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3화. 영웅은 요구받는다 (3)
그렇지만 헤라클레스는 뚱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승부 조작은?”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오디세우스가 제 가슴을 두들기며 답답해하자, 헤라클레스는 쯧- 혀를 찼다.
“자경단에서는 직급에 맞게 행동해라.”
“…젠장할.”
오디세우스가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놈의 자경단은 언제나 마음에 안 들었다. 하계에서 그토록 고생해서 엘리시움으로 왔으면 좀 느긋하게 지내도 되지 않겠는가? 근데 또 일이라니.
후우- 한숨을 내쉰 오디세우스가 따져 물었다.
“판도라가 덴마스크에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까?”
“델로스섬의 살인사건에 오디슨이 관여했을 수도 있단 거겠지.”
“그리고 판도라의 항아리도 그놈이 가져갔을지 모른단 겁니다. 이게 승부 조작보다 훨씬 중요하고요!”
흐음- 헤라클레스가 팔짱을 꼈다.
오디세우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승부 조작이니 뭐니 해도 올림포스만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판도라의 항아리가 사라지고, 델로스섬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 데다 죄인인 판도라까지 도주한 사건은?
올림포스에서 나서서 처리할 일이었다.
문제는…….
“승부 조작 건으로 협력을 요청해서 다른 건수를 물고 늘어지기 좀 어렵긴 한데… 아무래도 원칙에 약간 어긋나는 일이야.”
“원칙보다는 정의지! 그 빌어먹을 새끼가 내 이름을 사칭했으니!”
“…그래도 법적인 절차를 따라야겠지. 일단 이 건은 다른 신고가 들어온 걸로 꾸며봐.”
다른 신고? 오디세우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헤라클레스가 히죽 웃었다.
“칼립소한테서 판도라에 대한 제보를 받았다 하면 되잖나?”
“…칼립소, 그 미친 여자한테……?”
오디세우스의 표정이 굳었다.
바다의 님프, 칼립소. 그리고 집착이 어마어마한 여자다. 표류해서 그녀의 섬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무려 7년이나 그녀에게 잡혀 있었다.
인제 와서 그녀의 도움을 받아라?
사실 그녀 외에는 적당한 인재가 없다.
판도라는 바다로 도망쳤다.
오디세우스, 그리고 제우스와 사이가 좋지 못한 포세이돈이 일러 줬다? 말도 안 된다. 가장 그럴듯한 건 칼립소뿐이다.
‘…명예를 위해서라면, 귀찮은 건 감수해야겠지. 후우.’
오디세우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옛날 애인(의부증 심함)에게 연락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내 명예를 위해.”
꾹!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나를 아프게만 해~ 내~ 모든 걸 다 주는데~ 왜 날 울리니~♪
컬러링이 의미심장했다.
* * *
벌컥, 문소리가 들린다.
굳은 몸을 풀다 멈추고 돌아봤다. 이라호드가 피곤한 얼굴로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잠을 설쳤나?”
내 물음에 이라호드가 복잡한 표정으로 날 봤다.
뭐지?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음, 그게… 아무래도 쌓인 피로가 좀 큰가 봐요.”
“미안하군. 괜히 나 때문에.”
“아뇨, 오디슨 탓하는 건 아니구요. 그나저나, 긴급 호출이 들어와서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아침 못 챙겨 줘서 미안해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아침도 혼자 못 챙겨 먹을 거 같나?”
“…변기 물로 씻으려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냉장고는 알죠?”
고개를 끄덕였다.
이그나르 가게에서 본 적 있는 마법 물품이다. 부족에서도 동굴 속 빙고(氷庫)를 만들어 식품을 보관하곤 했다.
냉장고란, 그것보다 훨씬 신기하긴 하지만 같은 원리로 돌아가는 상자다.
“그 정도야 안다.”
“냉장고 안에 간단하게 먹을 것들 있으니까 꺼내 먹고… 나갈 때 문은 그냥 닫으면 돼요. 여는 법은… 가르쳐 줄게요.”
이라호드가 붉은 단추를 눌렀고 삐리릭-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자, 이렇게 열어요.”
참 신기한 물건이다.
어쨌거나 긴급 호출이라니, 바쁘겠지.
“서둘러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으, 진짜 미안해요. 갑자기 호출이 들어온 거라. 얼른 다녀올게요. 심심하면 TV라도 보고 있던가… 아니면 그냥 이그나르 가게로 가서 같이 훈련하던가 해요.”
“그래, 알았다. 바쁠 텐데 어서 가 보도록.”
“…될 수 있으면 사고 치지 말고요.”
사고는 무슨.
내가 피식 웃자, 이라호드가 새침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못 미더운 모양이다. 슬쩍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좀 이따 보지.”
“…네, 다녀올게요.”
삐리릭- 문을 연 이라호드가 나가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날 돌아보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
쪽!
“이, 있다 봐요!”
내 볼에 입을 맞추고 후다닥 달아났다.
뭔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제는 날 밀어내더니.
흐음, 턱을 긁적였다.
“뭐,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진짜 전사는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 법이다.
전사라는 게 원래 그렇다. 언제 어느 때에 발할라나 니플헤임으로 가 버릴지 모른다. 그런데 괜히 여자를 붙잡았다가 상처만 줄 수도 있다.
…살짝 기분이 처졌다.
아침이나 먹자.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어디 보자…….”
이라호드 말대로 뭐가 많이 들어 있긴 하다.
하지만 마음에 차는 게 없었다.
“…곤약 제루리. 이게 전에 먹은 그 물컹물컹한 건가? 그리고… 하루 샐러드?”
곤약 제루리. 이라호드가 간단하게 식사 대용으로 쓸 만하다며 준 적이 있었다. 물컹물컹하고 시원하고 달콤하고 시큼한 게 맛이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식사 대신으로 하기엔 좀 부족하다.
샐러드도 그렇다.
고기를 먹고 입가심을 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냥 샐러드만? 영 아니다.
냉장고를 닫았다.
“빵이나 고기는 없나?”
주변을 살폈지만 그런 건 없었다.
식탁 위에 있는 거라고는 초록색 이상한 동물이 그려진 상자뿐. 그림은 괴동물이 우유에 과자를 부어 먹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이름이…….
“…콘프레이토?”
역시나 당기지 않는다.
전사라면 역시 고기를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게 제일 좋다.
이그나르의 가게로 갈까?
푸드득!
“음?”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니, 비둘기들이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아침 사냥을 나선 건가?
비둘기라.
“…오랜만에 사냥을 해 볼까?”
발할라로 온 뒤 제대로 된 사냥을 한 기억이 없다.
찌꺼기 사냥은 먹거리를 구하는 사냥이 아니었고, 욜 사냥대회 역시 그러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비둘기들을 보자니…….
“스읍.”
군침이 돈다.
* * *
아침의 공원은 한산했다. 하지만 사람이 없진 않았다.
어디론가 바삐 가는 이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주부들.
아이들이 꺅꺅 시끄럽게 떠들었다.
“와! 비둘기다!”
“놀라게 하면 안 돼, 알았지?”
“네~ 에!”
어린아이 하나가 비둘기를 보고 까르르 웃었다.
살금살금 아이가 다가서자 비둘기가 고개를 갸웃한다.
구륵? 구구구.
“비둘비둘!”
구르륵.
“헤헤헤! 비둘기야! 비둘기야! 오늘 아침은 뭐 먹었어? 나는 오늘 아침에 이짜나…….”
구구구.
아이가 비둘기가 친구라도 되는 양 마구 자랑을 늘어놓았다.
오늘 아침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문어 모양 소시지가 나왔다던가. 지금 신고 나온 신발은 엄마가 얼마 전 생일에 사 준 거라던가.
“근데 이짜나? 나 좀 있으면 유치원 가야 댄대. 유치원이라니… 진짜 가기 실타… 그지? 거기서는 글쎄, 공부를 한다지 머야!”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떠드는 모습에 엄마가 흐뭇하게 웃었다. 주변 다른 주부들도 깔깔 웃었다.
“호호, 애가 정말 귀엽네요.”
“어머머, 말하는 것 좀 봐! 참 똘똘한 거 같아요.”
아이 엄마에게 아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한가한 평일 아침의 평화로운 풍경.
“엄마! 나 저 비둘기한테 맘마 줘도 돼?”
“비둘기 밥으로 줄 만한 게 없는데…….”
“내 간식 빵 떼 주면 되자나!”
“조금만 떼 주기다?”
“응!”
아이가 다시 비둘기에게 다가왔다.
아이는 손에 빵 조각을 올렸다.
“비둘비둘아!”
구륵? 구구구.
비둘기가 고개를 저으며 아이 곁으로 다가왔고, 부리를 삐죽 내밀어 빵 조각을 콕 찍으려는 순간.
“어?”
내가 움직였다.
창을 던졌다.
푸욱! 구우우욱!
비둘기를 정확하게 꿰었다.
던진 창은 그걸로 모자라 한참을 날아갔고, 바닥이 쿡 박혔다. 거기에 걸린 비둘기가 움찔움찔 떨다 축 늘어졌다.
“잡았다!”
구구! 구구구구구!
주변 비둘기들이 놀라 홰친다. 아이가 멍하니 죽은 비둘기를 보고 있다.
나는 아이를 지나쳐 비둘기를 꿴 창을 집어 들었다.
“어, 어어…….”
“고맙구나. 덕분에 사냥이 쉬웠다.”
“어, 어어어어…….”
아이가 핼쑥하게 질려 덜덜 떨었고, 아이 엄마가 후다닥 다가와 아이를 냉큼 안아 들었다. 뭘 그리 바쁘게 물러서는지.
“꼬마야! 날개라도 한쪽 줄까?”
대꾸는 아이 엄마가 했다.
“됐어요! 그런 거 안 먹어욧!”
“어, 어어… 엄마… 비둘비둘이… 어…….”
“아휴… 괜찮아, 괜찮아. 집에 가자, 얼른!”
“비둘비둘이가 빨갓께… 흐윽, 흐윽!”
주변 사람들이 날 힐끔힐끔 보며 물러섰다.
쯧쯧, 혀를 찼다.
“겨우 이 정도 솜씨에 감탄하는 건가?”
발할라의 사냥은 너무 손쉽군!
사람들은 이 널린 비둘기들을 그냥 두고 황금을 내고 고기를 사 먹는다.
바보가 아닌가? 그냥 창 한번 던지면 공짜 고기가 생기는데 말이다.
“…흐음, 불을 피워야 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떨어진 가지가 마땅치 않다.
그래도 마른 나무가 없는 건 아니다. 저걸 쓰면 되겠군.
[잔디를 밟지 마시오.]
별 이상한 소리가 적힌 푯말이다. 누가 장난으로 꽂아 둔 게 틀림없다.
잔디는 원래 밟아야 잘 자라는 거 아닌가? 분명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밟지 말라니.
이해할 수 없는 장난질이다.
어쨌거나 나는 푯말을 뽑아 부쉈다.
그걸 땔감으로 삼고, 불을 찾았다.
“이보시오.”
“으악! 어, 어어… 네? 저, 저 말입니까?”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던 사람이다.
“거, 불 좀 빌립시다.”
“여, 여, 여기요!”
“음? 그냥 불만 붙이면 되는데?”
“아, 아니에요! 그냥 가지세요! 전 더 있어요!”
그 남자는 라이터를 건네고서 황급히 가던 길을 갔다. 얼마 안 하는 라이터라지만 그래도 공짜로 주다니.
참 친절한 사람이다.
“전에 비다르 클랜을 태울 때 라이터를 던지는 게 아니었는데. 쯧.”
괜히 던져서 라이터만 잃어버렸다.
다음부터는 그냥 종이나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던져야겠다.
불을 피우고 창에 비둘기를 꽂아 구웠다. 한번 그을린 뒤에 털을 뽑는 게 정석이다.
“…좀 적나? 한 마리 더 잡을까?”
주변을 둘러볼 때 삑삑삑-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눈살을 구겼다.
뭐지? 소리를 따라 눈을 돌리니, 발키리 하나가 이상한 쇳조각을 입에 물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공원에서 사냥에 취식이라니!”
“비둘기를 잡아먹는 게 금지란 말이오?”
“어……? 그게, 당연한 소리 아닌가요?”
“으음? 비둘기를 사냥하는 게 당연히 금지라고?”
영 이해할 수 없는 소리다.
그때, 발키리들이 여럿 더 날아왔다.
“어? 벌써 신고가 들어갔어요? 웬일로 다들……?”
가장 먼저 왔던 발키리가 눈을 깜빡거리면서 당황했다.
발키리들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곧장 날 둘러쌌다.
눈썹을 씰룩였다.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싸우자는 건가?”
“…오디슨 님, 같이 서로 가주셔야겠습니다.”
“비둘기를 잡았다고? 비둘기도 무슨, 까마귀들처럼 일하는 녀석들인가?”
그런 녀석들이라면 이렇게 쉽게 잡힐 리가 없는데?
게다가 내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비둘기를 전령으로 부린다거나 비둘기가 신령스럽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다.
설마, 먹을 걸 사냥했다고 문제 삼는 건 아닐 터.
“비다르 건 때문이오? 오딘께서 비다르의 소멸에 대한 죄를 물으시겠다던가?”
이라호드는 정당한 결투였기에 그 죗값을 묻는 이가 없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혈육의 정이라는 건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오딘이나 토르나, 비다르의 혈육이다.
그분들에게 약간 미안하기는 하나, 정당한 결투였다. 그걸 빌미로 날 구속하려 한다? 저항하는 수밖에 없다.
“실망이군. 그분들이 이런 식으로 날 핍박하실 줄이야.”
창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 끝에 그을린 비둘기가 꽂힌 탓에 영 모양이 안 살았지만, 그래도 무기가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
“…그런 일이라면 차라리 직접 오시라고 전해 주시오. 제대로 된 담판을 짓는 게 낫겠지. 그럼 발키리들의 솜씨를 좀 볼까?”
히죽 웃고 창을 휘두르려는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디슨! 그만! 그런 일이 아니에요!”
휘이익- 탁. 이라호드가 내 앞에 착지했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일이 아니다?”
의문과 동시에 안도가 들었다.
역시나 그분들이 그럴 리 없다는 안도. 그리고 대체 뭣 때문에 이러나- 하는 의문.
이라호드가 잠깐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후우, 신계 연맹 쪽에서 오디슨에게 체포 영장을 내렸어요.”
“체포? 내가 뭘 잘못했다고? 비둘기를 잡은 게 그리 문젠가?”
이라호드가 고개를 저었다.
“…예전, 델로스섬에서 있었던 살인사건, 그리고 죄수의 도주 협력, 마지막으로 특수절도. 그에 대한 용의자로 오디슨이 지목됐어요.”
“웃긴 소리군.”
까드득, 이를 악물었다.
발키리들이 흠칫 긴장하며 무기를 빼 든다. 이라호드가 손을 들어 그녀들을 말렸다.
“…오디슨, 동행 요청을 거절하면 어쩔 수 없이 체포해야 해요. 그리고 전 오디슨이랑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착잡한 표정의 이라호드.
나 역시 이라호드와 싸우고 싶진 않다. 대련 정도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하지만 서로 목을 노리는 짓을 하기엔 정이 너무 쌓였다.
“델로스섬에서 있었던 일 중 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없었다.”
창을 내렸다.
이라호드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 심문을 받게 될 거예요.”
“그런가?”
“예, 이번 건은 좀 복잡하게 꼬여 있으니, 변호사를 선임해서…….”
고개를 저었다.
“난 언제나 당당했고, 지금도 당당하다. 누구 등 뒤에 숨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이라호드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 전에 잠깐, 시간을 줄 수 있을까?”
“네? 시간요? 왜…….”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울렸다.
“아직 아침을 못 먹었거든.”
슬쩍 창에 꿴 비둘기를 내밀며 말했다.
이라호드가 비둘기를 보더니 눈썹을 와락 구겼다. 그러고 보니 이라호드도 아침 식사가 아직이던가?
…역시 한 마리 더 잡아야겠군.