…….”

“폐하? 폐하! 폐하께서 살아 계신다! 당장 의사들을 불러라! 신관들을 불러!”

나지막한 신음성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황태자는……? 내 아들은……?”

황제가 횡설수설했다.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황제에게 황태자에 대해 알려 주는 건 좋지 못하다 여겼다.

황제는 비몽사몽인 상태에서도 땅이 흔들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바마마!’

황태자의 다급한 표정.

그가 황제를 덮쳤다. 이어지는 굉음과 충격.

“아…….”

황제는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 아아……!”

제 몸을 덮은 감촉이 소름 끼친다.

점점 식어 가는 몸이 황제의 위를 덮고 있었다.

황제는 눈을 감았다.

이건 그저 나쁜 꿈일 거라 생각했다.

* * *

시합이 끝났다.

오디세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바다에 삿대질해 댔다.

“포세이돈! 날 왜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오? 소금처럼 짜디짠 빌어먹을……!”

탄식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아폴로의 표정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올림포스 쪽 이야기다 보니, 신성 모독의 문제이리라.

내가 듣기에는 교묘하게 피해 가고 있었다. 넵투누스에 대한 직접적 모욕은 없었고, 어떻게 보면 바다를 탓하는 것 같았다.

내가 오디세우스에게 다가섰다.

“오디세우스. 우리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지 않나?”

“크으…….”

오디세우스가 침음을 흘렸다.

입술을 씹는 꼴이 아주 억울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제 꾀에 제가 넘어간걸.

“이 시합의 패배자가 하기로 한 걸 잊은 겐가? 나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홀로 결정했던데 말이야.”

“으으으……!”

오디세우스의 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렇게 분한가? 입술을 씹다 피를 흘릴 만큼?

눈살을 찌푸렸다.

“오디세우스, 난 심판으로서 네가 패배의 대가를 치르는 것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폴로가 나섰다.

프레이는 가만히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변호해 줄 사람은 여기 하나도 없었다.

“으으음…….”

오디세우스가 슬쩍 관중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일행을 믿는 건가? 내가 이라호드, 크레네를 데리고 온 것처럼 오디세우스도 헤라클레스나 제 아들 등을 데리고 왔다.

오디세우스의 일행들은 모두 시선을 외면할 뿐.

“저쪽은 나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끝났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거라면, 심판으로 이런 대단한 양반들을 데리고 오면 안 됐다.

“오디세우스.”

아폴로가 그를 다그치듯 불렀다.

아폴로와 프레이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공정한 심판을 약속했다. 그렇다면 패자를 굴복시키는 것도 그들의 역할이리라.

오디세우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습니다.”

그가 뭐라 중얼거린다.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는다.

눈살을 구겼다. 모두가 침묵으로 시위했다.

들리지 않노라고.

“제, 젠장……!”

큭- 신음을 흘린 오디세우스가 버럭 소리쳤다.

“잘못했습니다아! 다시는 신성 모독을 하지 않겠습니다아!”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치는 오디세우스.

아폴로가 ‘그게 사과더냐!’ 하고 짜증을 부렸지만, 나는 그를 말렸다.

저만하면 됐다. 신성을 내세워 그를 압박하고 싶진 않다.

“다음부터는 괜한 시비를 걸지 말도록.”

“크으… 아, 알겠소이다! 아드득!”

이 가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하지만 난 피식 웃었다.

분하겠지. 이해할 수 있다. 아폴로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난 이걸로 됐다.

아폴로에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 시합의 수익금과 오디세우스의 전 재산은?”

“아, 시합의 수익금은 메인 스폰서인 내 동생의 회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결산이 끝나는 대로 부치도록 하지. 계좌번호를 불러 주겠나?”

계좌번호?

의문스러운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어느샌가 다가온 이라호드가 쿡 나를 찔렀다.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잊었어요?”

“뭘 말인가?”

“응? 오디슨, 제가 오디슨에게 받은 금화를 어디에 보관한다고 말한 적 없던가요?”

그녀의 말에 무언가 언뜻 생각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훈련 도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훈련이 굉장히 힘들었다. 피땀을 흘리는 와중에 튀어나온 말을 기억할 리가.

이라호드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파프니르(Fáfnir) 은행, 예금주는 당연히 오디슨이구요. 계좌번호는 티와즈 루, 523, 쑤리사즈, 우루즈, 훼후예요.”

뭔가 암호인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폴로는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대체 뭘 알았다는 듯 끄덕이는 거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파프니르라면 분명 사악한 용일 터인데…….”

중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말해 본들 언제나 듣던 소리가 나오리라. 본래는 죽었겠지만, 역사가 바뀌었다니 뭐니 하는 이야기.

이라호드가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지만, 황금을 지키는 용의 이미지에 가장 딱 맞는 이름이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파프니르 은행이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커요.”

“…파프니르랑 별 관련이 없단 건가?”

“네, 그냥 드베르그 장인 조합의 금고를 지킬 사람을 고용한 게 시간이 지나서 한 가지 사업이 됐죠.”

이라호드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내 돈을 모아 두고 있고, 언제라도 가면 찾아올 수 있단다. 남한테 황금을 맡기는 게 불안하기는 하지만…….

맡겨 두는 것만으로 조금이지만 불어난다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금화가 새끼라도 치나?”

“그건 은행에서 대출이나 뭐… 아니, 그냥 다음에 이야기하죠.”

이라호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지금 중요한 건 그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아직도 부들부들 떠는 오디세우스를 보고 히죽 웃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아 둔 돈은 좀 있나?”

오디세우스가 흐흐- 하고 웃음을 흘린다.

뭐지? 어쩐지 녀석의 표정이 꼭 빈정대는 것 같은데?

“크흐흐. 크흐흐흐!”

“…실성했나?”

“크흐하하하하! 전략가는 승리를 거머쥐는 게 다가 아니오! 패배의 위험을 줄이는 것도 전략가의 일이지! 크흐흐!”

갑자기 웬 정신 나간 소리지?

오디세우스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재산이 단 한 푼도 없소!”

뭐라?

눈을 부릅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믿을쏘냐?

내가 나서기 전에, 헤라클레스가 나섰다.

“…오디세우스, 패배에 대한 조건을 건 것은 바로 너다. 그렇다면 그 책임도 지도록 해라! 엘리시움의 영웅이라는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흐흐흐, 하지만 정말 난 한 푼도 없는걸?”

“이 자식이 정말!”

헤라클레스가 덥석 오디세우스의 멱살을 잡았다.

그가 버럭 화를 냈다.

“네가 사는 집, 네가 마시는 포도주는 대체 뭐냐!”

“크흐흐, 크흐흐흐… 그건 모두…….”

오디세우스가 날 보며 히죽거렸다.

눈살을 구기자 킥킥- 웃음 흘리며 외쳤다.

“내 아내의 것이다!”

일동의 시선이 오디세우스의 부인에게로 향했다.

페넬로페라는 여자던가? 전형적인 제국 미인이다. 그녀가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으음.”

아폴로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이라호드가 후우- 한숨을 흘렸다.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명의가 달라서, 압류가 안 될 거 같아요.”

“명의? 부부는 일심동체 아니던가?”

“그게… 좀 복잡하거든요. 오디슨이 시합 전에 부족민 둘을 더 데리고 온 거랑 비슷해요.”

아슬라 아줌마와 라드게리타.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문제 처리 때문에 좀 더 있다가 발할라로 올 수 있다고.

그것과 비슷하다?

“…다 썼단 말인가.”

“으음, 부인한테 다 줘 버렸으니. 비슷하다 할 수 있죠.”

으음, 여러모로 이해가 안 되는데.

아폴로가 슬쩍 내게 다가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저놈이 비열한 짓거리를 한 거 같군. 이 건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든 놈의 잔여 재산을 추적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추적할 필요가 있소?”

“음?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걸 내가 왜 포기하지?

황금은 목숨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황금이 많아서 손해 볼 일보다, 황금이 없어서 힘든 일이 훨씬 많으리라.

“그냥 바로 받으면 되지 않소?”

“바로? 설마… 폭력을 쓸 셈인가?”

아폴로가 인상을 구겼다.

이라호드가 날 말렸다.

“오디슨, 폭력은 안 돼요. 취조실에서 때린 거랑은 문제가 아예 달라요.”

크레네도 고개를 휘휘 젓고서 내 옷자락을 잡았다.

그녀의 갈색 눈이 걱정으로 가득 찬 채 날 보았다.

“네, 오디슨. 진짜 안 되는 일이에요. 괜히 올림포스에 빌미를 줄 수 있다고요. 그 빌미 하나가 얼마나 복잡한 일을 만드는데요… 그러니까 오디슨…….”

허, 이 사람들 대체 날 뭐라 생각하는 거지?

어이가 없어 고개를 휘저었다.

“난 무작정 폭력이나 쓰는 야만인이 아니오.”

“…네?”

크레네가 눈을 끔뻑였다.

나는 내가 생각한 묘안을 내놓았다.

“오디세우스의 재산이 모두 부인에게 가 있다면, 아주 쉬운 해결책이 있지 않소?”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정말 이 간단한 답안을 아무도 생각 못 했다고? 놀라운 일이다.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오디세우스의 부인을 내가 가지겠소.”

대단한 답변에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페넬로페가 깜짝 놀랐다.

“어머!”

그녀는 아름다웠다.

검은 흑발은 살짝 곱슬해 윤기가 흘렀고, 옅은 구릿빛 피부는 건강해 보였다. 이목구비가 커 작은 표정도 선명하게 보였다.

페넬로페가 슬쩍 몸을 꼬았다.

“…나 같은 아줌마를? 정말?”

살짝 볼이 붉힌다.

정숙하고 지혜롭다더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오디세우스가 비명 질렀다.

“여, 여보?”

* * *

“야만인이다?”

황제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사고 이후 며칠이 지난 뒤였다.

다행이었다.

유리 세공품인 샹들리에가 떨어진 일이다. 깨진 유리가 황제를 난도질했다. 그가 흘린 피가 엄청난 탓에 모두가 전전긍긍했다.

걱정과 달리, 황제가 사망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사망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황제는 맑고 깊은 목소리를 잃었고, 팔의 힘줄이 끊어졌다.

재상이 땀을 주르륵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찌 그렇지?”

“이, 이걸…….”

재상이 황제에게 화살 하나를 건넸다.

황제는 그 화살을 받아들었다. 아주 낯선 화살은 아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만인의 화살이군. 여기 새겨진 이 야만스러운 문자만 봐도 알겠어. 그런데 이걸 왜? 설마, 놈들이 샹들리에를 쏘아 떨어뜨렸다 하고 싶은 건가?”

재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얼마 전 항구에 떠내려 온 얼음덩어리에 박혀 있던 겁니다.”

“…얼음덩어리? 이 날씨에 말인가?”

제국은 지금 여름이었다.

재상이 꿀꺽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야만인들이 넵투누스를 분노케 하려 주술을 부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야만인들의 주술 중에는 얼음을 만드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래.”

까드득. 황제가 이를 갈았다.

크게 다친 몸으로는 이 화살 하나를 꺾을 수 없었다. 양손으로 부순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지금 황제의 한쪽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팔을 잃은 상실감. 그보다 더 큰, 아들을 잃은 상실감이 차올랐다.

황제의 눈에 광기가 엿보였다.

“…그래, 야만인이라 이거지… 그래.”

황제가 화살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재상에게 명했다.

“물러나도록.”

“그게…….”

“혼자 생각하고 싶으니, 물러나라. 재상.”

재상은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섰다.

그는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황제에게서 슬쩍 비치는 광기의 빛은 심장에 좋지 않았다.

“후우.”

한숨 쉬는 재상에게 시종장이 물었다.

“재상님. 그게… 정말입니까? 야만인들이 주술로 넵투누스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는…….”

“글쎄.”

재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시종장이 흠칫 몸을 떨었다. 지금 이 남자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지 모른단 건가? 분노로 미쳐 버린 황제가 다시 또 전쟁을 벌일 터.

“글쎄라니!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그렇겠지.”

“그리 쉽게 말할 일이 아닙니다! 제국 청년들의 피가 흐를 것이고, 수많은 목숨들이 사라질 겁니다!”

재상은 시종장을 슥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마치 얼음으로 만든 듯, 한기가 풀풀 풍겼다.

재상이 말한다.

“그렇다면? 샹들리에가 제대로 고정되었는지 확인을 소홀히 한 자네가 목을 내놓을 것인가? 아니면 폐하의 명에 따라 샹들리에를 준비한 내가 목을 내놓아야겠나? 그도 아니라면 그 연회 자리에 있던 모두가 죽어야겠나?”

시종장이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분노는 매서웠다. 자연재해 때문이라는 말을 들어봐야, 황제는 분노를 멈추지 않을 터. 결국 그 화가 황성에 있는 모두를 덮치리라.

시종장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재상이 읊조렸다.

“…비겁하다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귀족이 다 죽어서야? 더 큰 피해가 생길 뿐이다.”

그는 생각했다.

점성술사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걸 예언한 거라고.

차가운 땅. 제국의 칼날이 다시 덴 마스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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